간추린 가톨릭 교회 교리서 (80)
85. 일곱 가지 청원 I
주님의 기도는 일곱 가지 청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세 가지 청원은 하느님을 향한 간구로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나머지 네 가지 청원은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로서, 우리의 비참한 처지를 하느님의 은총에 내맡기도록 해 줍니다.
1)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느님은 본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청원은 하느님께서 거룩해지시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하느님의 이름의 거룩함이 드러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게 하소서.”라는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기를 청해야 할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죄인들을 배척하고 스스로 격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룩함의 다른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용서와 사랑과 일치의 삶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2)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느님 나라는 강생하신 ‘말씀’을 통해서 다가왔으며, 복음 전체를 통하여 선포되었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써 도래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교회 공동체 안에 현실화되었고, 세상 끝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4-15).
그리스도 신자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속해 있지만, 동시에 세상의 나라에도 속해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 대한 자녀다운 신뢰와 형제들의 사랑이 넘치는 나라이지만, 세상의 나라는 인간 자신에 대한 오만과 그로 말미암은 이기심, 탐욕, 폭력으로 얼룩진 나라입니다. 오로지 자기 이익과 욕망과 효율만을 앞세우며 돌진하는 신자유주의의 세상 앞에서 하느님 나라는 실현불가능한 꿈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세상의 정신이 계속 교회에 스며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나라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오늘 이 순간에도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겨자씨처럼 작은 모습일지라도, 힘차게 자라나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할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협력하는 일꾼이 되게 해 주십사고 청원하는 것입니다.
3)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는”(1티모 2,4) 것입니다. 또한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 우리는 이런 관대한 계획이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이 세상에서도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청하는 것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2823항).
하느님의 뜻이 이러하기에, 우리는 복음을 선포할 사명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자기 가정의 평화만을 추구하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또 이웃에게 복음을 전했다가 거절당했을 때 좌절하고 포기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바라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원하는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2014년 7월 20일 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의정부주보 6-7면, 강신모 프란치스코 신부(선교사목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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