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주교에게 듣는 신앙과 경제] (153) 프란치스코 교황의 초대 (5)
‘경제’ ‘부’에 대한 바른 인식 필요하다
지난해 3월 제266대 교황으로 즉위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등장과 함께 불어닥친 쇄신의 바람을 우리는 지금도 생생하게 느끼며 경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껏 우리 가운데서 살아 활동하고 계시는 성령을 체험해보지 못했던 이들에게는 하느님을 좀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색다른 경험이 될 것입니다.
때로는 신선함으로, 때로는 충격으로 다가오는 쇄신의 열풍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교회와 세상 곳곳을 하느님 숨결이 머무는 곳으로 바꿔나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파격’이라는 수식어마저 일상이 되어버린 듯한 교황의 행보는 교회는 물론 세상 곳곳에서 지각변동을 불러올 정도로 무게감 있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뭇사람들이 파격이라고 부르는 일들은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리스도교가 품어온 오랜 전통에 뿌리를 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의 기쁨」에서 아무리 깨끗한 과정과 투명한 절차를 거쳐 축적한 부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사용함에 있어 사랑이 사라지고 없거나, 정의가 드러나지 않을 때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옛 속담에 등장하는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라’는 말의 정신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교황은 부와 관련해 ‘돈은 봉사해야 하는 존재이지 결코 지배하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복음의 기쁨」 58항 참조)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황이 새삼 강조하지 않더라도 교회의 오랜 전통을 보면, 가톨릭교회는 부 자체보다는 부를 창출하는 과정과 정당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부와 재화를 그것을 베푸신 하느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려주신 복이기에 경제적인 부와 물질적인 재화는 그 자체로 비난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사 58, 7)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아울러 ‘빚돈을 빌미로 무죄한 이를 팔아넘기고 신 한 켤레를 빌미로 빈곤한 이를 팔아넘겼기 때문’(아모 2, 6)에 주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도 들려줍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을 등치는 일과 고리대금업, 착취 등 힘없는 이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행위들을 커다란 불의로 단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부 자체가 아니라 그 부를 쌓기 위한 수단과 방법, 나아가 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따져 하느님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을 때 그리스도적 삶에서 멀어져있다고 가르칩니다.
교황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나눔 자체보다도 그 이면에 깔려 있는 정신과 마음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이 없다면 그 자체로 훌륭한 사랑의 형태인 복음 선포는 오해를 받거나, 대중 매체에 좌우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날마다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는 말의 홍수에 침몰될 위험이 있습니다.”(199항)
버림받고 가난한 이들을 찾아 섬기고 돕는 행위가 주님의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다는 교황의 가르침은 나눔과 섬김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임을 새삼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4년 8월 10일,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