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90)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7) - 웃음의 여인 ‘사라’
안 된다, 불가능하다, 끝장이다, 그런 말 마소!
■ 남자의 운명
흔히 남자의 운명은 여자의 손에 달렸다고 말한다. 지난 번 글의 주인공이었던 아브라함 역시 이 속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본부인 사라와 그녀의 몸종이었다가 후처가 된 하가르의 주도권 다툼으로 속 꽤나 썩었다. 이는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사랑의 삼각구도 자체에서 온 당연한 귀결이었다.
어쨌건, 남녀의 상호영향력은 성경이 집요하게 조명하는 초미의 관심사다. 집회서에는 악처와 현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예를 들면 이런 표현이 있다. “내게는 사자와 용과 사는 것이 악한 아내와 사는 것보다 낫다”(집회 25,16). 오죽 악처의 등쌀이 괴로웠으면 이런 표현까지 나왔을까. 집회서의 묘미는 운명적 결론에 있다. 악처와 선남이 살면, 선남은 어떻게 될까? 선남은 악남이 되고 만다. 그런데 선처와 악남이 살면, 악남은 선남이 된다. 결국 남자는 여자를 못 이길 운명이라는 것! 어떤 경우든 여자가 더 세다는 얘기다.
사라가 어떤 아내였든지와 상관없이, 사라의 신앙이 아브라함의 신앙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신앙 진도표는 전적으로 사라의 그것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둘의 신앙 여정은 어쩔 수 없는 2인3각의 행보였다. 보폭 넓은 아브라함도 결국 사라의 짧은 보폭에 맞춰야만 했다는 얘기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후사를 약속하신 것은 그가 75세 때였다. 그 약속이 성취된 것은 그의 나이 100세, 사라의 나이 90세 때의 일이었다. 정확히 25년이 걸렸다. 잔혹스럽게 길었던 기다림 끝에 아들을 얻은 아브라함과 사라는 뒤늦게야 그 까닭을 깨달았다. 그들이 하느님의 약속을 처음부터 무조건 믿었더라면 훨씬 일찍 아들을 얻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 인간적인 믿음의 드라마
사라는 본래 사라이라 불리던 여인이었다. 이 이름이 하느님의 분부를 따라 사라로 개명된 것이다. 히브리어로 ‘사라이’는 ‘나의 지배자’를 뜻한다. 아브라함(집안)의 안주인이라는 뜻이겠다. 이것이 그냥 ‘지배자’를 의미하는 ‘사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 제한이 폐하여져서 절대적 지배자로 격상된 것임을 시사한다. 이것이 그녀가 ‘제왕의 어머니’라 불리는 까닭이다.
사라는 어떤 아내였을까. 성경은 그녀가 순종의 덕을 지녔다고 말한다. “예컨대 사라도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부르며 그에게 순종하였습니다”(1베드 3,6).
실제로 그랬다. 그녀는 남편 아브라함이 난데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며 낯선 땅을 향하여 고향을 뜨자고 했을 때 군말 없이 따랐다. 하지만 이어 그녀의 나이 65세, 남편의 나이 75세의 늘그막에 무수한 ‘후손들’을 하느님께서 약속해 주셨다는 얘기를 남편으로부터 처음 들었을 때는 뭔가 좀 의아스러웠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있었지만, 생리적으로 임신이 불가능한 자신의 나이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남편을 종용하여 혹시 그 후사 얘기가 몸종 “다마스쿠스 사람 엘리에제르”(창세 15,2)를 양자로 삼으라는 뜻이 아닌가 하느님께 묻게 한다. 하지만 남편 아브라함이 받아온 응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그가 너를 상속하지 못할 것이다. 네 몸에서 나온 아이가 너를 상속할 것이다”(창세 15,4).
아브라함의 부연 설명은 사라를 더욱 혼돈에 빠트렸다.
“임자, 그러니까 말야, 내 핏줄을 주신다는 말씀인게야. 흥분되지 않아? 내 혈통! 임자는 어떻게 생각해?”
하지만 사라의 현실인식은 냉철했다. 약속을 받고서도 또 몇 년이 어정쩡하게 흘렀기 때문이다.
“우리 나이에 과연 애를 낳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허구헌 날을 고민하다가 어느 날 새벽녘에 사라가 눈이 번쩍 뜨인다. 그리고 무릎을 탁 치면서 말한다.
“여보, 그 약속의 말씀이 무슨 뜻인고 하니, 나보고 큰 맘 먹으란 분부예요. 이 나이에 나는 안 될 테고, 혈통을 주님이 주신다는 얘기는 우리 주변에 당신의 씨를 받을 사람을 찾아보라는 얘기인 거예요. 그래 내가 생각해 봤는데 내 말이라면 껌뻑 죽는 하가르 어때요?”(창세 16,2 참조)
이 말에 아브라함은 옳다구나 하고 맞장구를 친다.
“거, 말 되는데! 진작 얘기하지 왜 인제서 얘기해~.”
결국 아브라함은 사라의 종 하가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이스마엘이 생겨난다. 좀 세월이 흘러 아브라함의 나이 86세 때의 일이었다(창세 16,1-16 참조).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후사라고 철석같이 믿고 애지중지한다. 하지만 사라의 후덕한 선처는 나중에 자신에게 후회막급한 일로 돌변한다. 이스마엘을 나은 하가르가 그녀를 괄시하면서, 그 일로 하가르 모자와 사라 사이에 질투극과 주도권 다툼이 끈질기게 이어지게 된 것이다.
■ 냉소의 반전
이렇게 서글픈 인생을 살던 사라는 89세 되던 해에 삼척동자도 코웃음 칠 얘기를 듣는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창세 18,10).
하느님의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전한 이 말에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 내 주인도 이미 늙은 몸인데”(창세 18,12).
누가 들어도 이는 냉소였다. 하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코웃음이었다. 이에 하느님의 천사는 사라를 나무란다.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창세 18,14)
지당한 말이지만, 여전히 사라의 나이 89세는 비난할 수 없는 ‘불가능의 핑계’였다. 하지만! 사라는 이듬해 그예코 임신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다. 순간, 절로 탄성이 나왔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웃음을 가져다주셨구나. 이 소식을 듣는 이마다 나한테 기쁘게 웃어 주겠지”(창세 21,6).
그리하여 그 아이의 이름은 그녀의 고백 ‘웃어주겠지’에서 파생된 발음 ‘이사악’이 되었다. 한마디로, 냉소의 통쾌한 반전이다.
사라의 심드렁한 웃음소리는 예나 오늘이나 백번 공감된다.
킥킥킥 그게 과연 가능할까? 이 나이에, 이 능력에, 이 형편에…. 아무리 신의 전능을 믿는다 해도, 진즉 불가능의 선고로 낙인된 사태는 되돌릴 수 없는 법. 킥킥킥 바랄 걸 바라고 믿을 걸 믿어야지.
하지만 혹간 들려오는 반전 웃음소리에 우리 눈은 휘둥그레진다.
호호호 어떻게 이런 일이? 사람들아 들어 보소. 달거리가 끊긴지 30년, 허리힘마저 빠져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이 내 자궁에 봄이 찾아왔다오. 아이가 생기고, 열 달 실하게 자라, 우렁차게 세상을 나왔다오. 호호호 안 된다, 불가능하다, 끝장이다, 그런 말 하지 마소. 호호호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요. 아무도!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4년 11월 2일, 차동엽 신부(미래사목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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