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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126: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43 - 명재상 다니엘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5-07-18 조회수2,402 추천수0

[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해설]
(126)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43) - 명재상 다니엘

‘사람의 아들’ 출현 예언, ‘하늘나라’ 희망 드러내


 

■ 하늘이 내린 영재의 떡잎

다니엘은 바빌론 유배지에서 활약한 하느님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니엘서에 담겨 있는 예언말씀의 전망은 훨씬 후대의 시대적 정황에 부합하기에 어떤 성서학자들은 그의 활약시기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기도 한다. 그만큼 시대를 뛰어넘는 메시지를 전했기에 야기된 논란이 아닌가 싶다.

다니엘은 바빌론 궁중 영재학교 출신이다.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는 무슨 영감을 받았던지 끌려온 이스라엘인 왕족과 귀족 가운데서 4명을 따로 뽑아 재사로 키우도록 명을 내린다. 그들 중 다니엘이 끼어 있었다. 궁중에서 다니엘은 ‘벨트사차르’라는 이름으로 개명된다. 말하자면 창씨개명이 된 것인데, 이로써 그와 동료들의 ‘하느님 백성’으로서 민족적 정체성을 바꾸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이는 유다인 율법이 금하는 육류와 술 등을 제공하는 궁중식단을 거부한 데에서 나타났다. 다니엘은 자기들을 맡은 감독관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부디 이 종들을 열흘 동안만 시험해 보십시오. 저희에게 채소를 주어 먹게 하시고 또 물만 마시게 해 주십시오. 그런 뒤에 궁중 음식을 먹는 젊은이들과 저희의 용모를 비교해 보시고, 이 종들을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다니 1,12-13).

열흘이 지나 보니 궁중 음식을 먹은 여느 젊은이보다 그들의 용모가 더 좋고 살도 더 올라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앙적 정조를 고스란히 지킬 수 있었다. 어린 나이가 보여줄 수 있는 신앙 치고는 빼어남을 넘어 독보적 경지라 할 수 있음에, 경탄을 금치 못할 뿐이다. 하늘이 움틔운 떡잎들의 기염이라 할까.


■ 네 왕조를 섬긴 대쪽 재사

저렇게 궁중에서 양성된 유다인 인재들은 ‘지혜나 예지’에 관하여 어떠한 것을 물어보아도 “온 나라의 어느 요술사나 주술사보다 열 배나 더 낫다”(다니 1,20)는 사실을 왕에게 인정받았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즉시 그들을 측근으로 기용하였다.

그 중 출중한 재사가 다니엘이었다. 다니엘은 왕들이 꾼 난해한 꿈 해몽에 영험한 직관을 뽐냈다. 그 꿈들은 대부분 짧고 먼 미래에 전개될 국제적 패권다툼에 관한 것들이었는데, 천하의 어떤 현자도 풀지 못하는 것을 다니엘은 천기누설급 계시를 받아 거뜬히 해석해 냈다. 이에 왕들은 그를 2인자 자리에 앉혀 책사 임무를 맡게 했다. 이렇게 하여 그가 직접 섬긴 왕은 넷이요 왕조는 셋. 바빌론 제국의 네부카드네자르와 그의 아들 벨사차르, 이어 바빌론을 장악한 메디아 왕조의 다리우스와 페르시아 왕조의 키루스, 이렇게 3왕조 4왕! 이들을 얼마나 잘 모셨으면 다니엘에게 “임금의 벗”(다니 14,2)이라는 칭송이 따라다녔을까.

이런 특은은 다니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은 다니엘에게 내린 불세출의 지혜를 통하여 고대 근동 왕들에게 당신의 존재와 영광을 유감없이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적어도 그들이 다니엘을 곁에 두고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믿는 ‘유일신 야훼’를 믿었다.

하지만 어디서든 반대자들의 모략과 박해는 있는 법. 이방신들과 우상숭배에 관련된, 정적들의 음해는 끊이지 않았다. 우상숭배 종용 악법, 모략, 사자굴 등의 벼랑길을 다니엘은 운명으로 감내해야 했다. 목숨이 날아갈 위기 때마다 그는 대쪽 신앙으로 담대하게 버텨 말 그대로 ‘천우신조’의 반전을 이뤄냈다.


■ 예언에서 묵시로

역사의 판이 커짐과 동시에 그리고 이민족의 압제가 장기화될수록, ‘예언’은 ‘묵시’로 바뀌게 된다. 즉 구체적인 말씀으로 내려지던 메시지가 점점 해석이 난해한 환시로 바뀌게 된다. 상징들이 많이 등장하고 역사를 바라보는 호흡도 매우 길어진다. 천지개벽 차원의 일들이 일어날 무대는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 국내가 아니라 여러 민족들이 교대로 패권을 장악하던 근동 및 유럽이다. 이런 판도에서 제시되는 희망은 한 단어로 ‘메시아’에 초점이 있다. 초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하느님 백성을 궁극적으로 구원할 인물은 천하권력을 제패할 권능을 지닌 ‘메시아’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저런 묵시적 희망의 단초를 에제키엘이 뜬금없이 전했음에 대하여 바로 지난 호에서 언급한 바 있다. 오늘의 주인공 다니엘은 그 절정을 드러낸다. 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자’에 대한 환시다.

“내가 이렇게 밤의 환시 속에서 앞을 보고 있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3-14).

여기서 ‘영원한 나라’는 바로 하느님 나라를 말하며 ‘사람의 아들’, 곧 인자(人子)는 예수님을 지칭한다. 예수님 당신이 스스로를 가끔 ‘사람의 아들’이라 부른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은 “내가 다니엘서에 나오는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야”라고 말씀하신 셈이다. 이 묵시적 예언의 핵심은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잇따른 ‘영원한 통치’와 ‘멸망하지 않는’ 나라라는 자구는 우리네 영적 희망의 박동을 쿵쾅거리게 한다. 이 말씀은 우리 귓전에만 익숙할 뿐, 사실적으로는 전혀 낯선 지대다.

이 묵시를 전한 다니엘은 기원전 7세기 인물이다. 그로부터 600여 년 후 이 말씀은 글자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또 2,000여 년이 흘렀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저 ‘사람의 아들’임을 실감나게 고백하고 있는지 성찰하게 된다. 다소곳이 촉을 열고 그 시절 예수님 몸소 발설하신 음성의 파동 속에 서려 있는 의미를 채집하여 본다.

살고 싶으냐? 생명을 주마.
이기고 싶으냐? 승리를 주마.
힘을 갖고 싶으냐? 권세를 주마.
나는 ‘사람의 아들’,
천상천하의 영원한 ‘통치권’이 내게 있다!
생사, 화복, 흥망이 내 손에 달렸으며
권력, 재력, 언력이 내 소관이다.
너 정녕 내게만 무릎 꿇으면,
나 너를 팍팍 밀어주리라.

인정받고 싶으냐? 존경을 받으리라.
공을 쌓고 싶으냐? 사명을 얻으리라.
이름을 날리고 싶으냐? 명예를 득하리라.
나는 ‘사람의 아들’,
세상 모든 ‘영광’의 블랙홀이다!
내 사랑으로 이룬 놀라운 구원 업적
마땅히 찬미, 찬양, 감사 깜이다.
너 진정 터럭만한 ‘영광’까지 내게 돌리면,
네 입술이 만날 “할렐루야, 아멘!”을 노래하리라.

행복하고 싶으냐? 여기 낙원이 있다.
평화롭고 싶으냐? 여기 무릉도원 둥지가 있다.
정의를 누리고 싶으냐? 여기 유토피아가 있다.
나는 ‘사람의 아들’,
하느님 ‘나라’를 세세로 다스리는 왕이다!
더 이상 눈물도, 슬픔도, 고통도, 죽음도 없는 나라.
너 만일 나를 ‘왕 중의 왕’으로 알아 모시면,
뽑힌 백성으로 환희에 들리라.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7월 19일,
차동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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