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31)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48) - 바보, 토빗
철석같이 믿어라 ‘은총’보다 더 큰 실력은 없다
■ 바보의 슬픔
상식을 따르지 않는 사람 또는 시속(時俗)과 동떨어진 삶을 사는 사람을 일컬어 흔히 ‘바보’라 칭한다. 토빗은 영락없는 바보였다.
토빗은 납탈리 지파 라구엘의 후손으로서, 아시리아 왕 살만에세르 시대에 갈릴래아에서 아시리아의 땅 니네베로 끌려간 유배민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함께 귀양살이 하던 친척들과 동포들에게 유난스럽게 자선을 베풀었다(토빗 1,17 참조).
그는 살만에세르를 이은 왕 산헤립이 하느님을 거슬러 유다인들을 참살할 때에도 몰래 시체들을 묻어주다 들통 나, 도망자 신세에다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는 일을 겪는다(토빗 1,20 참조). 얼마 후 다시 왕이 바뀌어 에사르 하똔 시대가 되고 토빗의 조카뻘 되는 아키카르가 재정장관에 등용되자, 토빗은 그의 도움에 힘입어 집으로 돌아가 아내 안나와 아들 토비아를 되찾게 된다.
선행의 댓가로 치러야 했던 부당한 시련들로 기죽을 토빗이 아니었다. 환영 차 친척들이 자신만을 위해 차려준 잔치에서도 생각나는 것은 오로지 ‘주님을 잊지 않는 가난한 이들’의 굶주림이었다(토빗 2,2 참조). 함께 나눌 요량으로 아들 토비아에게 찾아 데려올 것을 명하자, 뜻을 받들고 나갔던 토비아는 돌아와 ‘목 졸려 죽은 동포’의 비보를 전할 따름이었다. 이 일로 잔치는 순식간에 ‘슬픔’의 판이 되어버렸다. 순간, 토빗은 아모스 예언자가 이스라엘의 원죄였던 베델 성전의 수송아지 우상숭배를 두고 했던 말을 떠올리며 애곡한다.
“너희의 축제들은 슬픔으로,
너희의 모든 노래는 애가로 바뀌리라”(토빗 2,6).
그러고 보니 가난한 동족을 향한 토빗의 자선과 시신 매장은 한 ‘착해빠진’ 사람의 휴머니즘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행동 선택은 확실히 역사 현상 배후에 숨겨있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영적 통찰의 소산이었다.
바보 토빗, 그의 바보스런 실행은 ‘헛약은’ 동포들의 얕은 처신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동시에 보속이기도 했다. 그 싹수를 우리는 토빗이 유배자가 되기 전 이미 고국에서 보여준 바보 영성에서 확인한다. 그의 친척들은 모두 우상숭배에 빠졌다.
“그러나 나만은 축제 때에,… 예루살렘으로 갔다. 나는 그때마다 맏물과 맏배와 가축의 십분의 일과 그해에 처음 깎은 양털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서둘러 가서, 아론의 자손 사제들에게 주어 제단에 바치게 하였다”(토빗 1,5-7).
그뿐이 아니다. 제물에 관한 모세의 규정을 토씨대로 지켰다(토빗 1,7-8 참조). 법을 어기는 사람들이 흔히 동원하는 ‘융통성’의 논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누구의 눈으로 봐도 그는 천상 ‘바보’였던 것이다.
얄궂게도 그의 바보 선행에 내린 보상은 ‘불행’이었다. 바로 저 역사적인 잔칫날 저녁, 뜰 안에서 잠을 자다가 눈에 난데없는 참새똥이 떨어져 버리는 바람에 실명하게 된다(토빗 2,9-10 참조). 이 봉변으로 그의 처지는 졸지에 주위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아내의 품앗이 노동에 의지하여 연명하는 꼴로 전락한다.
■ 바보 아내의 슬픔
조롱의 세월 4년 째, 하루는 아내가 웬 염소새끼 한 마리를 끌고 온다.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보고 집주인이 포상으로 준 것이다. 토빗은 드디어 아내가 생활고 때문에 도둑질까지 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돌려주라’고 생사람 잡는 소리를 하는 토빗의 완고함에 견디다 못한 부인은 한마디를 한다.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토빗 2,14).
그동안 꾹꾹 눌러두었던 바보 아내의 속내다. 속절없는 슬픔! 억지로 견뎌왔지만, 자신을 도둑으로 모는 ‘바보’ 남편의 몰이해는 그 슬픔을 증폭시킬 따름이다.
아내 안나의 입장에서 남편 토빗의 ‘바보’ 짓은 더 이상 용납해 줄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자신이 현명하게 ‘현실적’인 판단으로 남편의 바보짓을 막아야 한다! 그 이후 안나는 일단 토빗의 선택에 사사건건 반론을 펴고 본다.
토빗이 아내의 구박에 충격을 받고 기도로써 삶의 마감을 준비한 후, 일찍이 빌려주었던 빚을 받아오도록 심부름 차 아들 토비아를 ‘메디아’라는 먼 곳으로 보내려 하자, 안나는 즉각 반발하였다.
“어쩌자고 내 아이를 보내십니까?”(토빗 5,18)
그까짓 돈 때문에 아들을 잃는 일이 행여나 있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논박이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 동행해 주실 것이라는 남편의 설득에 한발 물러선다. 하지만, 아들이 돌아올 날 수가 지나도 무소식이 되자, 안나는 또 울고불고 원망을 쏟아댄다. 토빗이 안심을 시켜도 막무가내로 절망할 뿐이다.
“당신이나 조용히 하고 나를 속이지 말아요. 내 아이는 죽었어요”(토빗 10,7).
이는 아들을 가진 이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노심초사다! 누가 이 섣부른 단념에 돌을 던지겠는가. ‘바보’ 남편에 대한 독백 넋두리와 아들의 비극에 대한 상상슬픔은 필경 실성한 여인의 그것이었으리라.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바보 아내의 이 무기력한 슬픔을 머지않아 환호성으로 바꾸어 주신다.
“봐요. 당신 아들이 와요. 함께 갔던 사람도 오네요”(토빗 11,6).
바보의 슬픔은 성스럽다. 바보 아내의 슬픔이라고 결코 속되지 않다. 그러기에 두 슬픔의 동침에 하느님은 저 희소식을 내려준 것이다.
■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언
이 글로써 토빗 이야기의 줄거리를 다 요약하지 못함이 아쉽다. 거두절미하고 ‘염소’ 사건 말미에 아내의 입에서 들려온 푸념은 토빗에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지난 4년간 그 누구의 비아냥도 거뜬하게 견뎌온 그였지만, 아내의 한마디를 그는 감내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이의 한마디는 이토록 위력이 있는가? 절망한 토빗은 하느님께 목숨을 거둬달라는 기도를 올린다(토빗 3,6 참조).
믿음이 돈독했던 그는 자신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것을 확신하고, 아들 토비아에게 유언을 남긴다(토빗 4,3-21 참조). 결과적으로 이 유언은 그가 전화위복으로 눈을 뜨는 은총을 입음으로써 무효처리가 된다. 그리고 인생 말미에 가서 또 한 번의 유언을 남긴다(토빗 14,4-11 참조). 유언의 내용은 구체적이면서도 함축적이다. 나는 그 글들을 읽으면서 큰 은총을 입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의 목록을 만난 듯 했던 동시에, 그것을 이미 살아낸 사람의 후회 없는 회고를 접했다는 느낌 때문이다.
토빗의 유언은 내 마음 속에서 이런 결정체가 되어 빛나고 있다.
아빠는 바보였다
너도 바보가 되거라
없어도 나누거라
있으면 그만큼 통크게 쏘고
없으면 고만큼 실하게 쏘거라
하느님의 판결은 항상 옳다
어떤 운명의 결정에도
찬미와 찬송과 감사를 드리거라
행복하고 싶으면 계명을 붙들거라
곧이곧대로 한 점 일 획까지…
‘융통성’이라는 말은 속임수다
성공하고 싶으면 하느님께 기도하거라
철석같이 믿고 화끈하게 청하거라
‘은총’보다 더 큰 실력은 없다
언제나 현자의 권면에 귀기울이고
허심으로 따르거라
이는 유언이 아니라 내 생애였다
내말을 명심하고
낱낱이 실행하거라
네가 지금 보는
아빠의 불운은
지나가는 것이다
네게는 반드시
축복의 길이
열리리라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8월 30일, 차동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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