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고 힘나는 신앙 -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해설]
(132) 성경 안에서 만나는 기도의 달인 (49) - 심긴 왕비, 에스테르
일촉즉발 민족말살 위기에서 백성들 구해내
■ 신데렐라 에스테르
아직 바빌론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전부 귀환하지 못하던 시절, 크세르크세스 왕이 인도에서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백이십칠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때의 이야기다. 그는 B.C. 530년대 즈루빠벨 주도하의 성전 재건과 450-40년대 느헤미야에 의한 성벽수축 사이의 공백기가 절정을 넘어 마무리 국면에 이르렀을 때, 페르시아 제국을 통치한 인물이다.
그는 나라를 다스린 지 3년째 되던 해 온 페르시아와 메디아 장군과 귀족과 고관대작들과 각 지방 수령들을 초대하여 큰 연회를 베풀었다. 장장 180일에 걸친 축제를 마무리하면서 향연의 절정으로 그는 왕비(‘와스티’)의 화려한 동반예식을 계획하였으나, 왕비는 왕명을 거스르고 독자행보를 하였다. 이로 인해 왕의 진노를 사게 된 왕비는 급기야 폐위되고 만다(에스 1,10-22 참조).
이리하여 새 왕비를 뽑는 경연이 선포되었을 때, 간택의 영광을 입은 인물이 바로 유다인 출신 에스테르였다. 그녀는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포로로 끌려온 유배민의 후손으로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사촌 오빠인 모르도카이의 양녀로 입양되어 수사 왕성에서 장성하였다.
모르도카이는 본디 벤야민 지파출신 유배민으로서 수사 왕궁에서 왕을 측근에 모시는 요직에 있는 이점을 활용하여 둘 사이의 인척관계를 비밀에 부친 채 에스테르에게 새왕비 간택에 응할 것을 권하였는데, 그것이 로또를 맞추는 격이 된 것이었다.
신데렐라! 에스테르는 하루아침에 유배민에서 왕비로 ‘신분상승’을 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엄청난 경쟁을 뚫고 왕비로 뽑힌 것은 물론 그녀의 출중한 미모 덕이기도 했지만, 그 배후에는 역사를 미리 내다보시는 하느님의 개입이 작용했다.
■ 외짝 라이벌의 음모
이야기의 발단은 유다인 출신 모르도카이와 아각 사람 하만 사이의 세력다툼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어쩌다 크세르크세스의 눈에 들어 궁중 고위직에 오른 하만이 자신 앞에 무릎 꿇어 절하려 하지 않은 모르도카이에게 적개심을 품으면서 사건이 전개된다(에스 3,1-5 참조). 사실 하만은 모르도카이가 궁중 내시로 활약하던 시절, 왕을 시해하려던 다른 두 내시의 음모를 (에스테르 왕비를 통해) 왕에게 고발하여 목숨을 구한 공로로 왕의 총애를 얻게 된 일을 심히 못마땅해 하던 터였다(에스 1,1(17) 참조).
어쨌든 넘버2의 위치에 있었던 하만은 ‘건방진 놈’ 모르도카이와 그의 민족 유다인을 말살할 계략을 꾸민다. 그는 ‘푸르’라 부르는 주사위를 던져 대학살의 날을 12째 달인 아다르 월(지금의 2-3월) 제13일로 받고, 왕에게 이렇게 간한다.
“임금님 왕국의 모든 주에는 민족들 사이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저희들끼리만 떨어져 사는 민족이 하나 있습니다.… 임금님의 법마저도 그들은 지키지 않습니다. 그들을 이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은 임금님께 합당치 못합니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그들을 절멸시키라는 글을 내리시기 바랍니다”(에스 3,8-9).
이와 함께 하만이 재산몰수의 결과로 은 일만 텔런트가 국고로 환수될 것을 미끼로 언급하고 있음을 놓치지 말 일이다. 또한 여기서 하만이 ‘유다인’에 대한 왕의 신뢰를 인식하여 단지 어떤 ‘민족 하나’로 슬쩍 뭉개어 말함과 동시에 ‘임금님의 법마저 지키지 않는다’고 음해하고 있음을 놓치지 말 일이다. 왕은 이것이 자신의 왕비 및 충신 모르도카이의 목숨을 노리는 계략인 줄 모른 채, 넘어가고 만다.
“은은 그대 차지요. 이 민족도 그대가 좋을 대로 처리하시오”(에스 3,11).
왕은 화끈하게 자신의 인장을 하만에게 넘기고, 하만의 음모는 일사천리로 실행가도에 들어간다. 유다인 말살 공문이 작성되고, 나라 전 지역에 파발 되고, 이제 시행일만 남았다!
제 아무리 왕비요 권세가라도 이 시행령에는 예외가 없다. 결정은 하만과 왕 사이에서 이루어졌기에 무슨 영문인지도 알 길이 없다.
■ 운명을 뒤집은 결단
이 상황에서 모르도카이는 에스테르를 설득하여 왕의 마음을 뒤집어 줄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는 그 서슬퍼런 ‘시행령’을 전제할 때, 목숨을 건 일이었다. 그러기에 각자 3일간 단식기도를 바친 후, 피를 말리는 진언(眞言)이 전개된다. 에스테르는 나름 지혜를 발휘하여 왕과 하만만을 위한 연회를 벌이게 하여 왕의 애간장을 태우면서 절차적으로 ‘하만’의 계략을 폭로한다.
여기서 잠깐! 이틀에 이어진 연회 사이에 하느님께서는 왕에게 불면의 밤을 내리시어 궁중 사건 일지를 읽도록 하신다. 왕은 모르도카이라는 ‘내시’가 다른 내시의 시해계획을 적발한 대목을 읽고 다시금 그 고마움을 상기한다(에스 6,1-3 참조).
왕이 이렇게 유다인의 신용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시점에 이르러, 에스테르는 하만의 술책을 폭로한다. 이로 인해 간악했던 하만의 공작은 외려 왕의 메가톤급 진노를 사게 된다. 그리하여 하만은 모르도카이를 매달기 위하여 자신의 집에 세워 박은 말뚝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고, 하만 일당의 전권이 임금의 인장과 함께 모르도카이에게 넘어가게 된다(에스 8,2 참조).
이윽고, 유다인을 말살하기로 정해진 아다르 월 13일은 한마디로 운명이 뒤집힌 날이 된다. 이 날은 유다인들의 쓰라림이 기쁨으로, 초상날이 축제일로 바뀐 날임과 동시에, 하만을 지지하던 일당 7만5천명이 처형된 날(에스 9,16 참조)이다. 유다인들은 이 날을 기려 매년 아다르 월 14일과 15일을 주사위 ‘푸르’로 정해진 날이라는 의미로 ‘푸림’ 축제를 지낸다(에스 9,26 참조).
이 대목에서 다시금 또렷이 상기되는 것은 저 민족말살 위기의 절정에서 모르도카이가 에스테르를 설득하는 논리다.
“그대가 이런 때에 정녕 침묵을 지킨다면, 유다인들을 위한 해방과 구원은 다른 데서 일어날 것이오. 그러나 그대와 그대의 아버지 집안은 절멸하게 될 것이오. 누가 알겠소?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하여 그대가 왕비 자리에까지 이르렀는지”(에스 4,14).
여러 단어들 중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하여’가 유독 도드라지게 다가온다. 이는 비단 에스테르에게 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직업과 직무에 유효한 말씀이다. 사실이지, 시방 이곳, 지금 우리의 자리에로 우리는 보냄 받은 신원이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에스테르의 기도는 바로 오늘 우리의 기도와 잇닿아 있다 할 것이다.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하여’
나
시방 이곳에
보내졌거늘,
나
무슨 빌미로
딴전 부리리오.
어쩐지
하루좀드락 격무도
성에 차지 않더이다(에스 4,17(29) 참조).
직무의 보람보다
“천하를 얻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더냐”
라시는 님의 물음이 더 허전하더이다.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하여’
하느님의 의를 위하여, / 복음을 위하여, / 우리를 구원할 그 이름을 위하여, / 공익(公益) 중의 공익(公益)을 위하여,
나
시방 이 곳에
보내졌거늘,
나
어찌
스리슬쩍 모르는 척 하리오.
어쩐지
온종일 내심 동경이
의미(意味)이더이다.
성취의 기쁨보다
“잘하였다, 충성스러운 종아!” 하시는 님의 맞장구가 더 그립더이다.
‘지금과 같은 때를 위하여’
나
시방 이 곳에
보내졌거늘,
그분의 분부라면
나 무엇을 마다하리오.
* 차동엽 신부는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성서신학 석사, 사목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및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가톨릭신문, 2015년 9월 6일, 차동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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