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교회공동체 대하여
2015-- 1002 + 1016. 금. 이태원
2. 세상의 모든 것에는 원론(原論)이 될 내용들이 있습니다. 이때 말하는 원론이라는 것은, 다양한 존재들이 드러내는 모습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적용이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원론들 가운데 나라의 근간(根幹)을 이루는 규정을 담은 것을 가리켜, 헌법(憲法,=법헌 법법, =<법>국가 통치의 기본 방침, 국민의 권리와 의무, 통치 기구의 조직 따위를 규정하는 한 국가의 최고의 법.)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헌법’이라는 글자의 내용을 제대로 알기 전에, 왜 ‘새 법’이라는 말 대신, 헌법이라고 하지? 헌 것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말을 쓰는 것이야 하고 내심 질문아호 생각한 일이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글자가 담는 참된 의미를 알기 전에 말입니다.
3. 오늘 말씀드릴 순서인 교회(敎會)에 대한 것도 비슷한 과정일 수 있습니다. 교회라고 부르는 공동체는 세상에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존재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들으려면, 세상의 일만 잘 안다고 해서 그 내용을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 있기는 하되, 그 역할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하느님이나 하느님나라와 관련이 있는 것이고, 그 하느님나라와 세상나라를 연결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교회존재의 의미라고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이니, 그 대상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알아듣는 사람의 태도는 다를 것이고 그것을 묘사하는 표현도 다를 것입니다. 이렇게 다르면 그 효과도 당연히 다를 겁니다.
4. 교회라는 말의 의미부터 믿을 교리의 75번 문답에서는 말합니다.
교회는 그 옛날에 예수님께서 세상의 삶을 마치고 보여주신 부활과 승천 후에 있었던, 성령강림 때에 시작된 것으로 설명합니다. 사람의 판단과 시각으로 말하면, 하느님의 두 번째 위격(位格)인 성자와 세 번째 위격인 성령은 분명히 다른 존재라고 알아듣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이 75번의 문답에서는 성령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교회를 예수님의 삶에서 직접 연결된 것으로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성립이 성령과 관계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5. 예수님의 삶에서부터 연결된 교회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전제(前提)로 하는 것이니, 그 본질상 거룩하다(=‘성스럽고 위대하다’는 의미)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공동체가 이렇게 말해도, 그 안에 함께 있을 사람들이 그 모습을 다르게 만들거나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면, 글자 자체의 설명보다도 그 안에서 함께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활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6. ‘거룩하다’는 표현은 신앙의 용어입니다. 세상의 다른 데서는 사용하지 않을 표현이라는 얘기입니다. 거룩하다는 글자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原則)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세상의 일과 사람의 일에는 같은 의미를 적용할 일이 없다는 뜻이 될 것이고, 신앙의 일에는 그러한 의미를 담아 사용할 일이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이 낱말의 의미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느님의 뜻을 아는 사람이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어떤 일을 하거나 드러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7. 교회의 특징을 설명하는 또 다른 표현인 ‘공번된’이라는 말은 ‘공변된’ 이라는 말의 옛날 표현이고, 그 의미는 ‘행동이나 일 처리가 사사롭거나 치우침이 없이 공평하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니, 사람의 세상에 하느님의 뜻은 그렇게 공변된 입장으로 드러난다는 뜻으로 알아들으면 좋겠습니다.
8. 교회공동체의 존재의미는 76번 문답에 나옵니다.
하느님의 힘이 세상에 드러나는 방법으로 사람의 세상에 이루어진 교회의 존재목적은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고 하는 표현도 세상에 사는 사람이 전부 다 긍정했거나 받아들인 것을 확인한 다음에 하는 소리는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이 세상에 있게 된 교회의 입장에서 세상을 향해서 하는 소리입니다. 교회의 존재가 세상에 사는 인간을 위해서 있게 된 것이라고 하는 소리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드러내는 방식과 비교하면 차이가 있는 행동입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자신의 명예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는 것을 먼저, 행동으로 옮기는 경향이 있지만, 교회의 존재이유를 말하는 교회의 입장에서는, 하느님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지는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 세상에 있게 된 것이 인간이기는 하지만, 이 인간이 세상에서 늘 완벽하고 완전하게 산 것은 아니므로 아무래도 하느님의 끊임없는 보호와 손길은 그 사람에게 필요했다는 것의 반증이 바로 교회공동체가 존재하는 목적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그렇게 인정한다고 해서 교회공동체가 있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일에 대해서 인간의 긍정과 그에 맞는 행위는 필요하게 됩니다.
9. 구속(救贖)공로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삶을 요약한 말입니다. 세상에서 사용하는 대로 설명하면,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물건의 소유권을 바꾸듯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이셨던 예수님은 당신자신의 선택에 따라 당신의 목숨을 십자가상 제사봉헌의 제물로 내놓으시고 인간을 죄에서 돌려세우셨고, 그래서 인간을 다시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고 그 길로 이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로 구원의 길로 다시 돌아서게 된 인간이 행동으로 드러내야 할 것은 어떤 것이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머무르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에 대해서 그렇게 행동한다는 것은 당연하고도 기본적인 자세이기도 하지만, 현실은 당연한 대로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10. 교회를 다스리는 구조에 대한 이야기가 77,78,79번 항에 나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세워졌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만, 애석하게도 그 교회는 세상에 있으므로, 사람이 드러내는 행동의 영향을 받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교회에 속한 사람이 모두 다 악하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사람이 드러내는 자세에 따라 교회가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교회는 그 으뜸의 대표권 자리에 있는 이를 가리켜 교황이라고 하고, 교황은 예수님의 으뜸제자였던 베드로사도와 그 뒤를 따라 으뜸대표자로 선정되는 분이 되곤 합니다. 성경에 보면, 베드로사도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시라고 가장 먼저(!) 제자들 앞에서 믿음을 드러낸 인물로 나옵니다. 물론 다른 사도들의 일부처럼 어부가 이전의 시절에 그가 가졌던 직업이기도 했습니다.
11. 지금의 이스라엘 땅, 갈릴래아 호수주변의 활동시작과 예루살렘에서 세워진 것이 교회공동체이기는 했습니다만, 예수님이 사셨을 때, 그곳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으므로,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까지 퍼져가게 됩니다. 교회공동체가 이스라엘 땅을 벗어나 더 널리 퍼지게 된 것은 ‘교회에 다가왔던 박해(迫害)의 결과’였습니다. 세상에서 정치권력을 쥔 자가 자기가 가졌다는 힘으로 종교를 누르면 종교의 힘이 꺾어질 줄 알았겠지만, 보통 세상의 일들과는 달리 신앙의 모습은 없어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더 널리 펼치게 됩니다. 희한한 일입니다. 물론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가 박해의 결과로 다 그런 모습을 띄게 되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교회공동체의 역사를 생각하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12. 그래서 초대교회시대에 살았던 ‘떼르뚤리아누스’라는 교부는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인의 씨앗’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교회가 신앙인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이 말을 좀 더 해석하면, 신앙의 모습은 세상의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뜻이 될 겁니다. 실제로 신앙의 힘이 약해지거나 그 힘이 드러나지 않게 되는 배경에는 ‘순교에 의한 강압’이 아니라, 종교와 신앙을 드러내고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이 세상의 풍조와 타협하거나 훼방할 때에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교회가 태어나고 시작한지 20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만, 사람들이 드러내는 모습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 훗날 언젠가 들을 내용인 교회라는 공동체의 역사에 대한 것입니다.
1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서, 처음에 12명의 사도를 선택하셨습니다. 선택한 사도가 12명이었으니, 아마도 제자는 그 숫자보다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은 3년(!)의 세월을 다 지내시고서, 십자가에 못이 박히십니다. 이 일에 큰 역할(!)을 한 것은 12명사도의 하나였던 ‘이스카리옷 사람 유다’의 역할이 컸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 유다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을 끊었다고 하고,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그 자리를 마티아라는 사도가 이어받게 됩니다. 12명사도의 자리는 그대로 유지된 것이었습니다.
14.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의 강림이후에 로마제국에 교회공동체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은 훗날에 등장한 바오로사도의 힘이 컸습니다만, 교회공동체의 대표는 ‘예수님의 선택’에 따른 베드로사도로 연결됩니다. 다른 11명의 사도들도 신앙을 증거하고 선포하느라 애썼을 것이고, 어디선가 신앙을 증언한 방법으로 목숨을 내놓으셨겠지만, 베드로사도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죽는 방법으로 신앙을 증언합니다.
15. 교회를 세우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물론 교회가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성령의 강림이 있었던 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 10일쯤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성령의 힘은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힘으로 나오시는 분입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에게서 배운 올바른 정신이 잘 드러나는데 지속적인 힘을 주신 분이 ‘성령’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일입니다. 성령강림 다음에 이루어진 것이 교회의 성립이었지, 교회의 성립에 성령의 강림이 필수적인 사건이나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라는 얘기도 가능할 것입니다.
16. 교회공동체는 예수님의 뜻을 드러내는 모양으로 세상에 세워졌고, 베드로사도를 중심으로 하여 그 구조가 완성되었으며, 베드로사도는 로마제국의 수도에서 순교하신 분으로, 로마교회의 으뜸의 자리에 오른 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사도를 통하여 성장하고 발전한 로마교회는 현실에는 교황님을 통하여 그 구조를 계속 유지해나갑니다. 같은 말이 반복되기는 했습니다만, 서방그리스도교회의 보이지 않는 으뜸은 예수님이며, 또한 눈에 보이는 으뜸은 로마의 주교를 지칭하는, 베드로사도의 후계자 교황입니다.
17. 베드로사도와 함께 예수님의 12사도를 이루었던 다른 제자들도 훗날 교회의 구조에 따라 주교(主敎)라는 명칭으로 불립니다. 주교와 사제에 대한 표현은 이렇습니다. 80번과 81번 항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주교는 베드로사도의 후계자로 역할을 다하는 로마교황의 협력자들이며, 그 교황의 선택에 따라서 주교로 임명되는 이 분들은 베드로사도이외에 다른 사도들의 후계자로 생각합니다. 세상 어느 곳의 문서에도 그렇게 정해져 있는 과거의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런 기록이 있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는지 따로 확인할 일이기는 합니다만, 교회의 모든 체계는 교황님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예수님도 12명의 사도들을 선택하셨지만, 아무래도 세상에서 권위를 드러내던 정치의 힘과 연결된 곳이 로마뿐이라서 그런지도 알 수는 없는 일입니다.
18. 베드로사도의 후계자인, 로마교황은 이전의 교황님들이 임명한 다른 주교님들 가운데,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는 분들이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대표 자리인 교황님의 자리에 오른 분은 또 그 일을 반복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교회의 주교님들은 당신의 일들을 도울 사람으로서 사제들을 구별하여 선택하고, 사제들은 예수님의 뜻을 세상에서 실천하는 신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는 일들을 합니다. 여기에도 어디까지나 사람이 하는 일이나 그들이 갖는 자세가 영향을 끼치므로, 어느 위치에 있든지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는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19, 다음으로 교회가 세상에 드러내는 권한의 모습입니다.
말은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같은 일을 계속해 나갈 후임자를 선택하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을 규정하는 내용입니다. 두 가지 표현이 나왔습니다. 신품권과 교정권입니다. 이 2가지 표현은 세상의 일들에는 그 권한이 통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신품권은 인간이 하느님의 품격을 갖게 되는 권한이니, 공동체에 속해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사제직분을 행할 사람들을 선택하여 그 위치에 맞는 권한을 주는 것이고, 교정권을 다스리고 바로잡는 권한으로서, 위치와 직무에 따라 행사할 수 있는 한계를 따로 말합니다. 교회공동체의 일이나, 전 세계에 있는 교회공동체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한이라면 교황님이 행사할 것이고, 지방의 주교님들이 할 수 있는 범위를 갈라서 구별합니다.
20. 교리문답85번 항은 한때 문제의 요소를 가진 것이라고 말했던 무류권(無謬權)에 대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틀릴 수 없는 자신감, 혹은 그런 권한에 대한 내용입니다.
한때는 교황이나 교회의 입장에서 어떤 행동이나 결정을 해도 잘못은 없다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권한에 대한 것이 바로 이 항목입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함께 읽으신 것처럼, 세상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경우는 당연히 있겠지만, 신앙에 관한 내용에서, 교황님이 다른 주교님들과 같은 내용으로 판정할 때로 그 행사범위를 줄이는 표현으로 되어있습니다.
21. 다음은 교회의 분열에 대한 것입니다.
이 신앙교리를 반포한 공의회는 1545년~1563년에 열린, 뜨리덴티노공의회였습니다. 1517년에 시작된 프로테스탄트의 성립과 교회분열에 대한 응답으로 열린 것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이렇게 중요한 신앙교리의 결정을 집대성한 일이 없었고, 단편적으로 또 부분적으로 신앙교리들을 선언했습니다만, 프로테스탄트의 분열은 참으로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과거의 모든 신앙내용들을 하나로 묶어서 정리하게 했으니 말입니다.
22. 지금 세상에도 일부 개신교의 말을 들으면, 교회가 성립되던 초창기, 성령강림 때부터 개신교의 싹이 시작됐다고 우기거나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공의회를 열어 결정한 주교님들의 선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세우는 교회는 하나 뿐’이라는 것입니다. 말은 이렇게 해도 그 하나에서 분열된 것이 있다는 것까지 거부하는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이미 1054년에 성화상공경문제와 성령에 대한 해석문제 때문에 동방정교회가 생겼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서방교회는 현실과 타협하고 현실의 다양한 요소들을 받아들여 적응해가는 입장을 비판하고 싶었는지 그들은 그리스—정교회(正敎會)라는 명칭을 썼습니다.
23. 우리가 미사 때에도 함께 하는 신경에도 나오는 교회의 4가지 특징에 대한 내용이 87번 항의 내용입니다.
네 가지 특징은 조금 전 위에서도 설명한 내용에 있는 것처럼,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공변)되고 사도로부터 전하여 내려오는 요소를 말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성령의 강림 때에 세우신 교회이고, 하느님의 뜻을 중심에 두고 움직이는 공동체이며, 어디에나 널리 두루 펼쳐져있는 공동체이며, 예수님께서 선택하시고 그분과 함께 하셨던 사도들의 믿음에서 시작한 공동체라는 것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24.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우스갯소리로 동전 ‘십원’에서 1원이 빠진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은 기본으로 알 수 있는 내용이지요? 사전에 나오는 구원이라는 말의 뜻은 2가지로 나옵니다. ‘①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해 줌.②<그리스도교>인류를 죽음·고통·죄악에서 건져냄’이라고 나옵니다. 아무래도 두 번째 표현된 것이 이 시간에 맞는 설명일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신앙인이 아니면서도 개인이 바란다고 내게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지는 일입니다. 이 말은 신앙인이라고 하더러도 누구에게나 저절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도 될 것입니다.
25.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뭔가 조건이 있을 일이기는 하겠지만, 구체적인 사항을 모두 다 규정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교회공동체에 얼마나 놀라운 능력을 주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능력도 다른 사람을 단죄하고 벌하는 입장에서 사용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 능력을 드러내는 일은 신중해야 할 것입니다.
26. 드러나는 조건만 말한다면, 올바른 신앙인으로서 올바른 길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그 대상에 들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발휘하여 하느님에게서 멀리 있겠다고 작정하고 그대로 하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하느님의 구원은 실현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인의 길을 준비하는 분들입니다. 어떻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옳은 일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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