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으로 풀어보는 교리] 영원한 삶과 최후의 심판 영원한 삶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결합된 우리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천상 생명에 실제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으므로 이미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부활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는 이렇게 벌써부터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품위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육신을 소중히 여겨야 함은 물론 다른 사람의 육신도, 특히 그 육신이 고통당하고 있을 때 더욱 소중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영생의 삶은 무엇보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하여, 죽음을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임종자를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하느님, 그리스도를 믿는 이 영혼이 이제 세상을 떠나려 하나이다. ...... 오늘 이 영혼에게 평화를 주시고, 거룩한 시온에서 주님을 우러러 뵈오며 길이 살게 하소서. 구세주이신 주님을 뵈오며 영원히 하느님을 직접 뵈옵게 하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고, 당신의 부활로써 그러한 약속이 참됨을 보증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며,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천국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생명이 있고 하늘나라가 있습니다.”라는 암브로시오 성인의 말씀과 같이, 천국의 삶은 한마디로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과 함께하는 완전한 삶입니다. 나아가 천국은 모든 복된 이들과 함께하는 생명과 사랑의 친교로서, 천국의 복된 사람들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은총으로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는 생활이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천국은 결국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며, 가장 간절한 열망의 실현이고, 가장 행복한 결정적 상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러한 천국을 ‘열어’주셨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1코린 2,9)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바로 천국을 두고 하신 말씀 아닐는지요? 연옥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 것이지만, 그들이 하늘의 기쁨으로 들어가는데 필요한 거룩함을 얻으려면 죽은 다음에 정화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선택된 이들이 거치게 될 이러한 정화를 연옥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연옥에서의 벌은 영원히 단죄 받은 이들이 받는 지옥의 벌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어떤 죄들은 현세에서 용서받을 수 있지만 내세에 가서야 용서받을 수 있는 죄도 있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인데, 이러한 가르침에 바탕한 연옥교리는 15-16세기에 걸쳐서 교회공의회(피렌체, 트리엔트)에서 확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연옥에 관한 교회의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에서 이미 말하고 있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의 관습에도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유다 마카베오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속죄를 한 것이지요.) 그리고 교회는 그 초기부터 죽은 이들을 존중하고 기념하였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특히 (그들이 정화되어 천국에 이르도록) 미사성제를 드렸습니다. 또한 교회는 죽은 이들의 정화에 도움을 주고자 죽은 이들을 위한 자선과 대사(大赦)와 보속도 권하고 있습니다. 지옥 교회는 지옥의 존재와 그 영원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죽을죄의 상태에서 죽는 사람들의 영혼은 죽은 다음 곧바로 지옥으로 내려가며, 그곳에서 지옥의 고통, 곧 ‘영원한 불’의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지요. 죽을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죽는 것은 곧 영원히 하느님과 헤어져 있겠다고 우리 자신이 자유로이 선택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옥’ 이라는 말은 이처럼 하느님과 또 복된 이들과 이루는 친교를 결정적으로 ‘스스로 거부한’ 상태를 일컫는다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고 회개하기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이 가게 되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고 있는 ‘지옥’(Gehenna)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그곳 지옥에서는 영혼과 육신이 함께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마태 13,41-42) 그러나 지옥의 주된 고통은 영원히 타오르는 뜨거운 불이 주는 그러한 물리적인 아픔이 아니라, 인간이 창조된 목적이며 인간이 갈망하는 생명과 행복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신 하느님과 영원히 단절된다는 정신적인 절망의 상태라 할 것입니다. 지옥에 대한 성경의 단언과 교회 가르침은 인간들이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위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자유를 사용하라는 호소이며, 동시에 그것은 회개하라는 절박한 호소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는 주님의 경고대로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므로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 때에 이루어질 하느님의 심판, 곧 공심판을 말합니다. 교회는 최후의 심판에 앞서 “의로운 이들이나 불의한 자들이나” 죽은 모든 이가 부활할 것인데, 그날에 진리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각 사람이 하느님과 맺은 관계의 진상이 결정적으로 밝혀질 것이고, 각 사람이 지상 생활 동안 선을 행하였거나 이를 소홀히 한 일의 궁극적 결과까지도 드러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가 될지 모를 최후의 심판에 관한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은, “은혜로운 때에, 구원의 날에”(2코린 6,2) 회개하라고 하느님께서 아직도 사람들에게 하시는 일종의 호소인 것입니다. 즉 이는 하느님에 대한 거룩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촉구하며, 주님의 재림에 대한 “복된 희망”을 알리는 것이지요. 신경에서 마지막으로 고백하는 “아멘”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과 계명에 대하여 믿음을, 또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완전한 성실성을 전적으로 신뢰함을, 나아가 하느님의 심판과 하느님의 나라가 참으로 도래하기를 믿고 희망한다는 고백입니다. 신경을 바칠 때마다 새 하늘과 새 땅, 즉 하느님 나라의 완전한 도래에 대한 희망을 새롭게 굳게 해 나가는 레지오 단원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5년 12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계산주교좌성당 주임, CBCK 교리교육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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