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자! 파울리타 수녀의 유익한 교리여행] (22) 여행지 : 한국 교회사 1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의 가장 자랑스러운 점은 무엇일까요? 한국 교회는 외국인 성직자들의 선교 활동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진리를 목말라 하던 학자(평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연구하면서 스스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는 세계 교회 역사상 유례없이 독특하며 자랑스러운 점이지요. 100여 년의 박해가 이어지면서 수많은 순교자가 탄생하였지만, “순교자의 피는 곧 그리스도의 씨앗”(테르툴리아누스, 2~3세기)이 되어, 한국 교회는 놀랄만한 성장을 하여 오늘날 아시아 대륙 복음화의 희망으로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그럼 첫 번째 한국 교회사 퀴즈 여행을 떠나볼까요? 퀴즈여행 1. 인도와 일본에까지 선교한 동방의 사도는? 2. 중국의 선교사 마태오 리치가 저술한 한문 교리서로 조선에 큰 영향을 끼친 책은? 3. 조선 시대 실학자들이 천주교를 무엇이라 부르며 연구하였는가? 4. 가장 대표적인 ‘천주교 서적 강학회’는 경기도 광주 어디에서 열렸는가? 5. 한국인 최초로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사람은? 6. 한국 가톨릭교회가 설립된 해는? 7. 1785년 을사추조 적발 사건으로 붙잡혀 한국 교회 최초의 증거자가 된 사람은? 답란 1. 성 프란치스코 □□□르 2. □주□□ 3. □학 4. □□암 5. 이□□ 6. 17□□년 7. 김□□ (정답은 ‘가이드 설명’에서 확인하십시오) 가이드 설명 1. 동방의 사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를 중심으로 유럽, 아메리카로 퍼져나갔고, 동방으로는 예수회 선교사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는 1541년 인도 고아에 들어와서 선교를 한 후, 1549년 일본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지요. 일본에 이어 중국에 복음을 전할 계획으로 가던 중, 중국 광둥항이 바라보이는 섬에서 열병에 걸려 안타깝게 선종하였습니다. 2. 마태오 리치의 책 중국에는 1582년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원 마태오 리치 신부(1552~1610년)가 파견됨으로써 선교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천주교 교리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천주실의」(天主實義, ‘천주에 대한 참된 토론’이라는 뜻)를 출간하였는데, 이 책이 조선으로 들어와 한국 천주교 성립에 큰 영향을 미쳤지요. 일본과 중국의 선교사들이 조선에도 선교하려고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18세기 중국을 방문한 조선의 사신들에 의해, 또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과의 접촉(소현 세자와 아담 샬 신부와의 만남)으로 서양 문물과 교회 서적이 조선으로 들어오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3. 실학자들이 연구한 학문 그 당시 조선은 유교(주자학)를 국교로 삼았으나, 이론적인 주자학에 대한 실망으로 사실에 바탕을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실학(實學)이 일어났습니다. 서양에서 들어온 가톨릭을 ‘서학’(西學)으로 부르며 이수광, 이익 등 남인 학자들이 실학의 대상으로 받아들여 연구하기 시작하였지요. 후에 가톨릭을 ‘천주교’(天主敎)라고 불렀는데, 이는 천주(天主)를 믿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중국에서 하느님을 천주(天主)로 부른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4. 천주교 서적 강학회 18세기에 조선에는 강학회라는 것이 있었는데, ‘강학회’(講學會)란 한적한 절간 등에서 학자들이 스승을 중심으로 모여 자유롭게 토론하던 일종의 세미나 또는 학술모임을 말합니다. 1777년부터 주어사(走魚寺, 경기도 여주시)에서 서학을 연구하는 ‘천주교 서적 강학회’가 시작되었고, 1779년 겨울, 천진암(天眞庵, 경기도 광주시)에서 시작된 강학회는 5년여간 계속되었기에, 이곳이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서적을 통해 가톨릭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벽,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이 그 중심인물이었지요. 5. 한국 최초의 영세자 강학회를 주도하고 가장 열성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를 전파한 사람은 이벽(호: 광암, 1754~1785년)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 창설의 선구자라고 하지요. 그는 1783년 친구 이승훈이 동지사(동짓달에 중국으로 보내던 사신)의 아들로 중국으로 가게 되었을 때,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구해오라고 부탁을 합니다. 1784년 이승훈은 북경에 가서 조선 교회의 반석이 되라는 의미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 및 성물을 가지고 귀국하지요. 6. 한국 가톨릭교회의 설립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은 이벽의 집(수표교 근처)을 거점으로 하여 많은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정기적인 모임을 가집니다. 그런데 신도들이 많아져서 이벽의 집에 모두 모일 수 없기에, 중인 김범우의 집에서 모였지요. 이를 앞의 공동체 ‘수표교 공동체’와 구분하여 ‘명례방 공동체’라고 합니다. 이로써 한국 교회 공동체가 설립되었기에, 1784년을 한국 가톨릭교회 설립 해로 삼고 있지요. 참조) 명동대성당은 최초의 ‘수표교 공동체’와 그다음 공동체인 ‘명례방 공동체’ 모두를 아우르는 한국 천주교회 설립지에 위치한다. 즉 한국 교회 공동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곳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7. 을사추조 적발 사건 1785년 명례방에서 모임을 하고 있을 때, 투전을 한다고 생각한 관리들에 의해 모임에 참석한 이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이를 을사년에 추조(형리)가 적발하였다고 해서, ‘을사추조 적발 사건’이라 하지요. 체포된 이들 중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 이승훈, 이벽 등은 명문 있는 학자들이라 풀려났으나, 중인인 김범우는 귀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심한 문초를 당하고 귀양길에서 사망하였기에, 한국 교회 최초로 증거자가 되었지요. 함께 체포되었던 다른 이들도 가정과 문중에서 신앙을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행 옵션 : 천진암성지 (경기도) 천진암성지(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앵자봉 아래 위치)는 전 세계에 유례없이 자생적으로 설립된 우리나라 천주교 발상지이다. 성지 옛터에는 한국 천주교회 설립 주역인 하느님의 종 이벽,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복자 정약종의 묘가 있다. 이 외에 다른 순교 성인들과 가족 묘도 조성돼 있다. 성지(36만여 평) 안에는 한국 천주교회 설립 200주년과 이벽 성조의 기념비 등 여러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한국 천주교회 창립사연구원, 성모 경당, 광암성당 등이 완공되어, 순례자들이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 현재 천진암 박물관과 100년 계획 천진암 대성당(3만 여평) 건축이 착공되어 진행 중이다. 여행 기념품 우리나라 교회의 초석을 놓은 이벽,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은 당시 양반 신분과 가족을 버리고 신앙을 증거하였지만, 아직 복자나 성인 대열에 들지 못하고, 현재 시복 추진 중에 있습니다. 2021년 6월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가 교황청 시성성을 방문하여,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의 시복 예비심사 법정문서를 제출하여 이제 시복 심사가 본격화되었습니다. 나는 이분들의 시복을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있습니까? 또 이분들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요?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9월 5일, 마리 파울리타 수녀(노틀담 수녀회 교리교재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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