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80. 사회 정의(「가톨릭교회 교리서」 1928~1948항)
교회의 연대성, 하느님 나라 정의를 사회에 실현하는 방법 미국 바이든 대통령은 가톨릭신자이지만 낙태를 찬성합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와 충돌이 불가피합니다. 어떤 사제는 바이든 대통령에게 성체를 내어주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론 성체를 무기화해서는 안 된다는 반대 의견도 교회 내에 있습니다. 낙태는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는 정의로운 일일까요? ‘정의’를 단순하게 말하면 100원어치 일을 했으면 100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탁월한 존엄성이 존중됨”(1930)으로써만 실현됩니다. “인격의 존중은 인간의 존엄성에서 비롯하는 권리에 대한 존중을 내포합니다.”(1930) 하지만 세상에서는 교회의 가르침만큼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어떠한 법률도 그 자체의 힘으로 진정 우호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데 방해가 되는 공포와 편견, 교만과 이기주의적 태도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1931) 사회의 법은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고 사회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의무’만 다한다면 더는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정의는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하느님의 행복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1934) 하느님의 뜻이 우리의 정의입니다. 자신은 부모가 낙태하지 않아 세상에 살면서 태아에게는 그런 권리를 빼앗는 것이 정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는 받았으면서 아기의 인권은 빼앗는 것이 낙태입니다. 이렇듯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이 불평등한 정의가 이루어집니다. 교회도 사회적 불평등을 인정합니다. “나이와 육체적 능력과 지성적 도덕적 역량과, 누구나 혜택을 입을 수 있는 부와 그 분배에 따라서 인간들 사이의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탈렌트(재능)는 똑같이 분배되지 않습니다.”(1936) 하지만 “이러한 차이들은 하느님의 계획에 속하는 것”(1937)으로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탈렌트’를 가진 사람들이 그 혜택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바라십니다.”(1937) 문제는 이 자비와 사랑을 사회법으로는 강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정의가 어떻게 사회에 실현되게 할 수 있을까요? 바로 더 높은 사랑의 법을 따르는 교회가 하나가 되어 그 ‘연대성의 힘’으로 사회에서 영향력을 갖는 것입니다. “연대성은 그리스도교의 뛰어난 덕목입니다.”(1948) 어차피 사회의 입법자들은 교회가 속한 사회 구성원이 뽑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정의와 어긋나는 정책을 펴려는 이들에게 교회가 연대하여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바이든 대통령의 낙태 정책을 교회 일부에서만 찬성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연대성의 힘은 사라집니다. 연대성의 힘은 분열되지 않을 때 발휘됩니다. 교회가 사회에 참 정의를 알려주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주교회의에서 결정하는 사항에 순종하여 한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교회 내에서는 진정한 신앙인의 선이 명확해야 할 필요성도 있습니다. 교회의 한목소리를 내는 힘이 사회 정의를 이루는 힘이 됩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8월 14일,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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