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96. 둘째 계명 ② (「가톨릭교회 교리서」 2156~2167항)
우리 세례명 속에는 하느님의 이름이 들어있다 어떤 자매는 하느님께서 주신 계시라는 이유로 자녀를 하도 속박합니다. 그래서 자녀는 참다못해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수신 차단해 버립니다. 어떤 어머니는 성당에 다녀야 구원된다고 하도 자신을 범죄시하며 신앙을 강요하는 딸을 더는 집에 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다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왜 지하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눈살이 찌푸려질까요? 이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이 쉬고 싶은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심으시고 인간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시거나, 유다가 당신을 배반하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놓아주신 이유입니다.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인격과 존엄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신앙인이 이런 일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상대를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 사람 뜻대로 주님을 믿게 되면 그 사람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기에 자존심상 더 주님을 멀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십계명의 둘째 계명은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이름을 헛되게 하는 방법은 하느님 이름을 직접적으로 모독하거나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일 다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세례명을 헛되게 만드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의 세례명 안에는 하느님 이름이 들어있습니다. 마치 우리 세례명은 하느님 이름을 싸고 있는 포장지와 같습니다. 따라서 포장지가 헛되게 대해지도록 만들면 내용물도 그렇게 취급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암행어사는 임금의 이름으로 파견됩니다. 임금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면 임금이 준 소명을 충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려면 그 받은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습니다.(요한 5,43 참조) 그래서 아버지께 순종하셔서 그 소명을 완수하십니다. 예수님은 병자도 고치고 죽은 자도 살리며 아버지만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시는 것이 곧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음을 증명한다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0,25 참조)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파견된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교회에 당신 이름을 주시며 그 권한도 주셨습니다. 교회에 죄를 용서하는 당신 직무를 부여하신 것입니다.(요한 20,22-23 참조) 이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반면 교회를 받아들이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마태 10,40 참조) 우리 각자도 교회의 이름으로 세상에 파견되었습니다. 나의 이름을 욕되게 하면 교회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나의 이름은 교회가 지어준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명은 “영원한 이름”인데, “하늘나라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이 새겨진 각 사람의 신비하고 독특한 인품이 찬란히 빛날 것입니다.”(2159) 따라서 우리는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소명을 세상에서 수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례명 안에 숨겨진 교회와 주님 이름을 헛되게 만들지 않는 방법입니다. 나의 이름은 나를 파견하신 분의 이름의 포장지입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12월 11일,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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