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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197: 복음과 사회교리 - 참된 신앙의 실천이 세상과 사회 치유하는 길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2-12-19 조회수1,451 추천수0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197.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30항)


‘참된 신앙의 실천’이 세상과 사회 치유하는 길

 

 

비신자1: 크리스마스는 늘 기대돼요. 즐거운 파티가 있거든요!

마리아: 기쁨과 친교도 좋지만 성탄의 본의미를 되새겨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바치셨다는 점입니다.

비신자2: 그렇군요. 그런데 왜 그분이 죽어야 했나요?

베드로: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며, 자신들이 바라던 것만을 희망하던 시대에 사랑과 용서가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는 가장 중요한 것임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비신자3: 공감이 갑니다. 세상이 아무리 발전해도, 사랑과 용서가 없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겠지요. 새삼 성탄을 맞아 깊이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것은 사랑과 용서인 것 같네요.

 

 

성탄의 본래 의미

 

크리스마스의 기쁨이 온 거리에 가득합니다. 그분의 오심은 거룩한 기쁨을 줍니다. 하지만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한 속죄 제물로서 오신 그분을 떠올리면 들떴던 마음도 다소 숙연해집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였느냐”(마태 15,16)라는 말씀처럼 혹여 상업화된 세태 속에서 성탄을 맞이하는 건 아닐까, 과연 성탄의 참된 의미를 실천하는지 저 스스로를 성찰해 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평을 터뜨렸던 사건은 신앙의 본질을 망각하고 거부했던 무지의 역사를 묘사합니다.(민수 11장) 본질을 잃어버린 삶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또한 그런 일을 미연에 막기 위해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참된 신앙이냐, 위선이냐

 

힘써야 할 것은 신앙의 본질을 깊이 묵상하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정작 실천이 어렵지요. 부끄럽지만 저도 이를 고백합니다. 해야 할 마땅한 노력과 수고를 회피하고, 어떤 희생도 감내하지 않으며 도리어 내가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를 누군가에게 전가시킬 때 슬프게도 신앙은 가식과 위선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악은 종종 위장된 모습으로 교묘하게 드러난다고 하지요.

 

오늘날 교회와 세상이 모두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그것은 결국 참된 믿음을 통한 복음의 열매가 적기 때문입니다. 「간추린 사회교리」도 “믿음은 응답과 수용을 위해 요구되며, 그 믿음을 통해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길 수 있고, 자기 형제자매들에게 구체적인 사랑을 배푼다”고 언급합니다.(39항 참조)

 

 

하느님께 대한 믿음

 

누구든 믿음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다만 어떤 믿음인지가 중요하지요. 그런데 내 욕심에 대한 믿음은 가득한데 정작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있는지, 그리고 실제로 노력할 의지의 여부가 관건입니다. 2000년 전에도 여러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성탄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마음으로 구세주를 뵈었던 동방박사나, 가난한 목동들도 있었고, 정반대로 자신의 야욕 때문에 아기들을 학살하는 천인공노할 죄악을 저지른 헤로데 같은 인물도 있었지요. 그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오늘날 우리 모두가 성탄을 마주하며 ‘참된 신앙의 실천’이야말로 세상과 사회를 치유하는 길임을 성찰해야 합니다.

 

“아우슈비츠에서 히틀러의 강한 의지가 가치를 드높이듯, 갈릴리 호숫가에서는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이 빛을 발한다. 그러나 히틀러의 의지가 자기 자신의 의지였던 반면 예수님의 의지는 그의 아버지의 의지였다. 이 두 의지의 결정적인 차이는 고집의 의지냐 순종의 의지냐 하는 데 있다.”(M. 스캇 펙 「거짓의 사람들」)

 

[가톨릭신문, 2022년 12월 18일, 이주형 요한 세례자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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