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학04] “전능하신 천주 성부를 믿나이다” (1) 사도신경은 성부께 대한 신앙, 성자께 대한 신앙, 그리고 성령께 대한 신앙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도신경이 사실은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인 것이지요. 이 구조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첫 문장부터 보겠습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가끔 무슨 기도를 해야 할 지 모를 때, 성체 앞에서 사도신경을 바치며 묵상하는 것은 참 좋습니다. 그런데 삶에서 별 어려움이 없을 때에는 입에서 술술 나오지만, 정말로 삶이 고달프고,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에는 “전능하신”이라는 그 첫마디에서 막혀버리기도 합니다. 천지 사방이 어둡고 발은 허공에 뜬 것 같은, 그런 인생의 시간을 겪어보신 분들은 “전능하신 천주 성부”라는 말을 진심으로 고백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실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분들에게는 가능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분들에게는 첫 단어가 목에 걸려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전능하신”이라니…. 전능하시다면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으시거나, 허용하지 않으시든가 혹은 해결하시든가 해야 하지 않을까?” 고통스러운 이 질문 앞에서 한 가지 생각해 보도록 초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라고 할 때 어떤 모습을 상상하시나요? 어쩌면 우리는 ‘슈퍼맨’ 같은 하느님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우리의 인생에서 하느님은 때로 슈퍼맨처럼 체험되기도 합니다만, 때로 우리는 침묵 속에 계시는 하느님, 심지어 무능해 보이기까지 하는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위안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체험은 우리만의 것은 아닙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르 15,34) 십자가 사건에서 성부께서는 침묵하시는 것 같습니다. 대체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무엇일까요? 분명한 것 하나는 ‘전능하신’이라는 말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짜잔’하고 나타나서 문제를 해결하는 그런 뜻만은 아닐 것 같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판토크라토르(παντοκρατωρ)’입니다. 이 말은 만유의 주재자라는 뜻으로 ‘만군의 하느님’, ‘온 누리의 하느님’이신 거지요. 온 우주의 하느님, 개인, 권력자 그 모든 것들보다 높으신 분, 최고의 통치권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 역사를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며(이사 13,6; 52,7)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시는 유일하고 참된 구원자(이사 43,11)라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힘은 영원하고 그분은 시작도 마침도 없으시며 충실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도움은 주님의 이름에 있으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시편 123,8)이라는 시편의 고백은 온갖 고통과 불의, 공포 속에서 우리를 지탱하는 힘입니다. 어느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루카 5,12) [2023년 2월 12일(가해) 연중 제6주일 서울주보 4면, 최현순 데레사(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교수)] [가톨릭 신학05] “전능하신 천주 성부를 믿나이다” (2) “전능하신 하느님”에 대한 고백의 의미를 조금 더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주에 성경에서 눈에 띄게 드러나는 의미를 보았습니다만, 여전히 ‘슈퍼맨’ 같은 하느님의 이미지에 아직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 때문입니다. 조금 어려워 보일 수도 있긴 하지만, 사도신경의 라틴어 본래 문장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이 문장을 단어 순서대로 이해하면 ‘나는 믿나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를 전능하신’입니다. 정리하면 “나는 하느님을, 전능하신 아버지를 믿나이다.”가 되겠지요? 보시다시피 전능하신(omnipotentem)이 수식하는 단어는 하느님(Deum)이라기보다는 아버지(Patrem)입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의 의미는 ‘아버지’라는 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아버지라는 이미지로 표현됩니다. 이스라엘을 돌보시고, 고통 속에서 외치는 백성의 소리를 들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버지로 이해되는 것이지요. 이런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을 예수님은 ‘완전하신 분’으로 묘사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그런데 이 말씀의 맥락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마태 5,43-48)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분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완전함은 완벽주의가 아니라 자비와 사랑의 완전함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사건 안에서, 그리고 천지의 창조주요 만군의 주님이며 전능하신 분이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 안에서 드러난 사랑, 또한 그 아들을 믿는 이들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시는 그 사랑, 여기에 하느님의 완전함, 하느님의 전능함이 있습니다. 사도신경이 성부, 성자, 성령께 대한 신앙고백으로 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2월 12일 자 신학 4회차 원고 참조) 전능하신 아버지라는 고백은 뒤에 나오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을 이해하는 고백일 때 그 참되고 귀한 의미를 담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전능하신’은 더 이상 ‘힘’의 개념으로만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에 있어서 전능함’입니다. 사랑 때문에 사람이 되실 수 있는 하느님, 당신 아들을 내 주실 수 있는 하느님, 십자가의 무능함을 받아들이실 수 있는 하느님의 전능함입니다. 어떤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가장 위대한 것만이 가장 작은 것’ 안에 담길 수 있습니다. [2023년 2월 19일(가해) 연중 제7주일 서울주보 4면, 최현순 데레사(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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