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07. 다섯째 계명 ② (「가톨릭교회 교리서」 2263~2283항)
살인자가 될 것인가, 순교자가 될 것인가 - 카라바조 ‘성 베드로의 순교’. 자살과 순교의 차이는 분명하다. 생명을 주님을 위해 쓰면 순교요, 나를 위해 쓰면 자살이다. 우리는 지금 살인하지 말라는 다섯째 계명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삶 속에는 살인인 것 같지만 살인이 아니고 살인이 아닌 것 같지만 살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당방위로 죽이는 것은 살인일까요? 아닙니다. 교리서는 “자기 사랑은 도덕성의 기본 원칙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존권을 존중하는 것은 정당하다”라고 말하며 “적절한 방어 행위”를 인정합니다. 전쟁 상황에 나와 가족을 죽이려는 이들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닌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타인의 생명보다 자신의 생명을 돌볼 의무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2264) 반대로 살인이 아닌 것 같지만 살인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암묵적인 살인입니다. 실화를 배경으로 한 단편 영화 ‘44번 버스’는 이런 내용입니다. 어떤 강도 두 명이 버스에 탔습니다. 그들은 버스 안 승객의 금품을 빼앗고 운전사까지 끌고 내립니다. 운전사는 여자입니다. 그들은 버스 승객들이 보는 앞에서 운전사를 폭행합니다. 버스 안에는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많은 남성들이 타고 있었지만, 오직 한 사람만이 뛰쳐나가 그들과 싸우다 칼에 다리를 찔립니다. 폭행을 당한 여자 운전사는 다리를 절뚝이며 버스에 타려는, 자신을 구해주려던 사람을 태우지 않고 그냥 가버립니다. 그리고 뉴스에 그 44번 버스가 다리에서 추락하여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버스 운전사는 자신을 가해한 강도들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당하는 것을 방관한, 버스에 타고 있었던 사람들까지 공범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내가 당연히 구해주어야 할 사람을 구해주지 않을 때 이런 것이 방관적 살인입니다. 마찬가지로 낙태를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낙태에 대한 분명한 협력은 중죄가 됩니다.”(2272) “인간의 생명은 임신되는 순간부터 철저하게 존중되고 보호되어야 합니다.”(2270) 순교와 자살도 구별하기 쉽지 않습니다. 다같이 자기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자살은 살인이고 순교는 살인이 아닙니다. 사실 자살과 순교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생명을 나의 것으로 생각하느냐, 주님의 것으로 생각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주님을 위해 쓰면 순교요, 나를 위해 쓰면 자살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데 나의 생명을 쓰면 순교요, 나를 살리려고 하면 자살이 됩니다. 순교로 많은 이들이 믿음을 가지게 될 수 있지만, 자살은 이 세상 고통에서 피하여 내가 살려고 하는 행위의 일환이 됩니다. 안락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안락사를 살인으로 정의합니다.(2277 참조) 지금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위입니다. 내가 살려고 살인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전연명치료거부에 대해서는 또 다릅니다. 이는 천국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고 이웃을 위한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의 생명은 그것을 주신 분의 의도대로 써야 합니다. 그러면 순교가 되지만 죽으려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의 살인자가 됩니다. 인간은 어차피 죽습니다. 살리기 위해 죽을 것이냐, 살기 위해 죽일 것이냐는 우리 선택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5) [가톨릭신문, 2023년 3월 5일,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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