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학10]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이다 사도신경의 두 번째 문단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사도신경의 12개 믿을 항목 중에서 2-7항목까지가 예수님에 대한 것이니 신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가장 강조되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항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하느님의 아들이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육화로부터 부활에 이르기까지 예수님 삶의 신비, 그리고 영광 받으신 신비가 그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부터 보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참 인간이시며 참 하느님이라고 믿는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특히 서간문에 많이 등장하는데, 복음서에서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자신을 그 아들로 인식하고 계셨다는 것을 엿볼 수 있게 하는 표현이 여럿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마르 14,36 참조) 아람어인 ‘아빠’는 유아들이 사용했지만 어른도 아버지와 친숙한 관계가 있을 때 사용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비유였다는 것입니다. 매우 드물게 하느님과 의인 사이를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표현하지만, 그것 또한 비유적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의 넘을 수 없는 차이 때문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대놓고 ‘아빠’라고 부르는 일은 없습니다. 아마도 이 호칭은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빠’라는 표현이 로마 8,15와 갈라 4,6에도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물론 우리가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그리고 성령의 힘 덕분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도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여기에서 ‘알다’라는 표현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치, 감정 등을 포함한 더 넓은 범위에서 서로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수난 전에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요한 17,1-2) 마침내 예수님의 수난과 돌아가심, 그리고 부활을 체험한 후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창조 이전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요한 1,1), 하느님과 같은 분이셨지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아지신 분(필리 2,6-7 참조)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자렛 청년 예수님을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깨닫고 고백하게 된 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체험한 다음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처럼 비유인 것이 아니라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과 같은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2023년 4월 16일(가해)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서울주보 4면, 최현순 데레사(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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