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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 인쇄

한자 辛酉迫害

   1801년(신유년)에 일어난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 1800년(정조 24년) 6월(음) 천주교에 대한 비교적 온화한 정책을 써왔던 정조가 승하하자, 모든 정세는 천주교남인에게 더욱 불리하게 되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順祖)가 겨우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고, 대왕대비(大王大妃)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는 섭정이 되어 모든 정사를 마음대로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왕대비는 원래가 노론벽파(老論僻派)에 속해 있었으므로, 집권하게 되자 천주교도들과 남인 시파(時派)를 일망타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국상(國喪)으로 즉시 박해를 시작할 수는 없었다.

   국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즉 그해 12월 17일(음)에 중인(中人) 최필공(崔必恭)이 다시 구속되고[이하 날짜는 음력] 그의 사촌 동생인 필제(必悌)가 잡혔다. 이어 정초에는 배교자 김여삼(金汝三)의 밀고로 서울의 회장 최창현(崔昌顯)을 위시하여 수많은 교인들이 잡혀 포청은 갇힌 사람들로 가득 찼었다. 이어 정월 10일(음)에는 공식 박해령을 내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에 의거, 전국의 천주교인을 빠짐없이 고발케 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역적으로 다스려, 뿌리째 뽑도록 하라는 엄명을 전국에 내리었다.

   엄명을 내린 지 9일 만인 10(음) 명도회장(明道會長) 정약종(丁若鍾)의 책고리짝이 발각되는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나 박해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양근(楊根)에서 박해를 피해 서울로 이사왔던 정약종은 신변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가지고 있던 천주교 서적과 성물(聖物), 그리고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편지 등을 담은 책고리짝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다 발각된 것이었다. 이에 천주교를 엄단하라는 상소문이 연달아 올라와, 마침내 2월 9일(음) 이가환(李家煥), 홍낙민(洪樂敏), 정약용(丁若鏞), 이승훈(李承薰)을 잡아다가 국문(鞫問)하기 시작하였고, 이어 권철신(權哲身), 정약종(丁若鏞)도 잡혀 의금부에 갇히었다. 남인의 중요한 지도자인 동시에 천주교의 지도급 인물들인 이들의 국문은 2월 10일(음) 시작하여 26일(음)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그들 중 정약종, 홍락민, 최창현, 홍교만(洪敎萬), 최필공, 이승훈 등 6명은 참수되고, 이가환, 권철신은 옥사하였으며, 정약용, 정약전은 배교하여 경상도와 전라도로 각각 유배되었다.

   박해는 지방으로 확대되어, 충청도 ‘내포(內浦)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李存昌)이 2월 9일(음) 공주(公州)옥에 갇히었다. 서올로 압송되어 2월 26일(음) 정약종 등과 함께 사형이 인도되었으나 이틀뒤 공주로 다시 이송되어서 참수로 집행되었다. 여주(驪州)와 양근천주교인들은 전년도에 이미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고, 그들의 결안(結案)이 확정된 후 각기 본고향으로 보내 사형에 처하여 일반 대중을 경고케 하였다. 이리하여 3월 13일(음) 여주 성문 밖에서 5명이 순교하였는데, 그들은 원경도(元景道), 임희영(李喜永), 최창주(崔昌周), 이중배(李中培), 정종호(鄭宗浩) 등이다. 양근에서도 같은 무렵에 10여명이 처형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뛰어난 순교자유한숙(愈汗淑)과 윤유오(尹有五)였다. 4월 2일(음)에는 또다시 6명이 사형에 처해졌는데, 정약종의 아들 철상(哲祥)과 최필공의 사촌인 필제(必悌)와 중인 정인혁(鄭仁赫), 그리고 여교우 윤운혜(尹雲惠), 정복혜(鄭福惠)와 이합규(李-逵) 등이었다.

   2월 말(음) 남인의 주요인물들이 모두 참수 또는 옥사, 유배됨으로써 끝난 것으로 보였던 박해는 3월 12일(음)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가열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 입국한 이래, 주로 강완숙(姜完淑)의 집에 거처하면서 전교에 힘써왔는데, 포졸들이 그의 거처를 탐지하고 덮쳤으나, 미리 이를 알아차린 주 신부는 다른 곳으로 피하여 체포를 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도피로 집주인 강완숙 일가와 많은 교우들이 잡혀 들어가자, 주 신부는 자기로 인하여 많은 교우들이 고통을 받게 됨을 알고 자수키로 결심하게 되었다.

   주 신부에 대한 국문으로 이희영(李喜英), 김이백(金履白), 김건순(金健淳), 강이천(姜彛天) 등 9명이 잡히었으며, 주 신부를 한 때 궁안으로 피신시킨 사실과 세례를 받은 일이 드러나, 은언군(恩彦君) 이인(李-)의 처 송씨(宋氏)와 그의 자부(子婦) 신씨(申氏)에게는 사약(賜藥)이 내려졌고, 그 여파로 강화(江華)에 유배 중이던 은언군 자신에게도 사약이 내려졌다.

   주 신부는 4월 19일(음) 군문효수(軍門梟首)되고, 그 이튿날에는 김건순, 이희영 등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처형되었다. 주 신부 6년간 헌신적으로 도왔던 강완숙도 2월 24일(음) 아들 홍필주(洪弼周)와 함께 잡혀, 궁녀 강경복(姜景福), 전 궁녀 문영인(文營仁), 최인철(崔仁喆), 김현우(金顯禹) 등 8명이 5월 24일(음)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되었다. 함께 사형언도를 받은 고광성(高光晟), 이국승(李國昇), 윤점혜(尹占惠), 정순매(鄭順每) 등 4명은 각기 고향으로 이송되어 처형당하였다. 7월에 들어서서는 강완숙의 아들 홍필주김종교(金宗敎)가 순교하였다.

   전주(全州)에서는 3월(음) 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는데 유항검(柳恒儉) · 유관검(柳觀儉) 형제를 비롯하여 일가족이 많이 체포되었다. 유관검이 고문에 못이겨 많은 교우들의 이름을 대니, 불과 몇 일만에 200여명이 옥에 갇히었는데,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이들에 대한 문초가 계속되는 동안, 소위 ‘양박청래’(洋舶請來) 계획이 탄로되어 이와 연관된 이우집(李宇集), 윤지헌(尹持憲), 황심(黃沁), 김유산(金有山) 등이 잡히게 되고, 이 연줄로 옥천희(玉千禧) 등이 잡히게 되었다. ‘양박청래’에 관련된 이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곧 사형을 언도받아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9월 17일(음) 능지처참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신유박해는 황사영(黃嗣永)의 체포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황사영정약용의 고발로 이미 2월11일에 체포령이 내렸으나, 7개월이 넘도록 그의 행방을 찾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황사영이 북경 왕래자의 하나라는 유관검의 고발로 말미암아, 9월 25일(음)에 잡히자, 황심의 자백으로 황사영도 9월 29일(음) 은신처인 충청도 제천(堤川) 배론[舟論]에서 잡히게 되었다. 함께 피신 중이던 김한빈(金漢彬)도 같이 잡혔다.

   황사영은 2월 10일(음) 박해가 일어나자 이곳으로 와 숨어살면서, 박해로 폐허가 된 조선 교회의 실정과 조선 교회의 재건과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양박(洋舶)을 청하는 내용의 <백서>(帛書)를 작성한 곳도 이곳에서였다. 황사영은 곧 서울로 압송되어 황심, 김한빈, 그리고 곧 이어 잡혀 들어온 옥천희현계흠(玄啓欽) 등과 함께 문초를 받았다. 그 중 김한빈황심은 10월 24일(음) 판결을 받고, 그 이튿날 참수되었다. 황사영만은 <백서> 작업과정에서 정약용, 정약전 등과의 공모 여부를 가리기 위해 정약용정약전 등이 다시 잡혀 왔으나, 황사영의 단독적인 것이라는 주장과 공모에 대한 증거가 없어, l1월 5일(음) 황사영에게 대역부도죄가 선고되어, 그날로 능지처참의 사형이 집행되었고, 옥천희현계흠도 함께 참수되었다.

   황사영과 그와 관련된 자들을 신문하고 있는 동안 동지사(冬至使)가 출발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그런데 이번 박해에 저명인사들이 많이 관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청국인 주문모를 처형한 사건을 변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므로 조정에서는 조윤대(曺允大)를 동지사 겸 진주사(陳奏使)로 임명하는 동시에 가지고 갈 <토사주문>(討邪奏文)의 내용과 진주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토사주문>은 대제학(大提學) 이만수(李晩秀)가 작성하였고, 주문내용의 증명으로 <백서>의 사본도 갖고 가기로 하되, 그 중에서 불리한 내용은 이를 삭제하여, 그 내용을 대폭적으로 축소시킨 소위 <가백서>(暇帛書)를 가지고 갔다.

   이렇게 해서 황사영 사건이 일단락되자 조정에서는 박해의 전말과 옥사(獄事)를 변호하는 반교문(頒敎文)을 준비하면서, 아직도 처결되지 않은 사학죄인은 세전(歲前)에 그 집행을 끝내도록 지시하였다. 드디어 12월 22일 토사교문(討邪敎文) 즉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반포됨으로서 공식적으로 신유박해는 끝나게 되었다. 즉 이미 내려진 사형선고는 이를 속히 집행할 것과, 미결 사학죄인에 대한 신문도 세전에 끝낼 것이고, 더 이상의 수사는 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이에 따라 서울에서는 이경도(李景陶), 변득중(邊得中), 권상문(權相問) 등 15명이 12월 26일(음) 순교하였고, 전주에서는 유항검의 처 등 일가친척들이 12월 28일(음)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마지막 공식적인 사형집행이었다.

   이렇게 해서 가혹하고 잔인했던 신유박해는 끝났는데, 박해희생된 자들의 수는 처형된 자가 약 100명, 그리고 유배된 자가 약 400명으로 도합 500명선에 달하였다. <토사교문>의 반포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은 일단 멈추었으나, 천주교를 국가의 원수로 단정함으로써 앞으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가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셈이 되어, 천주교 전파에 커다란 장애물로 등장하였다. 어쨌든 신유박해로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거의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교인들도 유배를 당했거나 생명유지를 위해 산간벽지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어 거의 빈사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천주교회는 그 후에도 전국적인 규모는 아닐지라도 크고 작은 박해를 끊임없이 받으면서, 신앙을 굳게 지켜나갔고, 선교사를 다시 영입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참고문헌] 샤를르 달레 原著, 安應烈 · 崔奭祐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上, 1979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1982.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