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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종◆ 인쇄

한자 丁若鍾

   정약종(1760∼1801). 순교자. 명도회(明道會) 초기 회장.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본관은 나주(羅州). 진주목사(晋州牧使) 정재원(丁載遠)의 아들 약현(若鉉), 약전(若銓), 약종, 약용(若鏞)의 4형제 중 셋째. 성인 정하상(丁夏祥), 성녀 정정혜(丁情惠)의 부친. 일찍이 상호 이익(星湖 李瀷)에게 사사(師事)하였다. 그는 천성이 곧고 모든 일에 정성을 쏟아, 천주교의 참된 이치를 깨닫고는 입교하여 더욱 천주교리를 연구함으로써 교리지식이 당대에서 가장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1791년 신해(辛亥)박해 때 그의 형제와 친한 친구들이 모두 배교 또는 냉담했어도, 그만은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한 후로는 명도회장으로 임명되어 많은 사람들을 감화 · 입교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다하였다. 더욱이 그는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여러 한문본 교리책에서 중요한 것만을 뽑아 평민도 이를 쉽게 알 수 있도록 우리말 ≪주교요지≫라는 상 · 하 두 권의 교리서를 지어 전교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책은 우리말로 된 최초의 교리서로, 주문모 신부도 이 책을 중국의 교리서인 ≪성세추요≫(盛世芻蕘)보다도 낫다고 칭찬하여 이를 널리 권장하였다. 그는 또한 교리서를 종합 정리하여 ≪성교전서≫(聖敎全書)라는 책을 쓰던 중 박해를 당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정약종은 원래 광주분원(廣州分院)에서 살고 있었으나 1799년 기미년(己未年)에 서울로 이사하여 문영인(文榮仁)의 집을 빌어 살고 있었는데, 1801년 초부터 박해가 일어나 포졸들의 추적이 심해지자, 신변의 위험을 느껴 성상(聖像)과 교리서적,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편지들을 고리짝에 넣어 임대인(任代仁)으로 하여금 옮기게 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밀도살한 쇠고기를 운반하는 것으로 오인 받아 포도청에 끌려가 진상이 탄로됨으로써 박해가 가열되었고, 자신도 2월 11일(음)에 잡히는 몸이 되었다. 그는 고리짝의 내용물이 모두 자기 것임을 시인하면서도 주문모 신부에 관한 일은 함구하고, 끝까지 천주교진리를 설명,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함은 오히려 부당하다고까지 항변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대역죄인으로 다스려져 1801년 2월 26일(음)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참고문헌] 黃嗣永帛書 / 邪學懲義 / 샤를르 달레 原著, 崔奭祐 · 安應烈 譯註, 韓國天主敎會史, 上, 분도출판사, 1979.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