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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철신◆ 인쇄

한자 權哲身

   권철신(1736~1801). 남인(南人) 학자로 초기 천주교 신자의 한 사람. 세례명암브로시오. 호는 녹암(鹿菴). 학문이 높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또 제자들이 많았다. 당시 조선에는 북경으로부터 한역서학서(韓譯西學書)가 많이 들어와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권철신은 1777년 자기 고향 양근(楊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講學)을 주도하고, 이벽(李檗), 제자인 정약전(丁若銓) 등과 같이 서학(西學)의 종교서적을 놓고 천주(天主)의 존재, 인생의 기본문제 등에 관해 연구회를 가졌다. 연구 결과 그들은 천주교 진리를 희미하게나마 깨닫고 천주교 계명을 아는 대로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벽을 제외하면 그것이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와 이 벽과 같이 천주교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이 벽은 학덕이 높은 학자를 포섭하여 천주교의 기반을 굳힐 생각으로 1784년 9월(음) 먼저 양근의 권씨를 찾아가 입교를 권고하였다. 셋째인 권일신(權日身)은 즉시 입교하였고 맏이인 권철신은 처음에는 좀 주저했으나 결국 입교하였다. 그 후 권일신은 열렬한 전도자가 되었으나 권철신은 직접 전도하지는 않았고 또 천주교 일에도 결코 관여하지 않았다. 그는 늘 집에서 학문과 종교생활에 전념하였다.

   천주교 반대파들은 통문(通文)으로, 때로는 혹은 상소로 그를 천주교 두목으로 몰았으나 정조(正祖)의 비호로 화를 면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하고 이어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권철신도 이가환(李家煥), 이승훈, 정약용(丁若鏞) 등 저명한 남인 학자들과 같이 잡혀 국문(鞠問)을 받았다. 그는 국문에서 천주교 신앙을 거부했고 마침내는 매를 맞아 2월 22일(음) 66세로 옥사하였다. 달레(Dallet)는 그를 순교자로 보고 있으나 그것은 황사영(黃嗣永)의 백서(帛書)를 근거로 한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황사영 자신의 말과 같이 2월 15일(음) 이전 사건에 관한 기록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