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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전례의 역사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0-30 조회수3,894 추천수0

전례의 역사 (1)

 

 

우리에게 있어서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과거의 자신이 그 어느 것에 이름 붙였던 의미들을 간직하고 그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살아간다는 것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과거를 정직하게 돌아보며 살아갈 수 있다면 현재는 과거보다 더 의미로울 것이고 의미로운 현재는 보다 보람찬 미래를 약속해주는 징표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은 더 빛이 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과거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나침반을 하나 가지고 오늘을 살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례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풍요로운 전승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전례적인 유산은 매우 귀중한 것으로 이러한 유산을 가지고 있지 못한 개신교가 가장 부러워하고 있는 면이기도 하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많은 전례서들은 이 전승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대부분의 전례와 성사의 틀이 이미 1600여년전의 초기 교회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례의 역사에 대한 공부를 하여야만 올바로 전례를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간략하게 전례의 역사를 공부해보기로 하자.

 

 

(1) 사도시대의 전례 (1-2세기) - 전례의 성립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셨고 곧 바로 성령의 강림으로 성령과 교회의 시대가 시작된다. 예수의 파스카사건을 목격했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부탁대로 온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친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첫 번째 예수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설립되며 신약성서가 쓰여지고 하느님께 찬미의 제사가 봉헌되게 된다. 첫 번째 신약성서가 쓰여진 60년경부터 마지막으로 요한계 문헌들이 쓰여진 2세기 초중반까지를 사도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시대의 전례를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창조성과 자발성의 전례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수의 삶을 목격했던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시작하였고 특히 예수의 파스카 사건을 기념하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처음에는 유대인들의 경신례의 틀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그러나 그리 오래지 않아서 유대인들과는 완전히 결별하고 그리스도교 고유의 전례를 형성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제일 먼저 첫 번째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예수의 명령대로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였다. 세례는 유대인의 전통 예식의 본류와는 다른 독창적인 형태로 발전된 첫 번째 그리스도교 예식이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 대다수가 유대인들이었으므로 이들은 유대교 관습대로 매 토요일이면 유대인의 시나고가(회당)에서 안식일 예절에 참여하여 말씀을 경청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날인 주님의 날(주일 Domenica)에는 빵을 쪼개는 예수의 최후의 만찬 예식을 행했음이 분명하다. 이것이 오늘날 미사의 효시였다. 세월이 흘러 유대인의 시나고가로부터 분리해 나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말씀의 잔치와 성찬의 잔치를 합하여 주님의 날에 경건하게 거행하였던 것이다. 토요일날과 주일날 나뉘어서 거행되던 예절이 그리스도교 전승 안에서 하나로 합쳐져 주일에 거행되게 된 것이다. 또한 여러 형태의 안수들과 기도들이 생겨났는데 그 중에서 병자에 기름을 바르는 예절을 우리는 야고보서(5,14)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사도시대의 전례는 유대인들의 예전적인 관습에서 처음에 출발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그리스도교의 고유의 요소들이 강조됨으로써 유대교적 전승에서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또한 아직 사회적인 공인을 받지 못한 종교였으므로 박해를 받았다. 이러한 박해는 교회가 일사불란하게 조직과 전례를 통일시킬 수 없는 상황을 교회에 만들어 주었으며 따라서 각 지역별로 다양한 형태의 전례를 집전하였고 주례자는 자신이 보고 경험한대로 기도문을 즉흥적으로 만들어 전례모임을 주도하였다. 따라서 이 시대의 전례정신은 한 마디로 창조성, 자발성, 자주성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역동성의 전례정신이었다고 하겠다.

 

 

(2) 순교자 시대의 전례 (3세기까지)

 

이 시대는 처절한 순교의 시기였다. 그리스도교는 처음에는 유대교로부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거대 제국인 로마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아야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교는 유대인 공동체(디아스포라)를 중심으로 로마제국 전역으로 확산되어갔으며 광범위한 지역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공동체 생활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안식일 다음날인 주일은 확실한 그리스도교의 축제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주일에 봉헌되는 원시 미사는 그 형태가 거의 확정이 되었고 특히 anaphora라고 불리는 성찬 기도문은 구조적으로 그 형태가 완성된다. 우리가 지금 가장 많이 쓰고 있는 감사기도 제2양식은 바로 이 시대에 완성된 히뽈리또의 기도문을 기초로 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교 입교의 성사(세례) 또한 거의 완전한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아침, 저녁기도를 비롯하여 많은 그리스도교 기도문들이 이 때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기도문들은 처음에는 유대인의 기도(Shema, Schemnoneh Eshreh, Beracoth등)를 모델로 하지만 얼마안가서 그리스도교적으로 꾸며진 기도문들이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현재 성직자 수도자들이 매일 바치는 일과기도문인 시간전례(성무일도)이다.

 

이 시기에는 전례의 예식의 통일이 꽤 진척되기도 하지만 전 교회의 전례가 통일된 것은 아니었다. 로마가 다스리던 지역은 매우 광활하였고 이 넓은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화 되어가기 시작했지만 교통수단과 통신수단의 미비로 인해서 전례의 전제국적인 통일은 불가능하였고 특히 교회가 아직 공인 받지 못한 박해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다만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전례의 통일이 시도되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동방, 서방의 이름으로 불리는 여러 전례 그룹의 기원이 된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통일된 예식이 없었으므로 지역별로 독특한 민속이나 토속 관습이 전례와 어우러져 있었으며 많은 기도문이나 성사 등은 그 틀과 내용에 있어서 즉각적으로 거행되기도 하였다.

 

교회 건축과 성당을 장식하기 위한 교회 예술이 성립하여 발전되기 시작한 때도 이 시기였다. 박해 상황이었으므로 아직 드러내놓고 성당을 꾸밀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개인의 가정에서 전례가 집전되었고 신자 수가 불어나고 교회가 외적으로 발전하자 가정집처럼 생겼으나 전례집전 전용의 집이라 할 수 있는 가정교회(Doura Europos)라고 불리는 경당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가정교회를 정성껏 꾸미기 위해 모자이크로 그려진 성화를 비롯하여 헬레니즘에서 영향받은 첫 번째 예술작품(성상, 성화)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로마 제국 전례 안에서 상용언어가 변천되기 시작한 때였다. 헬레니즘을 중심문화로 삼았으므로 3세기까지의 로마제국에서는 희랍어가 널리 쓰였었다. 이런 연유로 신약성서가 대중 희랍어(Koine)로 쓰여지게 된다. 그러나 로마의 영향력이 강대해지면서 로마인의 언어인 라틴어가 로마제국의 주류언어로 4세기경부터 자리잡게 되었고 이 때부터 서서히 교회의 전례언어도 라틴어로 통일되는데 특히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는 완전히 라틴어로 통일되게되며 헬레니즘의 본토인 희랍과 고대 문명의 발상지들이 함께 포함되었던 동방 로마제국의 영토 안에서는 희랍어가 계속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그 밖의 다른 언어(콥트어, 아르메니아어 등)들도 계속 사용되었다.

 

이 순교자 시대는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삶의 차원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극심한 박해가 주기적으로 들이닥쳤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정체하지 않고 느리지만 꾸준히 자신을 발전시켜나간다는 것이다. 약간의 장애만 생겨도 곧 포기하거나 쉽게 던져버리는 것에 익숙한 우리들이라면 과연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움직여도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아도 움직이는 저 봄 나무와도 같은 역동성을 교회는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 시대는 전례적인 차원에서도 소중한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이 시대의 전례는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집전되었다. 그럼에도 초대교회는 한결같은 신앙을 고백하였고 분열의 위험에서 꿋꿋하게 자신을 지켜내었던 것이다. 우리는 통일된 한 가지의 전례를 집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얼마나 한결같은가? 여기서 문제는 전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례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음이 확인된다. 전례를 쇄신하고 전례를 바꾸며 전례를 문화에 맞추려는 토착화에 관한 논의도 중요하지만 전례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의 신앙을 향한 의지는 더욱 중요한 것이다. 초대 교회는 더욱이 박해 시대가 아니었던가?

 

아무튼 313년, 드디어 저 처절한 교회의 박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끝을 맺게 된다. 이 순교자의 교회가 자유를 얻기까지 치러야 했던 희생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치열한 박해를 이겨내고 지하에서 살아남았던 초대교회는 교회의 전형(모범)을 보여준다. 그것은 “초대교회는 삶과 신앙과 전례가 일치하는 참된 전례정신이 구현된 시대의 교회”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그 처절한 박해의 한가운데 있던 교회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목표로 삼아야할 그리스도의 정신이 구현된 교회라는 것이다. 이렇게 초대교회의 역사는 현실에 안주해 있으면 안된다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완희 신부 / 인천가톨릭대학교 홈페이지에서]

 

 

전례의 역사 (2)

 

 

(1) 중세의 전례

 

313년 콘스탄티노 황제의 밀라노 칙령을 통하여 교회가 자유를 얻음으로서 교회의 모든 분야는 바야흐로 획기적이랄 수 있는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전례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우선 대성당(Basilica)이 생겨남으로서 외적인 표징들이 무수히 전례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특히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중심 이념으로 발전하면서 수많은 성당과 기념물이 건축되기 시작하였고 특히 그리스, 로마의 신전들이 성전으로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발전은 옛날의 좁은 가정교회에서의 전례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데 우선 궁중이나 귀족의 문화가 전례 안에 침투하게 되며 이는 특히 전례집전을 위한 부수적인 도구, 악기, 의복등, 제구 제의의 발전을 의미한다. 세례성사가 공식화 되면서 영세당이 생겨나게 되고 또 박해 중에 순교한 수많은 이들의 무덤위에 성당이 생겨나기도 한다.

 

교회가 공적으로 제도화될 수 있는 자유를 얻고 또 지도적인 권위를 인정받음으로써 내적 외적인 체제가 정비되었다. 이 시기에 전례주년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부활시기부터 기념되다가(3-4세기) 이어서 사순(4세기), 성탄(4-5), 대림(5세기) 등도 교회 전례 주년 안에 들어오게 된다.

 

로마제국안에서 그리스도교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마침내 391년에는 로마의 국교가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395년에 로마제국은 동과 서로 분열되게 되었고 이러한 정치적인 분열로 인하여 교회 또한 동서로마제국의 영역으로 분리되게 된다. 분열된 이후 로마제국은 국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어 서로마제국은 게르만 민족에 의해 476년에 멸망을 당하게 된다. 이후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가 서유럽을 통합하는 정신적인 지주로서 서유럽의 중심이 된다. 이 시기에 형성된 전례를 로마전례라고 하는데 이 로마 전례는 다른 모든 지역의 전례 보다 넓은 지역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 전례의 근원인 것이다.이러한 로마 전례는 레오 교황(Leo Magno)과 그레고리오 교황(Gregorio Magno)을 통해서 이뤄지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구축을 통하여 급속도로 통일되어 보급되었고 이것이 서방 가톨릭교회 전체로 퍼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특히 로마의 전례는 당시 교황이 행했던 이른바 순회미사(Missa stationis)를 통해서 더욱 널리 전파되는데 이 순회미사를 미사의 모범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수도원의 중흥으로 인해 성무일도도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고 고해성사의 뿌리가 되는 참회예식도 여러 발전 단계를 거쳐 완성되게 된다. 중세 초기에는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해야하며 일생에 한 번 밖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형태로 거행되던 참회성사 예절은 중세를 거치면서 수도원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처럼 사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반복가능한 고해성사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2) 중세기 전례의 쇠퇴

 

사도시대와 순교자 시대의 전례는 역동성의 전례였다. 그러나 중세에 이르러 전례가 쇠퇴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중세에 있어서 서방 전례가 쇠퇴하기 시작했던 동기는 라틴어에 기인한다. 로마의 융성은 제국의 분열과 게르만 민족의 남하로 파경을 맞게되자 고트, 반달, 게르만 등의 야만 민족(barbarian)들은 서방제국을 유린하며 자신들의 고유 국가 제도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서방 로마교회는 라틴어를 교회의 유일한 공용어로 인정함으로써 결국 야만족을 교화시킨 후에도 그들을 완전히 전례 안에 몰입시킬 수가 없었다. 결국 라틴어로 집전되는 전례는 사제와 소수의 교육받은 지식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예절이 됨으로써 일반 대중은 전례로부터 소외당하게 되고 결국 갖가지 종류의 민중신심, 대중신심이 등장하고 중세 내내 이와 같은 대중신심이 교회 안에서 전례보다 더 활성화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오던 아주 본질적인 의미를 지닌 전례들이 게르만의 민족적 요소에 의해 대체됨으로써 교회의 아름다운 전례전승이 손상을 입기도 하였다. 특히 로마의 암흑기(6-9세기)에 로마가 자주 침입을 당함으로써 많은 책들이 소실되고 프랑코 왕국으로 유출되었던 예식서들이 재유입될 때 갈리아적인 요소들이 로마 전례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이는 전반적으로 전례안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전례를 쇄신함으로써 초대교회의 감동적인 전례로 돌아가려는 시도들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특히 중세 중기 이후에 여러 수도원들에서 이러한 시도를 하였는데 분도회 수도원들과 시토회 수도원, 성 프란치스코회 등이 이러한 작업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와같은 노력 끝에 고백성사, 총미사경본, 예식서들이 정비 보급되었고 신자 공동체와 전례를 연결시키려는 많은 노력들이 시도되었다.

 

 

(3) 트렌토 공의회 이후의 전례

 

인쇄술의 발전, 아메리카의 정복, 그라나다의 함락 등으로 대별되던 15세기 이후 르네상스에 이은 또 하나의 서구문명사의 사건은 단연 종교개혁이었다. 14세기까지 전례는 J. Huizinga의 표현대로라면 중세의 가을의 전례였다. 여러 개혁시도들이 있긴 했지만 당대의 전례는 라틴어화 된 전례, 대중과는 유리된 전례, 성직자와 귀족의 전례, 예술을 위한 전례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때문에 여러 열매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중세의 전례는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처럼 헐벗어가는 전례였던 것이다. 16세기에 이르러 종교개혁과 헨리8세의 성공회 분리 등은 이런 가을의 전례에 다시 한 번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종교분열을 우려한 교회는 트렌토에서 공의회를 여는데 이 공의회의 목표는 자명한 것이었다. 교회를 분열하려는 세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이단자들을 단죄하기 위한 공의회였던 것이다. 따라서 전례 개혁의 목표도 “더 가톨릭적이어야 하고, 더 단일화 되어야 함”이라는 노선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통하여 전 세계 교회의 전례가 통일되는 결정적인 때를 맞게된 것이다. 이전까지의 전례는 지역별로는 매우 다양하고 풍요하게 거행되고 있었지만, 마르틴 루터를 비롯하여 여러 종교 개혁가들이 전례를 자기 마음대로 수정하거나 왜곡하고 무시하는 경향에 대해서 전체교회가 일치되어 대처해야 했으므로 결국 트렌토 공의회는 새로운 미사경본과 예식서의 간행을 선언하였고 이에 따라서 1570년에 미사경본이 1614년에 로마예식서가 출간되기에 이른다. 상상할 수 있듯이 이 예식서는 교회의 일치를 보증하는 주 도구로서 전례를 강력하게 통합시키기 위해서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붉은 색의 예절지시문(rubrica)을 만들게 된다. 이러한 개정 예절서들은 당시의 인쇄술과 항해술의 발달에 힘입어 전세계로 퍼져나가게 되며 바야흐로 교회는 처음으로 온전한 의미의 통일된 전례를 드리는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지역교회가 전례 개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무엇인가 인간인 한에는 추구해야한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크 시대를 만나게 된다. 전례를 건드릴 수 없었던 시대였으므로 전례는 그대로 두고 장엄한 미사곡, 종교적 모텟(Motet), 수난곡 등의 성음악이 크게 발전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즐겨 듣는 대부분의 종교음악과 미사곡들이 대부분 이 때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교회 건축에 있어서 성예술이 차지하는 바가 더욱 커지게 되고, 개신교의 성상부정에 반대하는 측면에서 갖가지 성상들이 화려하게 치장되었으며 성당들도 화려하게 꾸며지게 된다. 이러한 성상들을 들고 마을을 관통하는 행렬이나 여러 지방 놀이와 연결된 신심행사, 성인공경 등이 크게 유행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른바 바로코와 로코코라는 문화적으로는 매우 낭만적이지만 전례적으로는 조금은 씁쓸한 시대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완희 신부 / 인천가톨릭대학교 홈페이지에서]

 

 

전례의 역사 (3)

 

 

(1) 근대의 전례

 

트렌토 공의회가 끝나고 난 후에 프로테스탄트들의 개혁에 반대하려는 의도에서 교회는 더욱 보수적인 성향으로 무장되었다.  그러나 중세 후기부터 싹터 오기 시작한 인문주의와 예술사에서의 바로코적 낭만주의 등은 시대 전체를 서서히 개혁으로 몰고 나갔다. 17세기 말 유럽에서 일기 시작한 계몽주의는 인간의 권리에 주목함으로써 새로운 세계관과 가치관을 열어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새로운 사상은 철학적으로는 이성의 자유를, 정치사적으로는 시민의 권리를 부르짖었고 결국 중세의 종교적 덕목과 이념적 가치들을 붕괴시키기 시작하였다. 18세기에 일어난 과학의 발전과 산업혁명은 이러한 변혁의 속도를 더욱 빠르게 만들었다. 불란서 대혁명 등을 겪으면서 그리스도교적 문화는 위기에 처해지기 시작하였고 산업화, 기술의 발달, 노동자 계급의 부상을 통한 사회주의의 태동 등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를 예고하였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부응하여 전례의 개혁을 위한 시도들이 있었다. 성음악의 발전을 통하여 다성음악이 전례안으로 본격적으로 들어오게 되었지만 지나치게 음악의 역할이 강조됨으로써 전례의 불균형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 근대주의적 이성에 입각한 여러 학문의 발전이 이뤄지는데 이는 고전학이나 역사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교회의 학자들도 과거 교회 문헌에 대한 연구를 활발하게 전개해 나가는데 일단의 전례학자들이 19세 후반에 들어와서 초대교회의 전례의 모습들을 기록한 교부들의 문헌을 토대로 전례 개혁의 목소리를 드높이게 된다. 이태리 토스카나 지방의 피스토이아 교구 시노드(1786)는 이런 의미에서 획기적인 영감을 제공한다. 이 교구 시노드는 성찬기도문, 음악, 단 하나의 제대, 감실,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 연중독서의 재배열, 이태리어와 라틴어의 공용 등을 주창했었으나 당대에는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향의 시노드들이 이태리와 독일, 프랑스에서 계속 열리게 되었고 계몽주의에 의해 더욱 확산되어 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옛 전례와 교부들의 문헌에 대한 연구가 심도있게 진행되어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미네(J.P.Migne)의 교부학 총서를 비롯하여 초대 교회의 전례를 연구한 문헌들이 출판되었다. 또 불란서 솔렘 수도원의 게랑제(P.Gueranger) 아빠스(1805-1875)는 전례 쇄신에 대한 많은 책을 출간함으로써 전례 쇄신 운동의 불씨를 던졌다.

 

 

(2) 전례 운동

 

식민지 경영과 나폴레옹 전쟁 등으로 떠들썩했던 18-19세기에는 산업과, 신기술, 자연과학, 무신론, 유물론, 공산주의 등의 전혀 새로운 지성의 자각이 생겨난 시기였고 이것들에 의해 20세기가 획기적인 인간 정신의 재편성이 성취되리라는 것이 이미 예고되었다. 교회도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일련의 역사적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전례 역시 이러한 쇄신의 중앙에 놓이게 되었고 전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여기저기서 생겨나게 되는데 이러한 전례부흥운동을 우리는 20세기 전례 쇄신에 있어서 가장 역동적인 사건인 “전례운동(Liturgical movement)라고 부른다. 19세기에 이룩된 전례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전례의 활성화흘 외치며 초대교회의 전례정신으로의 복귀를 선포하며 전례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벨기에의 보뒤앵(L.Beauduin)이었다. 이러한 전례운동은 곧 유럽 전역의 호응을 받게되는데 이 때 전례개혁을 위한 여러 연구들과 강좌, 모임, 잡지간행 등이 이루어진다. 결국 이 때 연구되고 논의되는 전례쇄신의 요청들이 1962년에 이르러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안에서 그대로 받아들여지게 되며 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2000년 서방 교회 역사상 가장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전례개혁의 물꼬를 트는 공의회가 되는 것이다.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황 요한 23세는 1959년 1월 세계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 공의회가 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인 것이다. 사실 교회는 16세기에 열렸던 트렌토 공의회 이후에 현대 세계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전 교회 차원에서 논의한 경우가 없었다. 양차 세계 대전을 겪은 교회는 급변하는 인간 상황 속에서 새롭게 교회와 교회가 안고 있는 제반 문제에 대해 정리하고 정의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상황에서 쇄신(aggiornamento)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개최되었다. 그리고 “쇄신”이라는 주제는 전례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었으므로 공의회 교부들은 전례에 대하여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제일 먼저 전례헌장을 반포한다. 이 헌장은 모든 전례서의 개정방향을 가늠하게 하는 잣대가 되는데 그 중심은 전례의 쇄신에 맞춰져 있으며 이를 위해서 모국어 사용,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의 촉구, 사목자의 전례를 통한 사목적 배려, 각 지역적 특성에 맞는 전례의 조절과 토착화의 개연성 등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 전례헌장의 정신에 입각해서  미사경본은 거의 놀랄만큼 새로운 모습으로 개정되었고 또한 다른 모든 전례 예식서들이 새롭게 개정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미사경본은 1970년과 1975년에 개정과 수정을 거쳤고, 세례예식서(1972), 어린이 세례예식서(1969), 견진예식서(1971), 혼인예식서(1969), 병자성사 예식서(1972), 고해성사 예식서(1973), 장례예식서(1969), 성무일도서(1970) 등이 개정되었으며 현재도 예식서의 검토작업이 계속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4) 전례의 역사에 대한 공부를 마치며

 

우리 가톨릭 교회는 다른 프로테스탄트 교회와는 다른 장구한 역사적 유산을 가지고 있다. 이 유산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진 전승이다. 우리 교회의 역사전승은 주님의 승천이후 성령의 강림과 함께 세워진 첫 번째 교회로부터 단절됨 없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역사는 결국 500년 정도이고 나머지 역사는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은 루터 이래 “오직 성서(Sola Scriptura)"라는 정식을 강조하여 가톨릭 교회가 가진 풍요로운 성전(聖傳; Sacra Traditio)을 배척하고 있다. 이 성전의 대표적인 것이 전례라 할 수 있다. 이 역사 안에서 우리는 7성사를 비롯하여 여러 전례들을 가꾸어 왔고 보존하여 왔다. 지금 우리가 전례 중에 사용하는 기도문 한 마디가 2000년이라는 긴 역사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옛 성인이 기도했던 그 기도문으로 우리는 지금 기도하고 있으며 성인들이 부르던 그 노래로 함께 주님을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주변 환경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바뀌어 가고 있다. 흐르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변화를 의미한다. 교회도 이 세상 안에 자리하고 있는 한 급변하는 이 세상을 복음화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쇄신해야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진리이다. 그리고 절대 진리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전례를 거행할 때도 방법이나 환경 등은 적절한 변화를 추구할 수 있겠으나 본질적인 부분,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공적인 장으로서의 중심적인 부분은 변화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불변성이 가끔 변화에 익숙한 이 세대에 지루함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이러한 지루함을 없애기 위해 여러 가지 개정 작업들이 토착화라는 이름으로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적인 부분으로의 전례가 그릇되게 훼손될 위험이 “토착화”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전례 토착화는 매우 신중하게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중심적인 것을 잃게 될 때 우리는 교회의 보화인 전승을 훼손하는 것이고 교회의 일치가 훼손되는 것이다. 전례는 전 교회를 하나로 모으는 “깃발”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완희 신부 / 인천가톨릭대학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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