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대림성탄] 소비사회에서 크리스마스 구출하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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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5-01-07 | 조회수2,106 | 추천수0 | |
파일첨부 소비사회에서_크리스마스_구출하기.hwp [391] | ||||
소비사회에서 크리스마스 구출하기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가을빛이 깊어진 어느 날이다. 며칠 전부터 허리가 저리더니, 급기야 허리를 삐끗해서 한의원에 침을 맞으러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마늘밭을 만들고자 고추밭을 정리하려고 들어갔는데, 고추대를 뽑다가 허리를 다치고, 밭에서 그야말로 기어서 나왔다. 뒤늦게 밭에 나왔던 아내가 발견하고 기겁을 하여 내게 달려왔다. 현기증이 일어나고 입술이 타는 듯해서, 먼저 물을 얻어먹고야 부축 받으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방에 누워서 생각하니, 지난 몇 주간은 정말 정신없이 바쁘게 지나갔다. 예전에 일하던 가톨릭 노동사목 전국협의회에서는 창립 20주년이라고 새로이 ‘한국 노동헌장’을 만드는 일을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 일로 서울과 무주를 오가며 몇 밤을 꼴딱 새우기도 했다. 마흔 줄에 들어서 시작한 예술심리치료 공부 때문에 주말마다 전라도 광주에 가서 수업을 듣고, 임상실습과 임상감독을 위해 시간을 내어야 했다. 게다가 수확 철이다 보니, 무주 산골짝에서 농사짓는 처지에 한가할 틈이 없었다.
고추 말리고, 들깨 걷어내고, 토란 캐고, 김장배추와 무를 돌봐야 했다. 텃밭 수준을 조금 넘는 작은 농사라지만 남들이 하는 것은 다 해야 하는 것이다. 이래저래 미루어 두었던 마늘밭을 만들고, 양파를 심으면 올해 농사는 끝인데, 끝물에 몸이 상한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이제 몸에게도 정신에게도 휴식이 필요한 때라고.
애초부터 이 모든 일이 이렇다 할 큰돈을 벌자고 받아들이고 애써 뛰어다닌 것은 아니었다. 내 삶에 비옥한 밑거름을 제공해 준 곳이 가톨릭 노동사목 전국협의회였고, 거기서 활동했던 세 해는 참으로 기쁘고 후회 없는 시간이었다. 그 신세를 갚을 수 있다면 언제든지 기꺼이 갚아줄 요량이다. 그리고 지난 5년 동안 연고도 없는 산골에 올라와 살면서 10년 만에 딸아이를 얻고 농사도 배우고 있는데, 내 몸을 직접 부려서 뭔가 먹을 만한 것을 흙에서 얻고, 내가 거처할 집을 고치는 일은 ‘일상’을 거룩하게 만드는 바탕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다. 노동사목에서 ‘노동’을 발견하고, 산골에서 그 노동을 행하여 먹고산다는 것은 사람에게 자존감(自尊感)을 얻게 해준다. 그리고 산골에서 시작한 공부를 세상과 구체적으로 나눌 수 있는 길을 찾다가, ‘예술치료’라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상처 입은 세상과 인간을 치유하고자 했던 분이 예수님이고, 그래서 그분이 설파하신 말씀이 ‘복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장 최근에 쓴 글은 어느 잡지에서 의뢰한 서평이었다. 『프란치스꼬 저는』(분도출판사)이라는 책이었는데, 카를로 카레토 수사가 쓴 글을 장익 주교가 번역하였다. 그 가운데 ‘표징 세우기’에 대한 글이 마음에 와서 닿았다.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와 닿고, 진리와 아울러 사랑을 새로이 일깨워주는 표징을 정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자선과 노동에 대한 표징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그 시대에 즉시 자선의 표징을 세웠어요. 이에 더하여 우리의 수도생활을 위해 노동의 표징도 즉시 세우고 싶었지만 상황이 허락하질 않았어요. 그 당시 노동은 일종의 사치였으니까요. 여러분이 오늘날 은행에서 일자리를 갖듯이 그런 유급 노동 말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탁발의 거지 행각을 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그 길을 기꺼이 받아들였지요. 이 표징을 세움으로써 우리는 교회에 그리고 거지들에게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를 말한 거예요. “용기를 냅시다. 우리 여기 있어요. 여러분과 연대하면서.”
하지만 오늘은 그 표징이 적절하지 않아요. 양식 있는 형제라면 그 누구도 구걸하러 나설 필요를 느끼지 않을 거예요. 들녘에는 일손이 딸리는데.
노동으로 얻을 수 있는 빵을 자선으로 베풀어 달라고 한다면 말이 안 되고 도리어 빈축을 사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이와 노동을 사랑하는 이들이 오늘 세울 만한 좋은 표징은 역시 노동이에요. 그것도 더럽고 보수가 적은 노동.
신부님네 중에는 육체노동에 대해 아직도 딱 질색인 분들이 적잖이 있으니 정말 한심하네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고귀하고 성스러운 직무에 노동은 아예 어울리지 않는다는 식으로 교육을 받은 분들이니, 어쩌겠어요. 이건 과거의 마지막 남은 찌꺼기 중 하나예요. 그리스 사람들도 육체노동을 멸시했고 부르주아 계층도 피로와 남루한 옷을 좋아한 적이 없지요. (…) 어처구니없는 건 성직자들 간에 그리스도께서 노동자 출신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걸핏하면 “사제가 노동하는 건 좋지 않다.”고 주장하는 부조리지요. 이건 심각한 노릇입니다. 마치 “예수님은 목수라서 안 어울린다!”는 소리나 다름없으니까요.
이 말은 프란치스꼬 제가 아무런 악의도 없이 하는 말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에 관한 감동적인 영화가 있다. <형제인 태양, 자매인 달>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게 기억되는 장면 가운데 하나는,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이 들녘에서 농부들의 추수를 돕고, 그들과 빵을 나누어 먹으며 축복하고, 형제들과 함께 둘러서서 노래를 부르던 장면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가난한 이들과 함께, 몸소 가난을 살며 기꺼이 노동함으로써 복음을 직접 증언하는 것이다.
따뜻한 돌멩이
늦가을 비에 낙엽이 젖어 지상에 내리고 있다.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은 마지막 단풍이 있을까 하여 한의원에 가야 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우리 식구는 자동차를 몰고 면에 나왔다. 출고된 지 8년이나 된 화물차지만, 우리 세 식구가 오붓이 드라이브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한의원에 들러서 엉덩이에 침을 맞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할인매장 앞을 지나려는데 다섯 살 결이가 말했다. “아빠, 우리 뭐든 하나 사야 되잖아?” 맹랑한 딸내미의 말에 웃고 넘겼지만, 반성 ‘많이’ 되었다. 아이가 집 밖에 나오면 뭐든 사야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결국 이 아빠가 밖에 나가면 뭐든 사가지고 왔다는 증거인 셈이다. 담배 한 갑을 사려 해도, 산 아래로 내려와야 하는 우리는 ‘나온 김에’ 뭐든 사는 버릇이 들었던 것이다.
시골에 살아도 도시에서 살던 버릇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이 자신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벌이도 예전 같지 않은데, 꼭 필요한 물건도 아닌데, 특히 어쩌다 광주에 가면 ‘나온 김에’ 대형 매장에 들러서 ‘값이 쌀 것 같아서’ 종이 박스에 한 짐 싸들고 나오는 뒤통수가 정말 가렵고 볼썽사납다. 아이 생일이면 생일이라고, 아마도 이번 크리스마스엔 성탄절이니까, 뭐든 선물을 사야 할 것처럼 느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마음을 전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보니, 아이들이 오히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는 발걸음이 되어 돌아온다.
우리 산마을에는 젊은 귀농자 가족들이 많아서 네댓 살부터 일고여덟 살까지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꽤 많은 편이다. 그중에서 사내아이들은 우리 집에 놀러올 때, 길가에서 쑥부쟁이나 나리꽃 등 들꽃들을 한 줌 꺾어 와서 아내에게 선물로 주곤 한다. 그리고 그 꽃을 화병에 꽂을 때까지 지켜보고는 우르르 놀러 다녔다. 나름대로 아내의 환심을 사려는 것 같기도 한데, 아이들도 예쁜 것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다.
아랫동네 정현이는 홈스쿨링을 하는데, 나무를 베어 젓가락을 깎거나 헝겊으로 인형을 만들고 수를 놓아 선물로 들고 오곤 한다. 이 아이들은 정말 ‘가난을 아름다운 옷처럼 입은’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데 ‘돈’을 개입시키지 않는 사람들은 참으로 복되다. 현대사회에서는 돈도 ‘에너지’라고 하는데, 이왕이면 돈이 아닌 에너지를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 전에 임상실습을 하면서, 내담자에게 돌멩이를 건네준 적이 있었다. 돌멩이를 줍고, 물에 깨끗이 씻어서, 금방 난로에 말려두었던 것이라서 돌멩이는 아직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 돌멩이를 받아들고, 내담자는 “따뜻하고 부드럽네요.” 하였다. 나는 그 온기를 선물하였고, 내담자는 그 돌멩이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연꽃을 그려 넣었다. 돌멩이의 울퉁불퉁한 표면에 새기듯 그려진 꽃은 그 사람의 ‘영혼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주어진 어려움에도, 생존을 가능하게 만들고 희망의 근거를 마련해 주는 돌이다. 그 상징에 온기를 더해주는 것이 치료자의 몫이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공장에서 무수하게 찍어내는 복사판 상품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서 창조된 고유한 그 무엇을 나누어야 하는 게 아닐까? 호흡처럼 정성이 배어있는, 그래서 자기 생명의 일부를 나누어주는 행위가 선물(膳物)이 아닐까? 내 몸을 거쳐 나온 착한 기운이 담겨있는 물건을 생각해 본다.
소비사회의 상품 문화 윤리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무엇인가 사서 소비하지 않고서는 삶이 지속될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가 전형적인 소비 자본주의 사회를 살기 때문이고, 알게 모르게 ‘소비’하는 데 중독되어 있고, 소비함으로써만 존재감을 느끼는 까닭이다. 우리는 상품을 소비하고, 그 소비를 위한 돈을 벌고자 스스로도 상품이 된다.
존 프란시스 카바나 신부는 『소비사회에서 그리스도 따르기』라는 책에서, 상품화된 삶의 방식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명백한 가치들은 ‘시장성’과 ‘소비’인데, 이 가치들은 우리 자신의 자기 이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뿐더러 우리의 태도, 인식, 애정 표현을 결정짓는다고 하였다.
아메리카식 동화 이야기는, 두 가지 주제로 시작된다. 곧, 더 많이 가질수록 더 행복해지는 것이고,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생산하는 사람은 더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 사랑을 배워야 할 가정에서 오히려 경쟁하는 것을 배우고 이기고 증명하는 것을 배운다. 교육에서도 가치는 오로지 생산성, 양적인 등급, 경쟁력에 따라 결정된다. 종교에서도 신자 수와 성소자 수의 증가에 따라 평가된다. 직업에서도 한탕주의가 판을 치고 소모되면 은퇴시켜 버린다. 이처럼 모든 분야에서 시장성이 왕으로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팔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나를 살 것인가?” 학위, 기술, 재능, 그리고 역할 등이 우리의 생산과 인격체가 지니고 있는 예정된 퇴화에 대항할 수 있는 보증물로 어릴 적부터 인식되어 왔다. 생산적이 되지 못하면 우리는 쓸모없거나 가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소비할 수 있으려면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경쟁력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상품 문화 윤리’라고 말할 수 있다. 곧 우리는 소비의 능력에 따라서 시장성(경쟁력)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예전에 어느 선배는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먼저 고급 승용차부터 사들였다. 그 이유는 그래야 아이들이 대단한(능력 있는, 그래서 잘나가는) 선생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카바나 신부는 이를 빗대어 “당신은 당신이 먹는 것이 됩니다.”, “당신의 차가 당신에 대하여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하고 말한다는 것이다. 고급스런 상품을 소비하는 사람은 곧 고급스런 사람이라는 원리가 소비사회의 윤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우정, 친밀함, 사랑, 자부심, 행복, 그리고 즐거움이 ‘더 많은’ 또는 ‘새롭게 포장된’ 상품의 소비로 대체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소비윤리를 부추기는 것은 기업이며, 소비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것은 ‘광고’이다. 그리고 이 광고는 우리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한없이 심어줌으로써 소비를 부추긴다. 당신의 머리는 너무 길다, 너무 짧다. 당신의 피부는 너무 희다, 너무 검다. 당신의 냄새는 역겹다. 너무 뚱뚱하다, 너무 말랐다. 당신의 차는 너무 시끄럽다. 당신의 음식은 너무 맛이 없다. 이것을 구입하지 않으면 당신은 친구가 없어질 것이다, ‘왕따’가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어르고 협박한다.
존 카바나 신부는 “우리의 아이들이 크리스마스 때에 최신 유행의 선물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 아이들이 자신은 초라하고 불쌍하다고 느끼게 되는지, 곧 어떻게 세뇌되어 가는지를 관찰해야 한다.”라고 일러준다. 물론 텔레비전을 많이 보는 아이들은 텔레비전 광고를 통하여, 인터넷 중독에 빠진 아이들은 인터넷 광고를 통하여, 거리에 즐비한 광고판과 아이들의 입을 통하여 ‘무엇인가 사라.’고 강요받고 설득당한다. 그래서 최신 컬러링 핸드폰을 구입하지 못한 아이들이 자살하는 사건이 실제상황으로 연출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이미 ‘소비가 존재를 규정한다.’ 이를 두고 카바나 신부는 이렇게 단언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소유물에 의해 소유되며, 우리가 만들어내는 생산물에 의해 생산된다.”
크리스마스는 백화점에서 온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백화점에서부터 온다.’는 말이 생겨났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교의 전례력 가운데 매우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리는 날이지만, 백화점이 세례자 요한보다 더 먼저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고, 동방박사보다 더 화려한 선물을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께 봉헌한다. 우리 사회에서 크리스마스는 이미 종교만의 것은 아니다. 소비문화 이벤트로서의 크리스마스, 여기서 성당과 교회당의 장엄한 찬송은 이런 들뜬 분위기를 북돋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백화점에서 상품을 구입하여, 그 백화점 마크가 찍혀있는 종이가방을 들고 자정미사에 참석한다.
고정희가 남긴 ‘고백’이라는 시가 있다.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감 전 되 었 다
우리는 교회라는 전깃줄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 다시 감전(感電)되어야 한다. 크리스마스는 하느님께서 몸소 사람이 되신 것을 기억하자는 것이다. 복음사가들이 전하는 예수님 탄생에 대한 공통된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는데, 누추한 공간에서 남루한 형상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사람도 아닌 가축들의 처소인 마구간에서, 여물통 위에 무력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분의 탄생을 둘러싸고 호의를 품고 다가온 사람들은 먼 나라에서 찾아온 현자들(동방박사)이었으며, 양떼를 돌보는 목자들이었고, 무방비 상태의 무수한 아기들이 예수님을 대신하여 순교하였다. 그들은 이방인이며 여성이며 노동자이며 아이들이었고, 모두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가난하였다.
이들에게 하느님이 건네주시고자 하셨던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루가 1,30)라고 전했다. 또한 주님의 천사는 목자들에게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루가 2,10)고 말했다. 이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가난한 이들은 사실상 ‘두려움’에 길들여져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언제든지 자신의 생존권을 빼앗길 수 있으며, 자신의 자유를 속박할 만한 세력들에게 억눌려 살아왔기 때문이다. 가랑잎이 굴러도 가슴이 놀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걱정할 것 없다.’고 용기를 주실 분이 오셨다는 것이다. 그분 예수님은 메시아셨고,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시골 출신의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고,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하느님의 뜻대로 당신의 길을 걸어가셨다.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는 예수님의 선포는 소비사회의 윤리를 절대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소비사회의 논리에 따르면, 소비할 만한 능력이 없는 자가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땅히 두려움에 떨면서 경쟁력 있는 인간이 되려고 분투해야 한다. 그러나 복음은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우상과 헛것은 다 지나가버리고 말 것이며, 영원한 것은 ‘사랑의 능력’뿐이라고 그분은 설파하신다.
오늘 집에서 콩을 삶아서 메주를 만들어 처마에 걸었다. 마당에 나가보면 온통 고소하기도 하고 쿰쿰하기도 한 메주 냄새가 가득하다. 세상에 아무리 음식이 많아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된장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대형 할인매장에 하고많은 된장이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상품으로 나와있지만, 집에서 만든 된장과 비교할 수는 없다. 재료가 되는 콩에도 차이가 있겠지만, 그 안에 담긴 정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무릇 재료와 포장보다 복음의 핵심에 주목하는 사람들이다.
[사목, 2004년 12월호, 한상봉(농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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