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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축일] 예수 성심 대축일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10 조회수2,375 추천수0

[이 달의 전례] 예수 성심 대축일

 

 

전례적 개관

 

성령 강림 후 세 번째 금요일인 이 날, 전형적인 신심 축일인 예수 성심 대축일을 지낸다. 이 축일은 인간에게 향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심장으로 표상하는 특별한 관점 아래 인간이신 하느님을 공경하는 축일이다. 이러한 공경의 발단은 요한복음의 기록에서 특별히 증거로 끌어내는 교부들에 의해 발견되고(예를 들면 7,37:19,34), 여기에 중세 신학자들의 언급이 있었다.

 

12세기의 캔터베리의 안셀모,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Bernhard) 그리고 13세기의 대 알베르토, 보나벤뚜라 등이 그 중심인물이었는데, 특히 13,14세기의 신비가들이 예수 성심 공경에 강한 자극을 불러 일으켰다. 대표적 인물로는 막데부르그의 메히틸드(Mechtild), 헬프타의 겔트루드(Geltrud), 하인리히 소이제( Heinrich Seuse) 등이다. 그후 “근대 신심운동(Devotio moderna)”과 16세기의 예수회는 예수 성심 공경을 중히 여겨 받아들이게 되었고, 17세기에 와서 프랑스 구속주회의 베륄 신부(P. Berulle, +1629)와 요한 오이데스(Eudes +1680)에 의해서 그 전성기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요한 오이데스는 자기 주교의 허락을 받아 예수 성심 공경 축일을 교회에서 첫 번째로 거행하였다.(1672년 10월 22일).

 

1673년과 1675년 사이에 수녀 마리아 알라콕(Maria Alacoque)은 여러 차례 환시를 보았는데, 그 환시에서 그리스도는 성녀에게 성체 축일 후 팔부 내 금요일에 예수 성심 축일을 도입하고 예수 성심 금요일을 위해 성시간을 만들라는 임무를 주셨다는 내용이다.

 

로마교회는 거의 10년 동안이나 축일 제정을 거부하다가, 교황 끌레멘스 13세께서 비로소 1765년에 폴란드 주교들과 로마의 예수 성심 형제회에 이 축일을 지내도록 허락했다. 비오 9세 교황은 1896년 이 축일을 전 세계 교회에로 확장시켰으며, 레오 13세 교황은 1899년 이 축일의 격을 한층 들어 높임으로써 다가오는 새로운 백년 대(1900)를 위하여 거룩한 예수 성심께 세계를 봉헌하도록 명했다. 특히 얀세니즘과 계몽시대의 신학자들은 예수 성심 공경의 문제로 격하게 논쟁했다. 오해에 근거한 대부분의 사고방식은 마음 혹은 심장이라는 원 단어나 그 근본개념 뜻을 20세기 거장 신학자인 라너(Karl Rahner)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사실 근거가 희박해진다. : “왜냐하면 예수 마음에 관해 언급하는 교회의 문헌이나 가르침 그리고 그 실행은 마음 혹은 심장은 영육을 지닌 한 인간의 중심으로서 인간 전체를 나타내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예수의 이 마음을 고려하면 예수성심 공경의 대상은 바로 주님인 것이다.”

 

사실 심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마음은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을 지칭하는 것보다는 전체로서의 한 인간을 나타낸다. 새 미사경본의 축일미사는 많은 부분에 있어 비오 9세 교황이 1928년 종합한 본문을 이어 받았으며, 여기에는 과거보다 훨씬 더 속죄 사상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위하는 마음을 지니신 분이시다.

 

 

묵상

 

잊을 만하면 가끔씩 우리에게 들려오는 어린이 실종 사건이 있습니다. 종국에는 기어이 폭행과 살해로 이어지는 생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범죄입니다. 더구나 그것이 성추행과 연결된다면 정신은 더욱더 혼란스러워집니다. 언론과 방송은 다투듯이 전문가를 내세워 이러한 범죄에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가지 예방조치들을 요란하게 제시하곤 합니다만 일회성일 뿐입니다.

 

정작 참담하게 말 못하는 고통을 겪는 피해자는 바로 아이들의 부모입니다. 그들은 사랑스러운 자기 자녀를 비참하게 잃고는 갑자기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럴 때 이 부모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 아이도 여느 때와 같은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 올 거야.”하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자녀들의 귀가를 하염없이 기다릴 뿐입니다. 이런 부모의 애타는 마음과는 달리 결과는 비극적입니다. 아이들이 성추행을 당한 후 살해되었다는 비참한 소식입니다. 범죄행위가 자세히 보도되고 범인은 체포됩니다.

 

그후 오랜 시간에 걸친 재판이 진행되고, 그러는 가운데 아픈 상처는 다시금 찢겨져 나갑니다. 처음으로 부모는 자기 자녀를 살해한 범인을 만납니다. 부모의 눈길은 범인의 눈길을 찾으려 애를 쓰지만 그는 눈길을 아래로 내리깔고 얼굴을 가립니다. 재판정에서 최후선고가 내려지고 사건은 종결됩니다. 범인은 감방으로 사라지고 부모는 점점 말을 잃어갑니다. 그들은 자녀를 빼앗김과 동시에 철저하게 홀로 되고 맙니다.

 

1928년 성탄절 밤 한 남자가 사제관 문을 두드리고는 주방에서 일하는 봉사자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합니다. 주방 봉사자가 문 앞에 나와 자기를 찾아온 남자를 보고는 흠칫 놀랍니다. 왜냐하면 이 남자는 다름 아닌 12살 된 자기 딸을 성폭행하고 죽인 살인범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건이 있고 난 뒤 벌써 26년이 흘렀습니다. 오늘 그는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출감한 것입니다. 출감하자마자 그 첫 걸음이 바로 자기가 죽인 어린 소녀의 어머니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는 소녀의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합니다. 이 순간에 소녀의 어머니 안에서 무엇이 일어났겠습니까? 그녀는 범죄가 생기기 전에 벌써 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이 당신을 용서하셨다면 내가 어떻게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라는 놀라운 대답을 그에게 해줍니다. 그러고는 두 사람은 성탄 밤 미사를 보러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어머니와 살인범은 후에 다시 한번 더 만납니다. 1950년 바로 희생자인 마리아 고레띠가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성녀로 선포되는 시성식에서입니다. “하느님이 당신을 용서하셨다면 내가 어떻게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소녀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죽인 살인범을 오직 하느님이 벌써 용서하셨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용서합니다. 어머니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의 증인이 됩니다.

 

용서는 새로운 시작을 선사합니다. 마리아 고레띠의 살해범인 알레산드로 세레넬리도 고레띠 어머니의 용서로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레띠의 어머니 역시 오랜 세월 가슴을 짓누르던 압박에서 마침내 자유로운 해방감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면….”이라는 어머니의 대답은 용서의 열쇠가 되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스스로 가장 추한 범죄자를 용서하시고자 하십니다. 누구도 잃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허물이나 잘못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죄나 잘못을 그렇게 간단하게 없애버릴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죄나 잘못을 사랑으로 극복하기를 시도합니다. 미움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미움은 잘못을 고정시켜버립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중한 범죄자는 오직 용서에만 의존합니다. 그는 자신의 범죄로 인해 하느님과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버립니다.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어떠한 기회도 가지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의 범죄로 인해 묶여버린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뉘우치고 후회할 뿐입니다. 죄로 인한 묶임은 오직 용서를 통해서만이 비로소 풀려집니다. 이렇게 용서는 언제나 하느님과 사람으로부터 주어지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잘못이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미워하고 학대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십니다.

 

“하느님이 당신을 용서하셨다면 내가 어떻게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단순한 부인, 26년이란 긴 세월동안 하루, 아니 단 한 시간도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가지지 못하고 고통스런 시간에 시달렸던 이 여인이 바로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구체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랑의 그림은 바로 예수의 마음입니다. 예수 성심은 역사 안에서 큰 공경의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예수 성심 형제회와 예수 성심 금요일, 예수 성심 호칭기도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예수 성심 대축일 등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성심 공경에서 예수 성심을 위한 증거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예수 성심을 공경하는 것만으로는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증거하는 증거자를 만날 수 없습니다. 용서와 화해를 통해서만이 비로소 이 사랑의 증인이 됩니다.

 

우리 자신은 용서를 청하고 용서할 수 있는 준비를 어떻게 갖추고 있는지요? 우리는 작은 것을 용서하는 데에도 주저하거나 힘들어합니다. 오히려 용서의 반대인 미움과 무관심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미움은 새로운 시작을 막는 걸림돌입니다. 용서하는 마음은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분증명서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용서할 은혜를 청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할 수 있도록 당신의 힘을 선사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 성심 호칭기도에서 “저희 마음을 주님 마음과 같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월간 빛, 2004년 6월호, 최창덕 F. 하비에르 신부(성바울로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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