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와 생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왜 끊임없이 축일을 지내는지, 왜 항상 같은 축일을 반복해서 지내나요? * 일러두기 이번 달부터 게재되는 <전례와 생활>의 주제를 ‘미사’로 선정하였고, 아울러 전례에 관련된 내용도 함께 소개할 것입니다. 가톨릭 신앙인으로서 미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식상할 수 있는 주제라 생각할 수 있겠으나, 우리는 세상에서 미사를 완전히 이해 할 수 없기에 미사에 대해서는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언제나 모자랄 뿐입니다. 독자들이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찾던 중 전례학자이자 저술가인 Klemens Richter 교수의 소책자 《Was ich von der Messe wissen wollte, 내가 미사에 대해서 알고 싶었던 것들》과 《Was ich vom Kirchenjahr wissen wollte, 내가 전례력에 대해서 알고 싶었던 것들》이라는 책이 비교적 쉬운 질문과 알찬 내용, 짧은 대답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이 두 권의 소책자를 중심으로 본인이 편역을 하였습니다. 아무쪼록 가톨릭 신앙의 핵심이자 원천인 미사와 전례력에 대해 보다 많은 이해를 가지며 그로 인해 한 단계 깊은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해봅니다. - 편역자 주(註) 전례력 - 첫 번째 이야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왜 끊임없이 축일을 지내는지, 왜 항상 같은 축일을 반복해서 지내나요? 축제 안에서 시간은 한순간 멈추어 있습니다. 축제 안에서 세상의 의미근거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축제는 인간 현존재의 들어 올림을 의미합니다. 축제를 열기 위한 계기는 마침내 근본에 있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좋은 것이며, 좋은 것은 존재하는 데서 찾아야 합니다. 축제를 거행한다는(잔치를 벌인다는) 것은 “언제나 이미 모든 날 시행한 세상의 일을 특별한 계기에서 통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과 화해하였던 사람,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미래에 아직 무언가 희망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생일에 참으로 잔치를 베풀 수 있습니다. 생일에 자신의 과거와 현재는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축제 안에서 중요한 것들, 사람들이 마지막 가치라고 여기는 인생의 깊은 단층들이 드러납니다. 축제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선사하고 더 높은 단계로 자신의 존재가 분명하게 되기를 추구합니다. 여기서 가치들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힘을 발휘합니다. 왜냐하면 축제는 공동으로 거행하고, 공동체성을 강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공동체는 언제나 가치를 위한 모임, 잔치 안에서 최고조에 도달하는 모임입니다.”(J.A.융만) 축제의 다양성은 축제의 원형과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축제라는 두 가지 기본 형태에서 유래합니다. 축제의 원형은 중요하고 결정적인 사건이 그 대상을 만들어내는 곳에서 생겨나는데, 예를 들면 출생이나 결혼입니다. 그러나 계속하여 상존하는 가치도 때때로 들어 올려져 알게 되는데, 자연 질서의 가치, 문화와 공동생활의 가치 등입니다. 신년축제와 추수감사제, 국가 건국일 또는 수도원 설립일 같은 축제도 여기에 속합니다. 따라서 일상적인 행동을 멈추고 기쁨을 찾고자 하는 원의에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도 축제의 다른 표현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교 축제에도 적용됩니다. 기념축일을 제외한 교회의 모든 축일들은 구원행위의 역사적인 기념일들입니다. 축일들은 지나간 구원행위, 그 중에서도 그 첫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구원활동이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느끼는 곳에서 그 자리를 매김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념일들은 하느님 안에서 약속한 해방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축일을 함께 거행하는 것은 자유와 미래를 만들어 냅니다. 여기서 달력에 고정시킨 축일은 역사적으로 차이를 둔 시대 안에서 세상과 인간의 불완전성을 일깨웁니다. “축일이 정해져 있고 또 반복되는 것은 인간성의 불완전함에 대한 완전한 구원이 아직 이루어지지(완성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A. 호이슬링) 하느님은 역사 안에서 인간에게 말씀하십니다. 한번 이루어졌던 하느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기념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마지막이라는 관점에서 거행됨으로써 그에 따라 개별 세대들에게도 구원은 현재인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 존재의 그 모든 차원에서 적당한 장소와 때에 이 기념을 거행하도록 사명을 받았습니다. 때는 시간과 날들의 거행을 통하여 구원의 현재화 단계 안에서 구분됩니다. 한 해의 순환은 우리가 교회력(전례력)이라고 부르는 그 구원시기 안에서 축일과 시기로 이루어진 달력을 통하여 구분됩니다. 따라서 교회력 또는 전례력이란 한 해의 주기 진행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경축하는 기념입니다. 교회의 공식문헌은 다음과 같은 말로 전례력을 표현합니다. “전례주년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경축하는 일 년을 말하는 것이며, 강생으로부터 성령강림까지, 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까지 포함한다.”(전례력과 축일표에 관한 일반지침 17; 참조 전례헌장 102) 교회력이란 단어는 ‘시민력’이라는 개념과 대칭되는 단어는 아닙니다. 한 해 주기의 ‘세상의 시간’은 그리스도인도 인정하고 있어야 하고 꾸며야 하는 창조주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은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의 구원의지를 역사의 시간 안으로 끌어들여 드러나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시간 안으로 스며들어 자신을 세우심으로써 이제 모든 시간은 구원의 시간이 되고 하느님의 시간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구원의지는 모든 시대와 모든 인간을 포함하는 우주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임무는 그리스도 안에서 기초 놓아진 구원활동을 모든 시대의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고 가깝게 만드는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행위에 대해 감사하는 기념으로서의 그리스도교 축제는 구원의 선포와 구원의 현재화로서의 기능이 올바르게 되기 위해 항상 되풀이해서 거행되어져야 합니다. 전례력의 축제가 오직 이루어진 구원에 대한 회상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미 믿음을 가진 이나 세례를 통해 구원의 백성이 된 이는 전례적 축제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항상 자신의 구원에 힘써야 합니다. 이 두 관점 아래에서 교회력의 전례거행은 지나간 과거를 바라볼 뿐만 아니라 미래를 지향합니다. 교회력의 전례적 축제들은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그 길의 준비를 촉구함으로써 하나의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집니다. 전례가 거행되는 곳에는 새로운 계약의 대사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행하는 공동체와 결합되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이 공동체는 믿는 이들의 구원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현양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교회력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동참하는 사람은 해마다 그리스도교 구원소식의 총체를 체험하며, 전례력과의 반복되는 만남에서 우리의 구원을 찾아 나서시고 활동하시는 주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 이번 호부터 <전례와 생활>을 집필해 주실 최창덕 신부님은 1978년 사제품을 받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대학에서 전례학 석사와 전례학 박사, 대구가톨릭대학 신학대학과 미국 교포사목을 거쳐 현재 포항 장량성당 주임으로 사목하고 계신다. [월간 빛, 2007년 12월호, 최창덕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장량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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