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가톨릭 사제가 쓴 눈물의 사모곡
나물할머니의 외눈박이 사랑
이찬우 신부
처음에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편지를 쓰셨는데,
남에게 대필시키는 것이 쉽지 않아서 독학으로 글을 익혀 편지를 쓰셨다.
그래서 어머니의 편지 한 구절 한 구절은 너무 소중하고 고마웠다.
사제의 어머니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우리 찬우를 사제로
만들어 주신다면 그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소명이 분명하다
사제관 창밖으로 본 하늘이 모처럼 맑게 개어 있다.
조용히 마음을 모아 기도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 오늘은 하늘이 참 맑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처럼 맑기를 바랍니다. 이 성당에 나오는 신자들이 살아
계시는 당신의 말씀인 성경을 곁에 두고 읽고 쓰면서 마음에 깊이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성사 중에 가장 큰 성사인 성체성사를
생활화했으면 좋겠고, 그 성령의 힘을 통해 하느님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이끄는
힘을 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나는 본당 사목지침을 '성경 말씀의 생활화, 성체성사의 생활화,
복음 선포의 생활화' 로 정했다. 사제의 길로 들어선 지 올해로 34년
째. 나는 지금도 하느님 앞에 바르게 서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나를 따르는 보당 신자들 앞에 바른 모습으로 서 있는가, 항상 나 자
신을 돌아본다.
나는 사제 생활을 하면서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마태 4,4)는 말씀을 잊지 않고
있다. 그 말씀은 나의 매일의 영적 양식이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
을 얻기 위해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 (요한 6,53)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내 안에 머무르신다. 이렇게 영적으로 무장한
우리는 그래서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 않고, 오히려 복음을 선포
하지 않는 것이 불행한 일" (1코린 9,16)이 될 것이라는 사도 바오로
의 말도 잊지 않는다.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은 바로 내 안에 계신 하느님 앞에 떳떳한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 두렵겠는가. 나는 늘 그렇게 생각하지만 약
한 인간이기에 때론 두렵고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하느님께서는 어린 나를 교묘하게도 성소로 이끌어 주셨다.
나는 천주교 신앙의 뿌리인 외가와 어머니의 신앙심을 물려받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해
서 그랬는지 주변사람들은 내가 커서 크게 출세하기를 은근히 바라
고 있었다. 세속적인 출세란 무슨 뜻이겠는가. 고시에 패스해서 법
관이 된다거나 일류회사에 입사해서 고속 승진을 한다거나, 아니면
정계에 진출해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누산리 외가와는 달리 흥신리 친가에는 천주교 신자가 아무도 없
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 외에는 성당에 나가는 친척들이 없었다. 그
래서 성신고등학교가 어떤 학교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게다가
당시에는 학교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모두 명문 고등학교에 지원
하는 것이 정석이었고, 학교측에서도 명문고 합격을 목표로 학생들
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 내가 명문고 지원을 마다하고 듣도 보도 못한 성신고등학교
를 지원하자 주위에서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친척들이야 천주교 신
자니까 큰 반대는 없었지만 신학교 지원을 달갑지 않게 여기기는 마
찬가지였다. 난리가 난 것은 학교였다. 서울 일류 고등학교에 가서
명문대에 합격하여 시골 학교의 명예를 드높여야 할 내가 성신고에
가겠다니, 선생님들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뛴 것은 당연
한 일이었다.
"찬우야, 너 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네 실력이면 서울
명문고 합격은 따 논 당상인데, 더구나 앞날이 구만 리 같은 네가 왜
그런 학교에 간다는 거냐."
담임선생님의 고집은 완강했다.
"제 뜻입니다. 선생님, 받아 주십시오."
"난 네 뜻을 받아들일 수 없다. 교장선생님한테 가 보거라."
내가 신학교 입학원서를 들고 교장선생님을 찾아갔을 때도 반응
은 똑같았다.
"찬우야, 내 말 잘 들어. 네가 서울 명문고에 가서 붙기만 하면 고
등학교는 물론 대학을 마칠 때까지 등록금을 우리 학교가 부담하겠
다. 넌 학비 걱정하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면 돼. 알겠지?"
나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고교에서 대학 졸업까지 등록금
을 학교측에서 부담하겠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혜택이었다.
그만큼 학교에서도 나의 명문고 입학을 적극 지원하려고 했던 것이
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내린 결단은 그런 유혹에 흔들릴 수 없었다.
학교측에서는 집안형편이 어려워서 등록금과 학비가 무료인 성신고
등학교에 가려는 것으로 알고 그런 제안을 했지만, 그것은 선생님들
의 오해에 불과했다. 그래도 내 뜻이 바뀌지 않자 교장선생님은 나
에게 최후 통첩을 했다.
"그럼 어디 네 맘대로 해 봐라. 난 그 원서를 써 줄 수 없다."
결국 나는 초등학교 5,6학년 때 담임이자 견진 대부님인 김진성
선생님과 이 문제를 상의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직접 중학교 담임선
생님과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설득한 끝에 겨우 성신고등학교 입학
원서를 낼 수 있었다.
신학교에 가겠다는 결정은 누구의 권유가 아니라 내 스스로 내린
결단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김진성 선생님의 적극적인 권유가 있었
고, 나는 선생님의 권유를 마음속으로 확실히 받아들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무릎에서 기도를 배웠다. 내가 어머니
의 무릎에 누워 있을 때, 어머니는 늘 성호를 긋고 내 머리를 쓰다듬
으며 주님의 기도와 성모송을 외곤 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기도를
입속으로 따라 외우며 자장가처럼 듣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곤 했다.
나는 어머니가 늘 숙연하게 성호를 긋고 기도하는 모습이 참 좋았
다. 그래서 나도 어머니처럼 기도하리라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곤
했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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