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에 따른 전례] 12세기의 전례 생활 12세기의 로마 전례가들은 그레고리오 개혁에 따라 갈리아의 전례 요소를 제거하고, 새로운 전례서에 고전 로마 예식의 문화적 특성을 회복하려고 했다. 어떤 것은 더 잘 회복되었고, 또 어떤 것은 덜 성공했다. 전례 역사가 부르크하르트 노인호이저는 그레고리오 교황의 전례 개혁에 대하여 “역사적 실제 상황을 잘 인식하지 못한 채 그는 로마 전례의 복원 작업을 하면서, 독일 – 프랑스 – 로마 전례를 개혁하고 공고히 하는 한편 스페인의 비시고딕 전례를 없앴다.”(「문화사에 따른 전례의 역사」, 104쪽)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한편 12세기 들어 전례가 신자들의 영적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자 영성 생활에 새로운 움직임이 형성되었다. 순탄치 않은 그레고리오 개혁 그레고리오 개혁에 원인을 제공한 성직매매와 성직자의 독신제에 대하여, 보름스 협약(1122년)과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1139년)로 말미암은 변화가 있었다. 반면 고대 로마 전례를 중심으로 한 전례 통일화는 쉽지 않은 여정을 거쳤다. 예를 들어 우르바노 2세 교황(재위 1088-1099년)은 서방 교회의 전례 일치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주교를 중심으로 한 교구 일치를 선호하고 전례를 포함한 지역 관습을 승인했다. 곧 각 지역 주교는 지역 관구의 중심인 대교구가 정한 전례 규칙을 따라야 했다. 보름스의 주교였던 부르카르도(965-1025년)는 그의 훈령에서 “대교구가 결정한 미사 규정에 따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모든 관구 교회에서 미사 통상문을 노래하거나 관습에 따라 봉사자들이 봉사하는 것이다.”(Decretum, Ⅲ, 66쪽)라고 하면서 옛 스페인 규정을 언급했다. 그레고리오 개혁으로 의전 사제단은 예전보다 더 많은 성무일도에 참석해야 했다. 이런 과도한 전례 참석 의무는 수도회에도 부과되었으며 프레몽트레회와 아우구스티노회에도 영향을 주었다. 아르투로 엘베르티는 「서방의 성무일도」(La liturgia delle ore in Occidente)에서 당시 프레몽트레회의 성무일도 구성에 관해 알려 준다. “중요한 주일과 대축일에 바치는 전야 기도는 기간마다 다른 수의 화답송, 시편, 독서로 구성되었다. 11-2월에는 화답송 12개, 시편 6개, 독서 3개; 3-4월과 9-10월에는 화답송 10개, 시편 5개, 독서 3개; 5-8월에는 화답송 8개, 시편 4개, 독서 2개를 했다. 낮에는 아침 기도를, 삼시경, 육시경, 구시경을 드린 뒤에는 저녁 기도를 드렸다. 아직 ‘끝기도’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잠자기 전에 몇몇 시편을 낭송했다”(350-351쪽). 새로운 계급 등장과 대중 신심 발전 12세기 중반부터 새로운 일들이 일어났다. 다양한 기술을 가진 장인들과 상인들로 구성된 새로운 사회 계급의 재력과 지역 공동체에 의해 발전된 신심은 작은 성당들을 건설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십자군 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을 통해 전해진 다양한 신심이 성당 건설과 연결되었고, 특정 성인에 대한 신심이 널리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새 성당 건설에 앞장선 새로운 계급은 성당 주임신부로 자신들이 원하는 사제를 선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맞는 전례(세례식 제외)를 요청하기도 했다. 성당 옆의 묘지는 당시 죽은 이를 위한 위령미사와 기도에 분명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11세기 중반 뒤에 널리 퍼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성무일도’와 함께 신심 기도들이 신자들 사이에 전파되면서 기도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목적 관심 교회 생활에 관한 12세기 저술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은 사목적 관심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사실 개혁자들은 하느님께 드리는 크나큰 찬미의 전례가 교회 영성에 유용하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전례는 관습에 따라 부과된 것이어서 신자들에게 직접적인 관심을 두지 않은 것 같다. 이는 너무 긴 전례 시간을 봐도 알 수 있다. 콘스탄자의 베르놀도는 그레고리오의 사상에 매우 충실하면서도 전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당대 저명한 독일 신학자 레이게스베르그의 게로는 신자들을 위한 교훈적인 강론이 유용할 때는 나머지 전례 시간을 단축하라고 말할 정도였다. 중세 라틴문학 전문가인 에지오 프란체스키니는 ‘그 세기에 베르나르도 성인’이라는 글에서, 전례에 관한 당시 가장 중요한 두 인물이 약간 다른 방향성을 지녔음을 알려 준다. “베르나르도 성인의 모든 것은 실질적으로 전통을 기반으로 했다. 반면 아벨라르도는 전통의 화단에 머물지 않고 전례를 풍요롭게 했다. 그는 손에 삽을 금 들고 표면을 넓히려고 주위의 개간되지 않은 땅을 경작했다. 이러한 사상은 신학, 주석, 변증법, 전례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12세기 당시에도 전례에 참여하는 신자들을 배려해 전례 시간 축소와 강론의 유용성을 언급하는 성직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신자들의 능동적 전례 참여를 위한 사목적 관심은 여전히 부족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감각적 표지의 중요성 전례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신비에 직면한 신자들의 감수성을 일깨울 수 있는 요소들로 풍성해졌다. 그것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예전 갈리아 전례의 관심사였다. 독일의 전례학자 요제프 안드레아스 융만은 평신도 입장을 대변한 익명 저자의 글을 소개한다. “평신도가 미사에 관해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세 부분, 곧 의복, 동작, 말씀 선포로 이해할 수 있다”(Missarum sollemnia, 92쪽). 사실 전례복은 상징적 의미가 있기에 종종 그리스도의 수난과 관련이 있었다. 신자들이 교계 구조를 바로 구별할 수 있도록 그 형태를 정했으며 각 축일에 따라 색상을 달리했다. 12세기 말, 나중에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된 세니의 로타리오는 「미사의 신비에 관하여」에서 전례에 사용되는 거룩한 옷을 비롯하여 거룩한 기물들과 봉사들의 의미와 역할에 대한 설명과 규정을 제시했다. 그 뒤에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나 지금까지 중요한 전례 규정으로 전해진다. 12세기 말이 되자 미사에서 가장 중요한 성체 축성의 순간을 알리고, 그리스도 몸의 실재 현존을 보고 싶어 하는 신자들의 열망에 부응하고자 성체를 높이 드는 거양성체가 도입되었다. 전례학자 엔리코 카타네오는 당시의 이러한 노력을 “성찬례의 영적, 육적 열매를 강조하는 동시에 우리를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물질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지상의 것에서 천상의 것으로, 인간의 것에서 신의 것으로 올라가도록 초대하는 것”(「서방 그리스도교 예배의 역사」 [II culto cristiano in Occidente], 220쪽)이라고 평가했다. * 윤종식 티모테오 - 의정부교구 신부.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이며,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전례학 교수이다. 교황청립 성안셀모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였다. 저서로 「꼭 알아야 할 새 미사통상문 안내서」가 있다. [경향잡지, 2021년 12월호, 윤종식 티모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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