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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요한14:12~24)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19-05-21 조회수1,058 추천수1 반대(0) 신고

 

 

 예수를 사랑할 있을까

 

(요한14:12~24)

12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1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9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22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성자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성육신하셔서 수난과 고난을 통과하시며 결국에는 십자가까지 지심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 신도들도 똑같이 그러한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된다고 하신 것이었고 주님의 십자가 공생애가 지역적 범위적 제한 속에서 행해진 사역임과 대조하여 이제 주님이 하늘에 올라가셔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오셔서 성도 안에서 하실 일은 범세계적이며 범인류적으로 확장이 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더 큰 일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이라 했어요 뿐만 아니라 더 큰일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보내시던 구약 시대와는 달리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으로 말미암아 완성된 하늘의 것을 가지고 하는 일이기에 더 큰일인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늘의 풍요와 하늘의 복이 이 세상의 가시적인 힘들로 주어진 게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욥이나 다윗과 솔로몬 같은 사람들이 그 엄청난 풍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복을 받은 자들이 얼마나 엄청난 풍요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렇게 구약은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것으로 영적인 것을 상징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상징으로서의 풍요나 복이 사라지게 되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요셉도 그랬고 욥도 그랬습니다. 예수님도 구약을 살다가 가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들로 하늘의 풍요를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성육신 하여 오셔서 하늘의 복을 병고침과 기적과 먹거리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늘의 비밀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풍요와 하늘의 복이 완성이 되었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인들의 마음속에 한꺼번에 부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로는 이 세상의 물질이나 힘으로 하늘의 풍요를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뚫고 들어와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시적이며 경험적인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기뻐하며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요셉이 감옥에서 억울함을 토로했다면 신약의 사도들은 감옥에서 찬양을 불렀던 것이 그 예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더 큰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완성된 것을 누리는 차원에서의 일. 그렇게 범위적 장소적 큰일임과 동시에 한 번에 완성이 된 구원이 성도의 도구됨으로 인해 다른 성도들에게 부어지는 그 큰일 그것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큰일은 성도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성도의 내부에서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성도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큰일은 성도가 믿음으로 자기를 부인하게 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자의든 타의든 살게 되면서 그에 의해 죽었던 생명들이 살아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하느님 나라가 확장이 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성도의 내부에서 성도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그 안에 사시는 새 사람 예수가 밖으로 조금씩 살아나오게 되는 그런 모습으로도 하느님의 큰일은 성취가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오심으로 우리 가운데서 살아 역사하심으로 일어나게 되는 일입니다.

 

그 큰일은 예수님이 하늘로 떠나가심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하늘로 승귀하신 후에 성령(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에게 내려오심으로 일어나는 일임을 고지하기 위해 12절 말미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라는 어구가 이유와 원인을 나타내는 어구로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보다 더 큰일을 할 것인데 그 이유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성령이 내려오심으로 그 분이 그 더 큰일을 주관하여 시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그 더 큰 일 또한 예수께서 성령의 모습으로 행하시는 일이지 우리가 행하는 일은 아닌 것입니다.

 

12절과 1314절을 함께 읽어보면 그 것이 좀 더 분명하게 와 닿습니다.

(요한14:12-14) 12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12절의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다이보다 더 큰 것도 할 것이다에서 쓰인 하다라는 동사가 전부 헬라어 포이에오입니다. 그리고 13절과 14절의 내가 시행하리니에 쓰인 동사도 포이에오입니다. 그러니까 13절과 14절에서 예수님께서 시행하시겠다고 하시는 일과 12절에서 예수님이 하신일과 성도가 하게 될 일 그리고 더 큰 일은 같은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전부 예수가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의 일을 성도의 기도를 통하여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더 큰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더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기도와 함께 필연적으로 필요한 무언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 것이 바로 성령 하느님의 강림인 것입니다.

 

먼저 기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13절과 14절을 보면 주님께서 우리 성도가 하게 될 더 큰일과 연결을 시켜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들어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가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하게 될 더 큰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맞지요?

그 더 큰일을 위해 예수의 이름으로 구해야 하는 것이고 그 구하는 모든 것을 예수님이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들어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더 큰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닌 목숨까지도 내어 놓으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일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기도는 간단히 말해 살기 위해하는 기도가 아니라 죽기 위해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나를 죽이는 것 즉 자아라는 감옥에서 탈출을 하는 것이 더 큰일 인데 그 일에 필요한 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면 모두 다 들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기도의 목적은 나를 죽이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기도의 본질은 나를 죽이고 하느님의 뜻에 부응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단 한 가지 일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통치에 순복하는 자들에게서 이루어지는 다스림과 통치의 개념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구하시는 무엇이든지는 바로 우리가 부인되고 하느님의 통치에 순복하는 자로 지어지게 되는 것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당신의 이름을 주며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는 윤허를 받을 만큼 그 분과 친밀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어떤 돌아다니며 마술을 하는 이들이 바오로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려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때 귀신이 그들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바오로도 알고 예수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하고 그들을 올라타서 두들겨 패고 옷까지 홀랑 벗겨 버렸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어떤 것을 구한다는 것은 친밀한 관계성을 내재하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쉬운 말로 예수님의 인감도장을 마음대로 쓸 수 있을 만큼 그 분과 친밀한 관계성을 확립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지 않고 그 분의 이름을 마음대로 대면서 자신의 요구를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참 어려운 것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기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하는데 그 분이 인감도장을 빌려줄 만한 친밀한 관계성이 전제되지 않은 많은 이들이 무턱대고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내 놓으며 예수의 가짜 인감도장을 마구 찍어대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 기도는 하느님이 들어 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인감도장을 예수님의 아버지인 하느님께 갖다 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근사하게 예수의 이름을 불러댄다 할지라도 그 아버지가 그건 내 아들 인감도장이 아닌데하시면 거기서 끝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와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이들이 예수의 마음과 의중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게 말이 됩니까? 그 예수의 의중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께 순종하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을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 예수와 친밀한 이들의 기도의 범주도 하느님께 순종하는 자로의 성숙 의 범주 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보냄을 받은 자가 어떤 이름을 대는 것은 그 보내신 분의 요구에 나도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는 뜻이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뜻에 내가 적극적으로 동참하겠다는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기도는 내가 하는 것이니까요. 그 예수의 뜻에 열심히 동참하고자 하는 이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열심히 구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 나의 옛사람의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한다는 것은 첫째로 그 요구가 나의 요구가 아닌 예수님의 요구여야 하는 것이고 둘째로 나와 예수와의 친밀한 관계성이 전제 되어야 하는 것이고 세 번째로 나에게 예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열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응답으로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무엇을 해 주십시오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에서 출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의 이름으로 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가 확인되며 더 깊어지는 데에 쓰이는 것이지 하느님이 내게 굴복하여 내 손아귀에 놀아나는 방법은 결단코 아닌 것입니다. 그건 기도에 의도된 핵심이 아닙니다.

 

기도라는 말 자체가 하느님께 맡김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에 맡김으로서 하느님의 결정 사항에 따르겠다고 하는 것이 기도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어떤 행위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 분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신자의 모든 삶이 다 기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그 삶이 살아지지 않을 때 우리는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무엇을 이루어 달라는 요구이기 이전에 그와는 정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하는 나를 고쳐 주소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응답하시겠다고 하시고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14:13)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시행하시겠다고 하시면서 그 이유를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밝히십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도의 응답은 하느님의 영광과 결부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분을 맞추어 주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기도가 응답이 된다는 말입니다.

 

랄프 카이퍼(Ralph L. Keiper)라는 훌륭한 성경 해석 자가 있습니다. 그분은 눈이 아주 나빠서 남들이 100피트 거리에서 볼 수 있는 것을 10피트 거리에서도 보지 못하는 그런 시각 장애자였습니다. 거기다가 가까운 것도 잘 보이지 않아 이래저래 어려서부터 그 고통이 말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 십 년간을 하느님께 매달려 기도를 했는데 어느날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속에 이렇게 물으시더랍니다. ‘카이퍼야 너는 사람의 최고 된 덕목이 무어라고 생각하니?’ 카이퍼는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다시 마음속에 하느님의 물음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길 원하니?’ 카이퍼가 대답했습니다. ‘네 그럼요하느님이 물으셨습니다. ‘네가 만일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너는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과 네 시력을 완벽하게 되찾는 일 둘 중에 어떤 일을 선택하겠느냐?’ 그 때 카이퍼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카이퍼는 무릎을 꿇고 물론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제 시력이 어떠하다 할지라도 그 것과 하느님의 영광과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하고 대답을 하셨답니다.

그 때 다시 한 번 마음속에 하느님의 물음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나의 영광을 위해 너의 시력을 그렇게 놔두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니?’그 이후로 랄프 카이퍼는 한번도 자신의 시력에 대해 불평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분에게는 시력을 안 고쳐 주신 것이 응답이었습니다. 그게 하느님의 영광에 필요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 분은 또 다시 시력을 고쳐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떠셨나요? 

(요한17:4) 4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수난으로 하느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겟쎄마니 기도에서 여러 번 확인한 것처럼 예수님은 할 수만 있다면 그 잔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로 기도를 마치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은 그 독배를 아들이 마시고 죽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힘들겠지만 나를 위해 죽어라로 응답이 된 것입니다. 그게 기도입니다.

우리는 사탕을 달라고 조르고 하느님은 쓰디쓴 치약과 칫솔을 주시는 것이 올바른 기도의 응답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께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도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우리가 기도하여 간절히 구해야 하는 것은 성령의 온전한 사역 한마디로 성령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성령이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시어 우리를 계명을 지키는 자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로 더 큰일을 하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루가11:9~13)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필요한 것을 전혀 구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자녀가 아버지께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이 왜 나쁩니까? 그러나 오직 그것만이 기도의 핵심의도가 아니란 것을 명심하시라는 말입니다.

정리를 하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하게 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큰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더 큰일은 예수의 일이 그러하였듯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이 죽는 일입니다. 주님은 그 더 큰일을 언급하신 후에 갑자기 기도에 관해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고 하십니다. 거기에서 주겠다’‘포이에오내가 한일하다포이에오와 같은 단어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 즉 십자가를 지는 삶을 우리의 삶 속에서 행하시겠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도해서 십자가 지는 거고 기도해서 자기부인의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뒤에 기도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 이라는 어구를 붙여 놓으심으로 말미암아 기도의 삶과 더 큰일의 삶이 동일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뜻을 포기하는 것임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많이 다르지요? 기도는 우리의 뜻을 관철시켜 하느님을 굴복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주님은 기도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뜻을 접는 것으로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하는 더 큰일 또한 우리가 뭐 대단한 업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함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더 큰일이나기도나 둘 다 우리의 옛사람을 죽이고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최종 목표나 더 큰일의 내용은라는 우상을 사랑하던 자아가하느님을 사랑하는 자로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이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요한14:15)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이것이 또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더 큰일과 기도에 대해 말씀을 하시던 주님께서 갑자기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더 큰일과 기도와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것이 다 같은 목적지를 가진 것이지요. 여기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15절의 주님 사랑 계명지킴이라는 내용과 21절의 내용이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주의 깊게 보세요.

(요한14:21) 21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이렇게 양쪽에 같은 내용이 나오면 금방 생각나는 히브리 사람들의 문학기법이 샌드위치 기법입니다. 가운데에 있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양 쪽에 빵을 대고 설명을 한다든지 양쪽의 빵을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하기 위해 알기 쉬운 샌드위치 속을 하나 넣어서 상호 설명을 하는 그런 구조입니다. 요한이 그 15절과 21절을 샌드위치의 빵으로 놓고 그 사이에 샌드위치 속으로 어떤 내용이 들어가 있는지 볼까요?

(요한14:16-20) 1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18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19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보시다시피 샌드위치 속으로 성령 강림의 이야기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 다른 말로 더 큰일을 하는 것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응답 받는 것은 성령이 오시는 일로 말미암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더 큰일을 하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모든 것을 응답받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성령이 이미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계명을 지키고 있나요? 나 자신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까? 계명을 다른 한 단어로 바꾸면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정말 우리가 나 아닌 다른 존재 예수님이든 이웃이든 나보다 더 사랑하고 있습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지요?

 

주님은 분명 우리에게 더 큰일을 하게 될 것이고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모든 것을 응답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이거든요. 따라서 우리는 완벽하게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는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살고 있어야 맞습니다. 우리가 믿는 자들이 맞다면요. 그런데 자신이 없지요? 그 딜레마의 해결은 성경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요한14:23)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15절에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지킨다.’라고 하셨는데 지금 읽은 23절에서는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예수님의 말을 지키는 것은 같은 의미인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말을 지킨다는 것은 그 예수님의 말이 우리 안에 있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그런데 말은 곧 예수님입니다.

(요한1:14)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성령으로 우리 안에 와 계시지요?

(요한14:20) 20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지요? 지금 우리가 계명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을 지킨다는 것이고 예수님의 말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는 말인데 그 예수님의 말이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어요.

한군데만 더 보고 결론을 맺어보자고요. 15장으로 가면 아주 재미있는 결정타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요한15:7) 7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 더 큰일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의 응답이 결국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 하느님 나라 백성의 자기부인과 순종의 삶에 대한 모든 간구는 다 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는 어구의 조건으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이라는 어구가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20절을 보면 성도가 더 큰일을 할 수 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린 모든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으로 너희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라는 어구와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라는 어구는 정확하게 같은 말인 것이지요?

그런데계명이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내 말이 너희 안에내 계명이 너희 안에라는 어구도 정확하게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예수가 이미 와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말이 거하고 있다는 말이 되고 그 말은 다른 말로 우리 안에 예수님의 계명이 이미 들어와 있다는 말인 것이지요?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예레31:31~33) 31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

32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그들은 내가 저희 남편인데도 내 계약을 깨뜨렸다. 주님의 말씀이다. 33 그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말씀이신 계명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그 새 언약의 현실이 이미 우리 안에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 스스로 일을 한다고 합니다.

(히브4:12) 12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말은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의지를 발동하여 지켜낸다는 말이기에 앞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열심으로 우리를 계명을 지킨 자로 예수님을 사랑한 자로 만들어 내셨고 그렇게 완성하시고야 마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계명지킴이 우리 것이 된 것이고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승귀 이후 성령의 오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계명지킴 예수님 사랑이라는 양쪽의 빵 속에 성령의 오심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내용을 한 구절로 요약을 한 구절이 요한 일서에 나옵니다.

(요일3:24) 24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보시면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이 그 안에 머무는 자는 계명을 지키는 자 라 명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안에 예수를 모시고 있는 모든 자들은 계명을 지키는 자가 맞지요? 14장의 첫 구절이 어떻게 시작이 되었어요?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구절로부터 시작이 되어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만드실 처소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예수가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 안에 들어가게 만들어 우리를 하느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하느님 백성으로 완성시키시겠다는 그런 말씀이라는 것이 더 확실해 졌지요. 아울러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를 사랑하는 자가 맞습니까?

따라서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모든 이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인 것이고 그들 안에 예수가 거하는 것이며 그들은 곧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이고 예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확정된 결론을 향하여 이 세상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하느님의 뜻에 오롯이 순종하는 자들로 지어져 가야 하는 것이 성도이기에 성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는 자들이고 그 기도는 자기 부인과 십자가로 지향이 되는 것이며 그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령의 오심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예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는 이들이 바로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이미 완성이 되고 결정이 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큰 일입니다.

구약 시대 때에는 율법을 지키고 회개를 해야 구원에 이를 수 있었지만 신약 때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완성된 현실을 그대로 전가 받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제화 하여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것이기에 더 큰 일인 것입니다. 실패할 수 없고 중도에 포기 될 수 없는 일 그렇기에 더 큰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이미 계명을 지킨 자들이 되었고 이미 예수를 사랑하는 자가 되었고 이미 더 큰일을 이룬 자가 되었고 모든 기도의 응답을 다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진정 알게 되었다면 그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되었다면 그 사랑을 아는 만큼 우리에게서 나와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요일4:19) 19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아는 만큼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이 여러분을 극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여러분이 그 배우자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렇게 우리가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그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여러분이 정말 죽을 죄인이라는 것과 정말 부끄러운 존재임이 폭로가 되었을 때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세요? ‘이런 나인데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죽이셨다니 그 사랑이 얼마나 큰가?’그 때 여러분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지?’ 하고 고민하지 마세요.

 

우리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될 때 그 순간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할 때 내가 그 상대방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성경에 풍성하게 기록된 하느님의 그 큰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잘 배우세요. 그리고 인생 속에서 경험하세요. 그렇게 조금씩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하다보면 그 하느님이 사랑하라 주신 이웃까지도 내 사랑의 범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는 안 돼요.

(요일5:1) 1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요일4:21) 21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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