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일 연중 제4주간 수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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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3-01-31 | 조회수365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 11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14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주해 12장 4절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고통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시어 모든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길을 터놓으셨다, 그런 면에서 그분은 믿는 이들의 선두 주자요 모범이실 뿐 아니라 믿음의 완성자이시다. 따라서 믿는 이들이 시련을 인내로이 극복하려면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과 반대를 기억하고 용기를 얻어야 한다. 6절 잠언 3,11-12. 구약의 지혜문학에서는 흔히 이 잠언의 내용과 비슷한 고통의 신학을 전개한다. 이에 따르면 고통과 시련은 하느님이 배척하시는 표지가 아니라 그분의 특별한 사랑과 은총을 받는 표시다. 하느님은 때때로 시련을 주어 당신 백성을 교육하고 파국에서 보호 하신다. 7절 직역하면 “견책을 위해 참으십시오”. 견책은 훈육, 교육 등으로도 번역할 수 있으나 4-13절에서는 견책의 의미로 쓰인다. 고대의 아버지의 자녀 교육은 흔히 사랑으로 견책하는 것이었다. 아니, 예나 지금이나 부모는 자녀를 올바로 교육하기 위해 때때로 사랑의 매를 든다. 하느님도 당신 자녀인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시련과 고통을 주신다. 12절 12-13절은 이사 35.3과 잠언 4.26의 인용문, 저자는 두려움, 나약, 피로 등에 휩싸인 독자들이 시련의 의미와 가치를 잘 깨닫고 다시금 바르고 안전한 믿음의 길을 걸어가라고 권한다. 14절 14-29절은 앞의 믿음과 인내에 대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느님의 은총과 소명에 맞갖은 생활을 경고 형식으로 이야기한다. 이런 생활을 근본적으로 평화와 거룩함을 추구하는 생활, 달리 말하면 하느님과 친교하고 이웃과 친교하는 삶이다. 15절 신앙인은 사람들과 평화를 유지하는 외에도 신앙의 주인공인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어야 한다. 하느님은 거룩한 분이시므로 그분과의 친교는 거룩한 생활을 통해 실현된다. “주님을 뵙다” 또는 “하느님 앞에 나타나다” 등의 표현은 시편 11.7;16.11; 17.15에서는 성전에서 거행되는 예배나 제사에 참여하는 내용과 통한다. “쓴 뿌리”는 신명 29.17에서는 우상숭배들을 가리킨다. 이 구절에서는 공동체에 악영향을 끼치는 불건전하고 부도덕한 생활을 이렇게 표현한다.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주해 나자렛에서 배척당하시다 예수께서는 3년 가까이 공적으로 활약하셨을 것이다. 그 동안에 한번 나자렛 고향을 방문하셨다고 한다. 이 단원은 바로 그 방문 사실을 전하는 기사다. 마르코복음의 앞 문맥에 따라 고향 방문기를 정위시킨다면 이렇다.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맹활약을 하셨으나 인정을 받기보다 불신을 당하셨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당원들은 그분을 죽이기로 결정했고 친척들은 그분이 정신나갔다고 했으며 백성뿐 아니라 제자들조차 그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고향사람들이 그분을 배척하게된다. 1절 “그리고 거기서 떠나”는 앞문맥과 연결하려고 마르코가 만들어 넣은 것이다. 예수의 고향 나자렛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서쪽으로 30키로키터 지점에 자리잡은 동리로 인물다운 인물을 내지 못한 고장이다. 2절 2ㄱ절은 1,21-22와 비슷한데, 이 구절만 따로 보면 고향사람들이 긍정적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2ㄴ-3절에서는 다섯 가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부정적 반응을 보인다. 예수의 업적을 통틀어 예수사건의 출처가 무엇인지 캐묻는다. 하느님인가 인간인가? 아니면 사탄인가? 가르침의 출처를 따지는 질문이다. 공관복음 출전 가운데서는 주로 어록에서 예수를 현자로 부각시킨다. 원전에서는 “기적들” 대신 “능력들”이라 한다. 기적의 출처를 묻는 질문이다. 3절 예수님은 고향사람들 사이에 장인으로 통했다. 목수, 미장이, 석공, 대장장이 일을 두루 다 하신 기술자였을 것이다. 마태 13.55엣는 아버지 요셉을 “장인”이라 한다. 관례를 따른다면 “요셉의 아들”이라 해야 할 터인데 여기서는 “마리아의 아들”이라 한다. 이는 요셉이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형제자매는 친동기를 뜻하기도 하고 그냥 친척을 뜻하기도 한다. 이들 가운데 야고보는 예루살렘 모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62년경 대제관 아나노스의 명으로 유다교인들이 야고보를 돌맹이로 쳐죽였다. “걸려넘어졌다”는 예수께서 속담의 순수한 형태가 요한 4.44에 전해온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법이다.” 4절 속담을 인용한 것인데 속담의 순수한 형태가 요한 4.44에 전해온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법이다.” 5절 예수께서 아무런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고향사람들의 불신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아무런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다는 것이 그분의 무능력으로 곡해될까 염려하여 전승자나 편집자가 5ㄴ절을 덧붙였다고 생각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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