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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름없는 순례자 고전을 읽고 끊임없는 기도에 대한 생각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4-12-03 조회수38 추천수2 반대(0) 신고

 

 

신앙인에게 있어서 기도라는 것은 마치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숨을 쉬어야 하는 것처럼 늘 우리 영혼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실천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은 것도 또한 사실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좀 더 성숙하고 멋진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기도에 대해 책을 통해 공부를 하기도 하고 피정을 통해서 배우기도 한다. 흔히들 기도라는 것은 하느님과의 진심어린 우정의 대화라고 하는 원론적인 측면에서 이야기를 하지만 이 말이 전해주는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대화라고 한다면 일방이 아니라 쌍방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말을 들어주시는 그 상대방이신 하느님의 현존이 있어야 하는 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만약 어떤 논리를 가지고 냉철하게 기도를 생각해보면 이와 같은 것이 만약 배제된 상태에서 우리가 그걸 의식하지 못하고 한다면 자신은 기도를 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상대방 없는 독백과도 같은 것이 되기도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육을 입고 있는 육적인 존재이다. 하느님의 신성은 육적인 존재가 아니고 영적인 존재로 계시기 때문에 육의 언어로서는 하느님과 대화를 할 수가 없다고 본다. 우리가 하느님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대화의 상대방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본다. 이건 마치 국적이 다른 두 나라의 국민이 서로 소통하고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한 국민이 다른 나라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게 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훌륭한 기도의 가르침과 이론이 있다고 해도 모래성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대화를 기도라고 할 때 이때 우리가 생각하는 대화의 의미를 단순히 인간 세상에서 나누는 대화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를 한다고 한다면 온전한 기도의 의미라고 보기 힘든 측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피조물과 창조주와의 깊은 대화이기 때문이다. 서로 소통이 아무리 잘 된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메시지를 받는다고 해도 그 메시지를 단순히 우리가 말하는 대화에서처럼 현재성을 가지고 즉시 그때마다 순간 순간 다 이해를 할 수가 있는 게 아니고 그 메시지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때로 시간이라는 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딜레마이지 않을까? 왜냐하면 애시당초 이미 물리학에서 말하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인간의 차원과 하느님의 차원이 존재론적으로도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을 이해할 수 있어야 어쩌면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고 또 인내를 가지고 기도를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인간이란 육적인 존재는 눈으로 보고 또 뭔가를 느껴야 인식을 하고 믿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과의 소통의 수단이 되는 기도를 잘 하기 위해서는 이런 기초적인 개념부터 잘 인식을 해야 온전한 기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이와 같은 걸 바탕으로 해서 그럼 기도를 한다고 했을 때, 대화를 한다고 했을 때 어떻게 하는가 하는 방법도 중요한 측면이 있다. 흔히들 기도를 할 때 하느님께 고상하고 멋진 말로 포장이 잘 된 기도여야 그게 훌륭한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과 만약 그게 잘 되지 않는다면 훌륭한 기도로써의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한다고 생각해 기도생활이 어렵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얼핏 보면 그게 하느님과의 멋진 대화라고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겉만 화려한 포장과도 같을 수 있다. 실제는 내용이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용만 중요하고 겉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세상에서도 대화를 할 때 많은 말을 해서 또 화려한 미사여구를 잘 표현했다고 해서 대화를 잘 했다고는 평가하지 않을 때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말은 어눌하다고 할지라도 그 말에 진심이 묻어날 때 우리는 그 대화가 진솔한 대화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우리와 하느님과의 대화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하느님과 나누는 가장 진실된 대화는 꾸밈없이 하느님과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게 만약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다른 나인 다른 나를 통해서 하느님과 대화를 하는 상대방으로 된다면 이미 여기에서부터 대화의 대상이 달라지기 때문에 자칫 유령기도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또 다른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런 사랑을 일시적으로만 나눈다고 해서 그걸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인간과 인간 사이에 나누는 아름다운 인간애도 지속성을 필요로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런 사랑을 두고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처럼 하느님과의 사랑도 그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는 기도를 하기를 원하시는지도 모를 일이다. 끊임없이 기도를 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액면 그대로 하기를 과연 하느님께서 원하실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난 하느님께서 이런 액면 그대로 하기를 원하시지는 않으실 거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사랑이 마치 로봇과 같은 맹종적인 사랑이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만약 그런 걸 원하셨다면 애초부터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어떤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도를 하라고 주문하시는지 그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불가능을 요구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내가 많은 시간을 두고 고민을 해봤을 때 우리의 삶이, 삶 자체가 마치 하나의 기도가 된다면 그게 가장 이상적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생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기도와 삶이 분리가 되지 않고 마치 하나로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삶이 기도가 된다는 말은 쉬운 듯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의미에서는 아주 고차원적인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의 방향과 관점을 달리 해 보면 아주 단순할 수도 있다.

 

우리 인생의 삶이 나 자신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고 하느님을 위한 삶이 원칙적으로는 가장 우선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지만 사실 그 삶이 이웃과 주변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한 개념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삶이 이타적인 삶을 살고 그 삶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게 되는 생활을 한다면 그 삶이 바로 이웃사랑과 동급의 가치가 있는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도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라는 게 아주 거창하고 복잡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는 학문적으로 뭔가 배워야 제대로 된 기도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생각이 기도생활을 더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어서 기도를 등한시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어쩌면 이름없는 순례자 책에 나오는 순례자가 바치는 단순한 기도의 말이 단순한 것 같지만 그 단순함은 단순함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단순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끊임없이 기도를 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면도 있다는 걸 우리에게 무언의 어떤 암시를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하는 것은 달리 생각해보면 그냥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의미 없는 일방적인 대화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면에서 본다면 그렇게 하는 게 끊임없이 하느님을 잊지 않으려고 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그와 같은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적으로 느끼려고 하는 것도 마치 우리가 성체 앞에서 성체조배를 하는 것과도 같은 기도가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성체조배는 그저 성체 앞에서 하느님의 현존 속에 머무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훌륭한 기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도 흔히 하는 말처럼 사랑이라는 것은 꼭 말로 표현을 해야만 사랑하는 게 아니고 말로는 표현을 하지 않아도 마음으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할 수가 있는 것처럼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그와 같은 사랑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게 현실적으로 된다면 세상 속에서 살아가도 삶 자체가 거룩한 기도가 되고 그와 같은 생활은 좀 더 강화가 되고 강화가 된다면 삶 자체가 거룩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방법도 될 것이다. 그게 많은 훈련으로 이어지고 거듭된다면 기도의 최고 경지인 관상의 경지까지에 이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름없는 순례자 속에 나오는 순례자는 순례를 하면서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답을 찾는 구도자의 길을 모색하지만 우리는 이 순례자의 모습에서 어쩌면 기도라는 게 무엇인지 그 해답을 찾아보는 것도 우리의 신앙생활을 알차게 할 수 있고 또 기도라는 게 뭔지를 알려주는 해답이 있을 거란 희망을 가져보면 어떨까 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게 자연스럽게 몸에 배이게 하려고 하기 위해서도 처음엔 모든 것을 배우는 데에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기도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보기 때문에 그래서라도 그 수준에 이를 때까지는 의식적인 노력도 해야 하는 부분도 있을 거라고 본다. 이런 노력이 함께 어우러진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기도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지금부터서라도 그 길을 가면 언젠가는 훌륭한 신앙인으로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아마 보게 될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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