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오 5, 3.10
'이미'를 살고 있는 나! 그러나 '아직'을 그리워하는 나!
예수님은 "하늘 나라가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고 하셨다. 현재형이다. 이미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위로의 말이 아니라 선언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은 미래를 기다리는 이들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늘 나라를 살고 있는 이들이다. 나는 오늘 이런 분들을 만나고 온 것 같다. 청년을 공감하고자 하는 세미나. 소박한 자리였지만, 깊은 성찰을 끌어냈다. 청년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의 허세가 비워지는 시간이었고, 동시에 자유로워지는 시간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이미 하느님 나라를 맛보았다.
비움 속에 충만이 있다.
박해 속에 자유가 있다.
십자가 속에 부활이 있다.
역설이 아니라 실재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의 실재다.
예수님은 아직 오지 않은 하느님 나라도 보여주신다. "위로를 받을 것이다." " 땅을 차지할 것이다." "하느님을 볼 것이다." 완성은 아직 오지 않았다. 슬퍼하는 이의 눈물은 여전히 뜨겁고, 온유한 이는 아직 땅을 빼앗기고, 평화를 만드는 이의 손에는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오늘 바로 그 현실을 만났다. 하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그 빛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깜박인다. 씨앗은 뿌려졌으나, 추수는 아직 멀다. 우리는 이 긴장 속에 산다. '이미'의 확신과 '아직'의 갈망 사이에서.
죽은 이들은 이 긴장을 건넌 이들이다. 그들은 더 이상 희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제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제 그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사랑뿐이다. 사랑만이 죽음을 넘어간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이미'가 '아직'의 베일을 벗고 온전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씨앗이 터져 새싹이 되고, 새싹이 자라 열매를 맺듯, 죽음은 하늘 나라의 완성으로의 탄생이다.
죽은 이들이 나에게 말을 건넨다.
"너는 지금 이미 하늘 나라를 살고 있다. 네가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풀 때, 네가 정의를 위해 작은 목소리를 낼 때, 네가 슬픔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을 때, 그때 하늘 나라는 네 안에서 자란다. 그러나 완성은 아직 오지 않았다. 네 눈물은 아직 마르지 않았고, 네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세상의 불의는 여전히 거칠고, 평화는 여전히 깨지기 쉽다. 그 사이를 사랑으로 걸어라. 이미 주어진 은총을 감사하며, 아직 오지 않은 완성을 갈망하며. 그 긴장 속에서 네가 사는 매 순간이 하느님 나라의 씨앗을 키운다."
나는 오늘을 산다. 마음을 가난하게 비우며, 슬픔을 품으며, 평화를 만들며. 그 비움이 이미 하느님의 충만임을 조금씩 깨닫는다. 그러나 갈등은 여전히 날카롭다. 완전한 화해는 아직 멀다. 이 사이,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나는 걷는다.
오늘, 위령의 날, 나는 죽은 이들을 기억하며 내 삶의 ‘이미’를 감사하고 내 삶의 ‘아직’을 희망한다. 그 사이를 사랑으로 걸으며, 하늘 나라가 이미 내 안에서 자라고 있음을 믿는다. 행복하여라, 그 사이를 사랑으로 사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주님,
제가 지금 이미 당신의 나라를 살게 하소서.
마음을 가난하게 비우고, 자비로 살며,
평화를 만드는 것이 미래의 보상이 아니라 현재의 은총임을 깨닫게 하소서.
또한 제가 아직을 갈망하게 하소서.
완전한 위로, 완전한 정의, 완전한 평화를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이 긴장 속에서 사랑으로 걸어가게 하소서.
먼저 가신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이 이미 당신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들의 증언이 저희가 사는 이 '사이'의 길을 밝혀주기를 청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