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11월 2일 위령의 날 제1독서 (욥19,1.23-27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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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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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11-02 | 조회수50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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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일 위령의 날 제1독서 (욥19,1.23-27ㄴ)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5) "I know that my Redeemer lives,and that in the end he will stand upon the earth."
욥은 앞에서 자신의 사연이 기록되기를 바란다고 반복적으로 표현함으로(23절, 24절) 자신의 사연과 무죄함이 후대에라도 전해져 입증되기를 갈망하였다. 이어지는 본절에서는 욥은 구원자되신 하느님께서 자신의 진실성을 변호해 주실 것이란 희망을 피력한다. 이러한 문맥의 흐름은 극한적 고통에 처한 답답하기 짝이 없는 욥의 심리적 상태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
지금까지 욥은 애타는 자신의 상황,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피력해 왔었다. 또한 누차 친구들의 말이 그릇된 것임을 지적해 왔었다. 그러나 이런 자신의 말에도 불구하고,친구들은 더욱 강도를 높여 자신을 단죄하고 비난하는 말을 내뱉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다시 무언가를 말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변론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이러한 자신의 사정을 의롭게 판단하실 하느님을 증인이요, 변호인, 재판관으로 청하면서, 그분이 자신의 말을 공정하게 증언하고,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며 의롭다고 판단하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욥의 상황이나 심경등을 감안해서 이해할 때, 본절의 내용이 더욱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다.
여기 본절 가운데 가장 중요한 표현은 '구원자' 이다. 본절에서 '나의 구원자' 에 해당하는 '꼬알리'(goalli ; my Redeemer)는 '구속하다','친족으로서 행동하다' 라는 의미를 지닌 '까알'(gaal)의 분사형에 1인칭 소유격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여기 사용된 '까알'(gaal)은 타살당한 친척을 위해 대신 복수하거나(민수35,12), 가난하여 어려움에 처한 형제(친족)의 소유지(기업)를 되사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레위25,25.26), 또는 친족이 자식없이 죽었을 경우, 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후사를 잇는 등(룻기2,20)의 행위과 관련된 표현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욥의 억울함을 하느님께서 구원자가 되셔서 해결해 주시고, 그 진실성을 증언해 주실 것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욥이 극심한 고난과 혼란 가운데서도 구원자의 등장을 염원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즉 욥은 인간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 구원자 하느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성숙한 신앙을 가졌던 것이다.
이것은 성부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천주 성자 제2위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이 땅에 보내신 것을 연상케 한다. 따라서 본절의 이같은 표현은 욥이 지금 자신을 누구도 구원할 수 없음을 알고, 막연하게나마 하느님께서 구원자로서 등장하실 것을 염원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런 의미는 후반절의 '그분께서는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분명해진다. 여기서 '그가 ~서시리라' 에 해당하는 '야쿰'(yaqum)은 '서다', '자리에서 일어나다' 라는 의미를 지닌 '쿰'(qum)의 미완료형이다.
여기서 '일어선다'는 것은 특정 공동체에서 자기 의사 표명을 위해, 또 법정에서 누군가를 변호하기 위해 일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기서 욥은 장차 하느님께서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입증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친히 서실 것임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진술을 함에 있어, 욥은 '나는 알고 있다네' 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알고 있다네'에 해당하는 '야다으'(yadah)의 완료형에 1인칭 주격 접미사가 결합된 형태이다. 여기서 사용된 '야다으' 동사는 주로 남녀가 동침하는 것과 관련해서(창세4,17,25), 실제적으로 사물을 보거나 생생하게 현장에 참관해서 듣는 것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표현이다. 즉 가장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앎, 확실한 앎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욥이 본문에서 이같은 단어를 사용한 것은 구원자로서 하느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확신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지만, 그가 염원하는 바가 얼마나 간절한지를 부각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것은 일면 자신의 무고함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확증적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6) "And after my skin has been destroyed,yet in my flesh I will see God."
본절은 욥이 하느님을 뵙고 그분 앞에 설 것을 확신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본절의 표현 가운데 '몸으로'는 두 가지 해석이 갈라진다. 이에 해당하는 '우밉베사리'(umibbesari; 내 몸으로; yet in my flesh)는 접속사 '와우'(wau)에 '~로부터'(from)란 의미를 지닌 전치사 '민'(min), 그리고 '몸'(살) 을 의미하는 명사 '빠사르'(basar; flesh)에 1인칭 소유격 대명사가 결합된 형태이다.
이 표현에 대해 첫번째 해석은 전치사 '민' 을 분리의 의미로 보고, 욥이 죽은 후에 육체의 장막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느님을 뵈올 것이라는 견해이다. 또 다른 해석은 '민'을 출발의 의미로 보아,그 자신의 몸으로부터 하느님을 뵈올 것이란 견해이다. 이것은 욥이 죽기전에 지금의 재난으로부터 해방되어 건강을 회복하고, 자신의 몸으로 하느님을 뵙게 될 것임을 나타내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대개의 학자들은 이 두 가지 견해 가운데 전자의 의미를 취하며, '민'(min)을 분리의 의미로 본다. 이것은 본절의 상반절인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라는 표현과 어울리며, 욥이 자신의 건강이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또 그것을 확신한 사실이 본서 전체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측면을 감안할 때에도 전자가 더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앞서 9장 32절에서 욥은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을 뵐 수도 만날 수도 없는 것에 대하여 회의와 절망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분은 나 같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나 그분께 답변할 수 없고 우리는 함께 법정으로 갈 수 없다네." (욥9,32)
따라서 본절인 19장 26절은 이와 정반대되는 내용처럼 비쳐진다. 그러나 이것은 앞선 내용과 배치되는 내용으로 인식할 수 만은 없다. 이것은 두 본문 사이에 그 전제, 즉 욥이 가정하는 상황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먼저 9장 32절은 육체가운데 있는 현 상태, 즉 이승에서는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과 만나 쟁론할 수 없다는 의미인 반면, 본절은 자신의 가죽이 썩은 후, 곧 내세에서 하느님을 뵈올 수 있다는 의미이므로, 이것은 결코 충돌되거나 모순되는 내용이 아닌 것이다.
욥은 특별 계시가 완성된 신약 시대의 백성들처럼, 죽음 이후 인간은 하느님의 최종 심판을 받고 천국과 연옥과 지옥으로 가며, 종국에는 천국과 지옥에서 영원한 삶을 산다는 등과 같은 내세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욥기 전체의 내용으로 볼 때, 욥은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영속적으로 유지된다는 것과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정도의 내세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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