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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첫째 미사]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5-11-02 조회수67 추천수4 반대(0) 신고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첫째 미사] 마태 5,1-12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모든 성인 대축일로 시작한 위령의 달이 이틀째에 접어 들었습니다. 어제 우리는 천국에서 하느님과 참된 일치를 이루어 그분과 함께 영광과 기쁨을 누리는 성인들을 본받아야겠다는 결심을 되새겼습니다. 그 일환으로 어떻게 해야 성인들처럼 될 수 있을지 그 ‘방법’에 대해 살펴보았지요. 오늘 ‘위령의 날’에는 우리가 왜 천국의 삶을 지향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그리고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묵상하게 됩니다. 그 출발점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하게 되는 ‘죽음’에 대해 묵상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살아있음’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일깨워줍니다. 죽음은 지금 여기에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충실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죽음은 고통과 시련으로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그것들이 언젠가는 끝남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령의 달에, 특히 오늘 위령의 날에 죽은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렇게하면 자연스레 나도 언젠가 죽을 것을 생각하게 되므로,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가치들이 죽음 이후에도 변치 않고 계속되는지, 그것이 영원히 이어질 참된 삶에 꼭 필요한지를 제대로 식별하여 보다 중요하고 소중한 것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욥은 우리가 왜 천국의 삶을 지향하며 하느님만 바라봐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후회스러울 정도로 그에게 가혹한 고통과 시련이 계속 되었지만, 그리하여 그의 삶에 좋은 것은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었지만, 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믿음만은 여전히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었지요. 자신을 창조하시고 큰 은총을 베풀어 주신 하느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자신을 구원하시리라는 것을.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우울하고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분은 언제나 변함없이 현존하시면서, 공정이라는 원칙으로 자비와 사랑이라는 섭리로 이 세상과 자기 삶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은 겁니다. 그런 믿음을 지닌 채 욥은 하느님만 바라보며 그분을 꼭 만나뵙고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웁니다. 그 바람대로 하느님을 만나면 욥은 자신에게 그토록 가혹한 고통과 시련을 허락하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고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그의 삶은 고통과 시련으로 끝난 불행한 삶이 아니라, 고통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 영광된 삶이라는 점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느님의 뜻이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요? 그 뜻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힘들고 괴로운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져야만 할까요? 이에 대해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거스르며 잘못된 길을 걷는 인간들에게 여러 차례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라고, 당신께서 바라시는 올바른 길을 걸으라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잘못을 바로잡기는 커녕 더 악한 일들을 수 없이 저질러 그분 마음을 아프게 하였지요. 그럼에도 하느님은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당신 뜻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만큼 인간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외아들을 그들에게 보내주십니다. 그들이 그 아들마저 배척하며 죽일 것을 아시면서도, 아들의 그 숭고한 희생을 통해 그들의 죄를 씻어 구원하시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그렇게 하신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토록 큰 사랑을 보여주셨으니, 그 사랑과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지금 즉시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화해하여 그분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구원과 참된 행복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부족함과 약함 때문에 계속해서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죄를 짓게 됩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우리들 각자가 지은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고해성사’라는 좋은 길을 열어주셨지요. 그러나 죄의 흔적을 지우려는 우리의 노력 즉 ‘보속’이 부족하여 죄의 결과로 감당해야 할 벌이 우리 영혼 안에 해소되지 못한 채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이를 ‘잠벌’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남아있는 상태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철광석으로 강철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안에 있는 불순물을 모두 태워없애야 하듯이, 우리가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하기 위해서는 우리 영혼 안에 있는 불순물들을 모두 태워 없애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재계와 선행을 통해 보속할 수 있지만, 죽은 다음에는 그게 불가능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이대로 하느님 나라에 가지 못하고 마는 걸까요? 다행히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속죄와 정화의 시간을 거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존재로 변화될 마지막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그 마지막 기회를 ‘연옥’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있기에 우리가 오늘 죽은 모든 이들, 특히 연옥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겁니다. 천국에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있는 성인들, 이 세상에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 연옥에서 정화의 시간을 견디며 고통받는 영혼들 모두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 받는데 이를 “모든 성인의 통공”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어제 모든 성인 대축일에 천국에 있는 성인들에게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전구해주시기를 청했고, 오늘 위령의 날에는 우리가 연옥 영혼들을 어서 빨리 당신 나라에 받아들여 주시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그분과 함께 영광과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성인들께 전구를 청하는 것보다,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보다, 나 자신이 죽음을 앞두고 지난 삶을,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는 동안 수없이 행해온 선택들을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시지요. 그건 세상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재물을, 쾌락을, 권력과 인기를 쫓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누리는 세상의 것들을 지키기 위해 하느님 뜻에 눈감으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더 큰 사랑과 자비로 끌어안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는 데에 쓸 데 없고 부질 없는 것들에 한 눈 팔지 않고 오롯한 마음으로 하느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힘과 재물을 통해 일시적으로 안정을 누리는 거짓 평화를 쫓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순명을 통해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한 마음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행복과 영광을 누리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지금부터 매 순간을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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