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루카 14,14
이미 받은 자로서
예수님은 보답을 기대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보답을 약속하신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 복음의 심장이 뛰고 있다. 나는 한때 이 말씀을 ‘하늘의 적금 통장’처럼 이해했다. 지금은 손해를 보더라도, 언젠가 천국에서 이자가 붙어 돌아올 거라고. 하지만 그 생각 속에서도 여전히 계산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더 깊이 들어가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 이 표현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먼 미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이다.
내가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음을 다시 떠올려본다. 잊고 있었던 말씀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콜로 3,1).
보답은 미래에 받을 것이 아니었다. 이미 받았다.
이미 받은 것, 무엇을 받았을까?
조건 없이 사랑받는 존재로 살아갈 자유를 받았다. 타인의 평가와 인정으로부터 해방될 자유를 받았다. 주고받음의 계산에서 벗어나, 그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
돌이켜 보니, 나는 하느님께 무엇을 드린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사랑이 내 삶을 감싸고 있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께 보답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셨을까? 아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보답할 능력도 자격도 없었을 때, 그분은 먼저 나를 사랑하셨다.
나는 이미 보답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은 사람이구나!
그래서 내가 보답할 수 없는 이들을 초대하는 것은, 미래의 보상을 위한 투자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받은 것의 자연스러운 흘러넘침이다.
항아리가 가득 차면 넘친다. 애써 쏟아내지 않아도 저절로 넘친다. 이미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으로 충만해진 마음은, 자연스럽게 조건 없는 사랑으로 흘러넘친다.
가난한 이, 장애인, 다리 저는 이, 눈먼 이를 초대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받은 자의 기쁨 넘치는 표현일 뿐이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무엇이든 하고 싶어 하듯이,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그 사랑을 나누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행복의 비밀이 있구나.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 14,13).
이 말씀이 이제 새롭게 들린다. 행복은 미래에 올 보상이 아니다. 행복은 지금, 보답 없이 줄 수 있는 자유 그 자체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은 약속이 아니다. 선언이다.
이미 너는 사랑받았다.
이미 너는 자유롭다.
이미 너는 보답을 받은 자다.
이제 이미 받은 자로서 살고 싶다. 내 주변에 가난한 이, 장애인, 눈먼 이를 초대하고 싶다.
그런데 누가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인가.
사회적 약자, 이주민, 노숙인, 고립된 노인들
외로움이나 상실 속에서 침묵으로 살아가는 사람
‘능력 없음’ 때문에 세상에서 밀려난 사람들
혹은 나에게 불편함을 주는 사람들
나의 가치관을 흔들거나, 다르다는 이유로 거리를 두게 되는 사람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내가 쉽게 초대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에게 바로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신다.
어쩌면 이 말씀은,
내 안의 결핍과 상처 입은 부분,
버려진 내면의 존재들까지 식탁으로 불러들이라는 초대가 아닐까.
내가 이들을 초대할 때 내 존재 전체를 품는 하느님의 식탁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 1요한 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