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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옥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5-11-13 조회수1,287 추천수9 반대(0) 신고

위령성월을 맞아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다. 바람결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우리도 언제인가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때가 있을 것이다. 위령성월인 11월은 특별히 죽음을 생각해보고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달이다. 이런 때에 '연옥'에 대해 고찰해보는 것도 의미가 깊을 것이다.

 

연옥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속에 죽었지만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거쳐야 하는 정화 과정"이라고 한다. 이 교리대로라면 신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이 정화 과정을 거칠 것이라 여겨진다.

 

만일 그렇다면 연옥은 천국이나 지옥보다도 더 우리에게 중요한 실재가 아닌가? 그런데 이 정의에 따르면 연옥은 완전한 의인도 완전한 죄인도 아닌 '반(半) 의인'들이 정화되기 위해 머무는 '반(半) 지옥'과 같은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지옥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지만 왠지 두려움을 주는 '연옥'의 정체는 진정 어떤 것일까?

 

연옥은 무슨 뜻일까?

 

   '煉獄'이라는 한자어는 '불의 단련'과 그 장소로서의 '감옥'을 뜻한다. 그러나 '연옥'의 원어인 라틴어 'Purgatorium'은 'purgare', 즉 '정화하다'라는 동사에서 나왔다. 따라서 'purgatorium'은 본디 '정화하는 일'로 번역해야한다. 그러나 흔히 '정화의 불'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표현들로 번역하며 '정화의 장소'로 이해된다. 하지만 라틴어의 purgatorium은 공간적 측면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이 점에서 '정화하는 일', '정화 사건', 또는 단순히 '정화'라는 표현이 더 합당할 것이다.

 

연옥은 성서 어디에 나오는가?

 

   성서에서 연옥이라는 말을 직접 언급하는 구절은 없다. 그러나 연옥에 관한 교리는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성서의 명백한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다.

 

구약성서에서는 마카베오 2서 12장 42-45절이 관련이 있다. 유다 마카베오는 이방인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유다인들의 시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우상의 부적'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들이 성전에 참전하여 전사한 사실은 의로우나, 우상을 섬기는 일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유다는 죽은 자들이 범한 죄를 모두 용서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 12,45) 죽은 이들을 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속죄의 제물을 바치고 기도하는 거룩하고 경건한 관습을 이야기하는 이 본문에서 연옥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나타나지 않지만, 죽음 이후의 죄의 용서와 살아있는 자들이 죽은 자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관념을 발견한다. 

 

 신약성서에서, 고린토 1서 3장 10-15절은 최후의 심판 때에 인간의 참된 모습이 불 속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불은 정화의 불이 아니라 최후의 날에 있을 심판의 불 또는 존엄한 모습으로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구절이 연옥에 대한 교리를 명백히 드러내 주지는 못하지만, 개괄적인 윤곽을 제시해 주기 때문에 연옥 교리에 관한 신학이 발전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또 베드로 1서에서는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3,19) 분명한 것은 여기서 '갇혀 있는 영혼들'이 지옥의 처지에 있는 영혼들도 아니고 천국의 처지에 있는 영혼들도 아니다. 그래서 연옥의 상태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교회는 연옥을 무엇이라고 가르치나?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죽었거나 완전히 깨끗해지지 아니한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지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해지기 위하여 죽은 후 정화과정을 거쳐야 한다"(1030항)고 한다. 이 정화 과정은 단죄받은 이들이 받는 벌과는 완전히 구별된다. 연옥은 죄스런 인간이 거룩한 하느님과 결정적으로 만나게 되는 순간, 즉 인간이 최종적으로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순간이다.

 

교회는 초기부터 죽은 이들을 존중하고 기념하였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특히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정화되어 지복직관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 교회는 죽은 이들을 위한 자선과 대사와 보속도 권고하였다. 따라서 연옥 교리는 죽은 이들을 위하여 교회가 꾸준히 실행해 온 기도의 관습과도 관련이 있다.

 

연옥의 신학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은 부단히 정화되어야 한다. 현세의 삶 동안, 죽음의 순간에 또한 사후의 생명을 영위할 때에도 인간은 정화되어야 한다. 죄스러운 인간은 끊임없이 회개하고 깨끗해져야 하지만 정화는 인간의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현세 생활 중에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정화는 장차 하느님의 생명이 충만하게 전달됨으로써 실현될 완성의 날에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이 정화는 '의인'이 순결한 신부로서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결합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심판하는 하느님을 만날 때에 인간은 정화되지만, 이 만남은 인간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된다. 하느님과의 해후는 죄인에게 무서운 심판의 형식으로 체험되기 때문이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마치 자신을 태워 삼켜 버리고 정화시키는 불 앞에 서게 되는 것처럼 전율을 느낀다. 연옥의 '불'은 정화시키는 하느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표상이다. 이처럼  사후의 정화가 이루어지는 상태인 연옥은 하나의 장소라기보다 사랑과 정의의 하느님 앞에 서게 되는 상황이다. 

 

연옥은 쉽게 설명해보라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죽은 후의 세상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저 세상에서 귀한한 사람들의 체험을 조사 연구한 최근의 보고서가 의사들에 의해 발표되었는데, 이들의 이야기에는 공통적 요소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즉 그들은 모두 의사가 죽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고,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는 느낌이 있으며 자신의 몸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발견한다. 또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빛나는 어떤 존재'가 나타나고 이 존재로부터 말이 없는 어떤 질문에 대한 암시를 듣는다. 그리고 그의 지난 삶에 대해 마치 섬광과 같이 총체적으로 회고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그리스도교 종말론의 내용들과 비교하여 그렇게 놀랄만한 것이 못 된다. 즉 죽음은 생명으로 넘어가는 하나의 과정이고, 변형된 육신은 사랑하고 심판하시는 하느님과 만나게 되며 또 다른 죽은 이들과도 만나게 된다는 것을 그리스도 신자들은 누구나 믿고 있는 사실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환시를 통하여 천상에서 옥좌에 앉아 계신 하느님의 모습을 보고 즉각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큰일 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이사 6,5). 이사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라 살았던 '의인'이었으나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는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만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자연스러운 모습일 것이다. 바로 자신의 삶을 섬광과 같이 총체적으로 회고하게 되면서, 하느님 앞에 바로 설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부당함, 어두움 그리고 죄악성을 깊이 깨달을 것이다. 이사야가 천사의 도움으로 곧 정화의 은총을 누렸듯이, 우리도 이러한 정화의 은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 자신이 바로 연옥이라는 것, 그리고 그분과의 만남이 바로 연옥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집에는 개가 한 마리 있다. 주인이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반갑게 꼬리치며 맞아주어야 하는데 어떤 날은 나오지도 않고 숨어있는 경우가 있다. 오랜 경험에 의해 그런 날은 그 개가 반드시 무슨 짓을 저질러 놓았다는 것을 안다. 즉 아무 데나 실례를 해놓았다던가, 슬리퍼를 물어뜯어 놓았다던가, 화분을 파헤쳐놓았다던가, 또는 꽁무니에 더러운 것이 잔뜩 묻어있을 때이다. 그런 날은 식탁이나 침대 밑에 숨어서 아무리 나오라 해도 나오지 않는다. 어질러 놓은 것을 치우고 몸에 묻은 더러운 것들을 닦아주고나면 그제야 안심하고 마음껏 안긴다. 바로 이것이 심판 날에(개인적인 죽음-사심판) 하느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분이 하나하나 불러서 "너는 오른편, 너는 왼편"으로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분 앞에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되지 않겠나? 스스로를 가두어두는 그 어둠(폐쇄성) 속에 있지말라고 그분이 우리의 이름을 불러 내시며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 주시고, 어질러진 모습을 바로 해주시는 그런 과정을 연옥이라 하지 않을까? 그분을 뵙자마자 섬광처럼 우리의 전 생애가 떠오를 때 너무나 부끄러워 고통스러운 그 심정이 바로 정화하는 불의 체험이 아니겠는가? 그때에 너무 고통스럽고 죄송스럽지 않기 위하여 현세에서의 책임감 있는 삶이 요구되는 것이다.

 

연옥 교리는 결국 지옥 교리나 천국 교리와 마찬가지로 죽은 후가 아니라 아직 우리의 의지로 우리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의 충실한 삶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옥에 대해 예전처럼 어느 특정한 처소나 시간, 또는 경위를 알아내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다. 또한 연옥이란 하느님이 아주 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선하지도 않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 만드신 일종의 '반지옥'이라는 이미지도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이보다는 넓게 보았을 때, 연옥은 천국의 일부로써 '반(半) 천국'으로 보는 것이 옳다. 부족한 인간에게 보속과 정화의 기회를 준 자비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글은 한국가톨릭대사전 9, 프란츠 요셉 녹케, 조규만 옮김, 종말론, 임재혁의 논문 '연옥교리의 이해', 차동엽, 가톨릭신자는 무엇을 믿는가 2, G.그레사케, 심상태, 종말신앙...을 참조하여 쓴 것입니다...위와 같은 책을 근거로해서 ....마지막 대목은 예비자 교리 때에 '연옥을 설명하며....제가 자주 쓰는 예화들입니다. 엉성하지만...필요하신 분들도 있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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