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왕년에 한솥밥을 먹던 친구 아닌가. 맞아, 아무개 집 큰아들이야. 똑똑하네그려. 저 연설하는 것 보게. 이 사람아, 똑똑하면 뭘 해. 우리와 근본이 같은걸.”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용이 날 수 없다고 단정하고, 나더라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 세상 인심이 아닌가 싶다. 아직도 무슨 학교 출신이 대통령이 된 것을 아니꼽게 생각하는 풍토를 보더라도 2천 년 전 주님의 고향에서 들었던 소리가 그대로 되풀이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 역시 그런 생각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에 가장 싫은 것 가운데 하나가 새 학기가 되어 가정환경을 조사할 때였다. 부모의 직업을 묻는데, 당시 아버지의 직업은 목수였다. 당시 목수는 ‘노가다’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 어떻게 그 어려운 말을 생각했는지 나는 ‘노동’이라고 대답했다. ‘노동’이 ‘노가다’보다 더 그럴듯한 말이라는 영악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내가 영악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 당시 풍토에서 직업의 귀천이 심했던 것이다. 우리집에는 아버지, 작은아버지 세 분, 작은 형 등 합해서 목수가 다섯이나 되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이 한마디에 당시 사람들의 모든 생각이, 그리고 조금도 그 내용은 변하지 않고 2천 년이나 계속된 왜곡된 가치관이 그대로 담겨 있다. 거듭나야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은 바로 이런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뜻이 아닐까? 그런데 이 거듭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니코데모도 근심하며 물러가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쓰는 이 말을 덧붙인다. “사람은 죽어야 지옥을 안다.”
우리 초등학교 교훈이 ‘날로 새로워라’였다. 나는 그 교훈의 의미를 요즘에야 조금 알아들을 듯하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교훈이 아닐까 싶다. 내 생각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눈의 비늘을 떼지 않으면 우리 곁에 오신 주님을 지금도 목수라고, 전라도나 경상도라고, 상고를 나왔다고, 교양이 없다고, 미국을 반대한다고 우습게 여기지 않을까? ●
최연석 목사(전남 여수시 중부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