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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의 왈츠박자/영적성장을 위한 감성수련 문종원신부님
작성자조연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8-12-24 조회수540 추천수4 반대(0) 신고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5,36)


신약성경에서 복음 사가들은 예수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드셨던 장면을

여러 번에 걸쳐 묘사합니다.

pity(측은히 여김)에 “e”를 넣으면 piety(경건심, 신앙심)가 됩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치가 아닙니다.

“pity”와 “piety”는 같은 어원을 갖습니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두 단어를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원래 갖고 있는 뜻을 축소시켜 약하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예수님께서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pity)과 경건심(piety)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서 원래 가지고 있었던 의미를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왜

사람들에게 정을 쏟으며 사셨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연민” 이라는 말에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으로부터 “참 안됐어.”라는 말을 들을 때

감사의 마음이  들지가 않습니다.

“어휴 가엾어라.”라고 할 때도

그렇게 매끄러운 표현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가련한 신세”라고 할 때 이는 불쌍한 사람들을 비꼬는 말처럼 들리고

“참으로 가련하게 됐어.”라는 말은

“유감천만”이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경건심은 연민보다는 덜 거슬립니다.

어떤 사람을 “pious”(경건)하다라고 할 때

이는 위선자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이라고 칭할 때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자부하고 다른 사람들을 깔보는

독선적인 이미지가 스며 있기 때문입니다.


 웹스터 사전(Webster's Unabridged)에서는 연민을

“다른 사람들의 가련함이나 고뇌에 대한 공감력, 동정심 또는

함께 하는 고통”으로 정의합니다.

“측은한 마음”이라는 단어의 첫 번째 정의는

“자비로 가득 차고, 동정심이 많으며 인정이 많다”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합니다. 

“pity”(연민)라는 말은 “piety”(경건심) 안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piety(경건심)의 의미는 “신앙생활을 아주 열심히 한다” 라는 뜻으로

웹스터 사전에서는 정의합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따먹지 말라거나 손을 씻는 예식보다는

믿음의 삶에 투신하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상기시켰습니다.

그분은 경건심은 연민의 정을 일게 하고 이 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올바른 행동으로 이끈다는 것을 가르치셨고 행동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예수님의 믿음(경건심)은 자주 측은한 마음을 일게 했으며

이러한 측은한 마음은 느낌 자체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 상황들을 애써 변화시키려는 노력으로 이어집니다.


예를 들어, 마태오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거기 모여든 많은 군중을 보시자 측은 한 마음이 들어

그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여기에는 세 가지 리듬이 항상 배어 있는 데

예수님께서 삶을 통해 보여 주신 사랑의 왈츠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셨고,

그들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드셨고

그 다음에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행동을 취하셨습니다.

보셨고... 측은한 마음이 드셨고... 치유하셨다.

보고... 불평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밟는

세 가지 리듬과는 달리 강력한 힘을 지닙니다.


이것은 또한 능동적인 그리스도교 영성을 위해 좋은 방안을 제시합니다.

자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측은한 마음 곧,

연민과 동정심이 생기셨습니다.

이것은 군중을 향한 측은지심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처지에 있던지 상관없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행위를 취하셨습니다.


배고픔을 느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군중들이 측은해 보이는 구나.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는 그들을 그냥 돌려보내기가 안됐구나.

배고파 쓰러질 수도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셨으며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먹고도 남았습니다.

신체적으로 장애자인 어떤 사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깊이 동정하시며 응답하셨습니다.

“소경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자

그들은 곧 눈을 뜨게 되었다.” 

영적으로 배고픔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예수님은

어떤 조치를 취하십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다.”

슬픔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보시고

측은히 여기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치셨는데

죽은 사람은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셨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 고 위로하시며 그 젊은이를 살리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먹이시고, 치유하시며, 가르치시고 살리셨습니다.

측은지심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측은지심은 경건심으로부터 일어났으며 

곧,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열정으로부터 기인한 것입니다.

바꾸어 더 쉽게 말하자면, 예수님은 당신께서 말씀하신 데로

친히 그렇게 하셨습니다.

종교는 단지 “존재” 하는 것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그 이전에 “느낌”이 선행합니다.

보시고 감동을 받으신 후에 예수님은 감동을 시키셨으며

당신 존재에 관한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기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이와 같은 하나-둘-셋이라는 리듬을

생활로서 증거하며 살아갑니다.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고 도와줍니다.

마더 데레사는 삶을 통해서 뛰어난 모범을 보여준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와 함께 마더 데레사와 같은 삶을 살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추위에 떨며 오갈 때 없는 사람을 보고, 한 소년이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담요를 갖다 주었고 이를 본 다른 사람들도 동참하였습니다.

낙태를 시키려고 하는 딱한 처지에 처해 있는 미혼모를 보고,

어떤 여인이 그녀와 태아에 대해 불쌍한 마음이 들었고

자신의 집에 묵게 함으로써 아이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비록 많은 길이 열려져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께서 제시하신 길만을 갑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들지만

그 상태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보고 느끼기는 하는 데 다음에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말장난에 그치고 만다).

기아에 허덕이며 참담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신음하는 희생자들,

자연의 재해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

내면이 황폐하게 된 영혼들,

도시의 뒷골목에서 자신을 파괴하는

약물 중독자들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열려 있을 때 우리는 기아에 허덕이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며

아무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자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했던 일들을

중도에 포기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행동을 한다고 해도 주저주저 하면서 마지 못해합니다.

기도할 때도 열정을 다하지도 충만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남에게 베풀 때에도 상처를 줍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우리가 측은한 마음이 들기는 하나

그것이 너무 일시적이라는 것입니다.

문제투성이인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지고 가야할 짐들이 많고

그래서 동정을 베푸는 것이 피곤한 일이 될 수 있기에

그것으로 구실을 찾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매일 밤 텔레비전을 통해

수많은 어린이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 가슴이 뭉클했던 분위기가 이내 사라져 버립니다.

도와주어야 할 곳이 너무도 많은 상황에서

우리가 빠질 수 있는 위험 가운데 하나는 느낌마저도 거부하려는 것입니다.

딱한 상황들을 너무도 많이 접하게 될 때 우리의 감정은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한 자극들에 무감각해 지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상황은 더 나빠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고통에 눌리어 주저앉아 있을 때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한다고 한들 무엇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라며

의심에 차있을 때(또는 확신을 갖지 못할 때),

나는 예수님께서 항상 해 오셨던 것을 하신다는 것에 희망을 둡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해결책을 주실 것이라고 희망합니다.

아마 예수님은 조용히 마음을 두드리실 것입니다.

“너는 이 모든 것을 혼자서 다 할 수 없지만

그러나 무언가를 할 수 있단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있는

모든 나병 환자들을 치유하시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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