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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믿음의 눈으로/'기쁜 소식'에 대하여
작성자김중애 쪽지 캡슐 작성일2022-05-24 조회수1,148 추천수1 반대(0) 신고

 

'기쁜 소식'에 대하여

우리는,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

이라는 것을 믿고 있다.

하느님은 복음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복음서의 다섯 가지 진리 가운데서

하느님은 어떤 것을 더 강조하고

싶어하실 것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하는가?

이것은 앞장에서 언급한 주제의

재검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서를

'기쁜 소식'으로 읽을 생각이라면,

이 주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복음서에서 하느님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나는 그것을 분명히 읽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하느님의 본질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화를 내시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학자들은 성서에 언급되어 있는

'하느님의 분노'가 하느님의

노여움에 대해 언급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화법의 비유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죄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예수님은 '잃었던 아들'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 비유 속의 아버지(하느님)

고집 센 아들에게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으셨다.

한술 더 떠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랑은 용서를

멈추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진리는,

하느님이 벌을 내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학생들은 그것을 쉽게 이해했다.

내 과목에서 자신들이 낙제를 하면,

낙제를 시킨 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마지못해 그들의

성적을 적어 넣었을 뿐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고 희망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떠나간다면.

그분은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떠나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인생과 사랑이라는

과목에서 낙제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결국 하느님은 서운하지만

우리의 성적을 그대로 기록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선택을

하도록 허용할 것이다.

그분은 원한을 품는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언급하고 싶은 진리는,

하느님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다.

여러분이나 나는 과거의 경력 때문에

또는 미래의 가능성 때문에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그런 식으로

사랑한다면 추억이나 꿈을

사랑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 인간 조건이

나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성 바오로는 예수님의 자애로움이

주된 특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의 나약함을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욱 사랑한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신은 사랑이요,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신 뒤에 성서 속에서

자신의 사랑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를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랑에 대한

주된 반응은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예수님이 '최후의 심판'

묘사할 때,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우리가 한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신에게 한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요컨대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형제이고 자매이며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을 강조하신다.

우리는 피보다 훨씬

강한 것으로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삶에 동참하고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는

실제로 우리 각자 안에 거처하신다.

성서의 '기쁜 소식'의 또 다른

강력한 메시지는 하느님의 섭리가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는 확신이다.

예수님은 들의 백합과 공중의 새들을

돌봐 주는 아버지가 우리를

돌보아 준다고 말씀하신다.

때론 하느님이 우리의 성장을 위해서

우리에게 도전할 때도 있다.

우리의 낡은 형태의 믿음이

새롭고 좀더 깊은 믿음이 다시

태어나도록 죽게 될 신앙의

위기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련의 순간에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믿을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손을 놓고

우리의 삶을 마음대로 하도록

하느님께 맡길 수 있다면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복음서에는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운명을

타고 났다는 깊은 확신이 있다.

하느님은 자신의 집에 우리 각자를 위해

특별한 장소를 마련해 놓았다.

영원한 만찬 식탁 위에 놓인 명패 중

하나에는 여러분의 이름이 씌여있다.

우리는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무시무시한 죽음의 복도를

지나가야 하지만,

우리는 먼지로 돌아갈 운명을

타고난 단순한 먼지가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자신의 은총의 초대를 받아들이면,

자기 집에서 우리와 함께

살 것을 약속했다.

우리는 영원히 행복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이러한 진리들은

신앙의 개요와 '기쁜 소식'

요약을 형성한다.

최근에 누군가가 신앙 속에서

자라났으나 신앙을 포기한

사람들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을 포기한 이유를 믿기가

너무 힘들어서가 아니라

'너무 쉬워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에 대한

가장 커다란 도전이다.

복음서가 '기쁜 소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정도는

우리가 하느님과 그 '말씀'

얼마나 진지하게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믿음의 보다

깊은 뿌리를 찾아내야 하고,

생명의 주님이 우리의 뿌리에

비를 내려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든가,

아니면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 두 가지는 모두 믿음의 판단이다.

그러나 사랑의 하느님을

믿는 것이 꿈에 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음의 반대되는 행위를

악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믿음의 눈으로」

(존 파웰지음/ 정성호 옮김)

-성바오로 펴냄-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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