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요한의 제자들은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2-07-30 조회수1,305 추천수2 반대(0) 신고

의인의 삶이란 어떤 삶일지? 돈이 많거나 혹은 명예가 있거나 혹은 정치적으로 유명세를 달리거나 그런것은 아닌것 같아요. 오직 주님을 믿고 주님만 바라보고 가는 삶이 진정으로 주님이 바라시는 의인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제부터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요셉수도회 홈페이지에서 연결하여서 신부님의 글을 퍼서 나르는데 어제도 연결이 않되었고 오늘도 않되었습니다. 어제는 빠다킹 신부님의 사이트에서 신부님의 글을 발견하여서 신부님의 글을 옮길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연결이 않되어서 다시 빠다킹신부님의 사이트에 들어가서 찾아보았지만 그러나 그곳에서도 신부님의 글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참 난감하였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공지를 하였지요 옮길 수 없을 것 같다구요. 그래서 다시금 다른 방법을 찾아 보았습니다. 궁하면 통한다고 신부님의 글을 달리 운영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찾아서 오늘도 보낼수 있었습니다. 의인의 삶이 특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사랑하고 측은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서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우선 제가 실천할 수 있는 의인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른 생각과 바른 마음으로 바르게 살아가는 것도 의인의 삶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헤로데가 자신의 동생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 같이 살아가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옳은 소리하여서 감옥에 들어가게 되고 끝내는 불쌍히 죽는 요한의 죽음 또한 의인의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이 보기에는 요한의 삶이 너무 불쌍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의인의 삶은 일반인의 삶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주변이 괴롭히고 이 땅에 발을 딛지 못하도록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인가? 땅에 속해 있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어찌보면 왕따를 당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저렇게 사는 것이 절망적인 상황 같기도 합니다. 요한의 죽음을 보면 그렇습니다.

 

너무 불쌍히 죽어간 것입니다. 저렇게 살아서 좋은 것이 무엇일까? 행복했을까? 즐거움이 있었을까? 즐거움, 삶의 만족 혹은 행복, 삶의 모든 것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요한보다 더 불행히 죽어가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어찌 보면 요한은 죽음의 고통을 한순간에 당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주님은 아주 극심한 고통 속에서 당신의 죽음을 맞이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만족, 행복, 이것으로 주님에게 만족한 삶인가? 라는 것으로 갖다 붙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길을 걸어가신 분입니다. 어찌 보면 인간의 삶을 포기하고 살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요한도 어찌 보면 인간의 삶을 포기하고 살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하늘에서는 그들의 삶을 보면서 나름 모든 관심과 사랑의 눈으로 그들에게 하나 하나에 집중하고 계십니다. 요한의 삶이나 주님의 삶은 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그러나 영혼은 하늘에 닿아 있는 삶이 요한의 삶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그의 죽음을 받아 들이고 또한 그가 어찌 죽을 것이라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간 인간이 요한입니다.

 

영혼의 삶을 살아가는 요한의 삶과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이 어떤 죽음일지 미리 알려주는 그런 죽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괴로움을 이야기 합니다. 그 괴로움이 어떤 괴로움인가? 그것을 잘 살피고 나의 영혼의 방향을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과 돈 명예의 부재 혹은 나의 것과 바라보는 것의 차이로 인한 상대적인 Gap으로 오는 괴로움인가? 아니면 하느님을 향한 걸음 속에서 오는 괴로움인가? 그것을 잘 식별하여서 나의 길을 걸어가야겠습니다. 아멘

 

참회의 순례

프란치스코 교황의 캐나다 사도 순방의 특이한 점은 캐나다 원주민을 향한 구체적인 친밀함의 몸짓이다.

Andrea Tornielli / 번역 이시권

10여 년의 재임기간 동안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도 순방을 “참회의 순례”라고 묘사한 적이 없었다. 교황이 지난 7월 17일 연중 제16주일 삼종기도 말미에 언급한 이 표현은 이번 캐나다 사도 순방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번 순방은 기본적으로 한 나라를 방문하는 것도, 가톨릭 공동체와의 만남을 주된 목적으로 하지도 않는다. 교황의 캐나다 사도 순방은 그 땅에 살면서 식민주의의 결과를 고스란히 겪었던 원주민들에게 구체적으로 친밀함을 보여주는 몸짓이다.

식민주의의 폐해 중 하나는 이른바 “기숙학교”에서 자행된 원주민 문화 말살 시도였다. 이러한 기관들은 원주민 아이들을 가족과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가혹한 통제 아래 “교육”하고 “가르치려” 했다. 아동 사망률이 높았던 이 학교들은 캐나다 정부에 의해 설립되고 자금을 지원받았지만,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그리스도교 종교단체가 위탁 운영했다. 

최근 들어 치유와 화해의 여정이 시작됐다. 그 여정의 첫걸음은 지난 3월 말과 4월 초 교황청에서 있었던 프란치스코 교황과 캐나다 원주민 대표단과의 만남이다. 교황은 퍼스트 네이션(First Nations)·메티스·이누이트 등 3대 캐나다 원주민 대표단을 따로 그리고 함께 만났다. 교황은 발생한 일에 대해 “분노와 부끄러움”을 표명했다. 원주민들은 환대받는다고,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들은 교황이 캐나다에 직접 와서 사과하길 진정으로 원했다.

따라서 교황의 이번 사도 순방을 이해하는 열쇠는 순방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참회의 태도에 있다. 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이 지난 2010년 아동 학대 추문에 직면했을 때 보여준 태도나,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2000년 대희년 동안 “기억의 정화”를 제안한 것과 같은 태도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기억의 정화를 “과거와 현재의 그리스도인이 저지른 잘못들을 인정하는 용기 있고 겸손한 행위”로 정의했다. 그 행위는 “신비체 안에서 우리를 서로 결합시켜 주는 유대 때문에, 우리가 비록 우리를 앞서 간 이들의 과오와 잘못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책임이 없고 그 심판은 오직 모든 이의 마음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 맡겨 드린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희생자와 유족의 입장이 되어 경청할 줄 알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이해하며, 역사적 분석이나 냉담한 통계가 아닌 친밀한 몸짓으로 응답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따라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겸손하게 용서를 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교회의 목자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만나고 안아주기 위해” 캐나다를 방문한다.

 

 https://www.vaticannews.va/ko/church/news/2022-07/pope-francis-penitential-pilgrimage-canada-indigenous-indigenous.html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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