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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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2-07-29 조회수1,468 추천수2 반대(0) 신고

올해 부활절 서울 대교구 성구가 라자로야 나오너라 입니다. 그것은 코로나로 인해서 사람들이 성당에 미사 참례를 못하는데 이젠 성당으로 나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구를 지금 다시 생각하여 보면 과연 왜 라자로를 말하였을까? 입니다. 그런데 라자로는 소생하였습니다. 주님은 죽은 라자로를 소생 시킵니다. 소생은 본래의 모습에서 죽었다가 본래의 모습으로 살아난 것을 말합니다.

 

부활한 주님은 처음 부활하신 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지요. 변화된 주님의 모습이 부활이라면 소생은 본래의 못습으로 살아난 것을 소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부활절에 라자로를 부른 것입니다.

 

라자로는 주님의 가장 친한 친구 같습니다. 그런데 그 친한 친구의 죽음을 주님은 목격하십니다. 사람들이라면 눈물을 흘리면서 다들 좌절감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 하였을텐데 그런데 그렇지 않고 주님은 너의 오빠는 살아날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마르타는 당신은 부활이요 생명이시다고 신앙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라자로를 살리시는 장면이 오늘 복음에서는 나오지않았지만 왜 살리셨을까? 그것은 당신이 죽음 이후에 당신도 당신 힘으로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을 인간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당신의 부활 사건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지요. 그리고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것은 인간도 예수님의 힘으로 인해서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 입니다. 따뜻한 환대가 답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부터 부름을 받으려면 따뜻한 환대가 답이고 길입니다. 주님과의 절친이라는 것은 따뜻한 환대와 친교가 그 상징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도 나를 부르십니다. 원석아 나오너라. 원석아 일어서거라.. 내 속에 주님의 영을 깨우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나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말입니다. 원석아 일어서거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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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복음에 어긋나는 태도에 대한 용서 구하기

교황청 홍보부 편집국장이 캐나다 사도 순방 첫날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동과 발언, 원주민과의 만남의 의미를 살펴본다.

Andrea Tornielli / 번역 이시권

원주민과의 만남은 캐나다 사도 순방의 첫 번째 공식일정이었다. 교황 메시지의 핵심이자, 보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머나먼 여정을 감행하게 된 이유가, 캐나다 땅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처음 한 말 속에 담겨 있었다. 

교황은 칠고(七苦)의 성모님 성당이 있는 매스쿼치스 원주민 공동묘지를 찾아 말없이 기도한 후 ‘베어 파크 파우와우 그라운드’ 야외 행사장에 모인 캐나다 전역의 원주민 대표단에게 연설했다.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여기 온 이유는 여러분 가운데에서 참회의 순례의 첫걸음이 다시 용서를 구하는 일, 정말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다시 한번 드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원주민을 탄압하는 열강들의 식민화 사고방식을 지지했던 방식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죄송합니다. 특히 당시 정부가 추진한 문화적 파괴와 강요된 동화정책에 교회와 수도회의 많은 구성원이 무관심한 태도로 협력한 방식에 대해서도 용서를 구합니다.”

이 학교들은 캐나다 정부가 설립하고 자금을 지원했지만, 대부분은 그리스도교 단체가 위탁 운영했다. 가족과 뿔뿔이 흩어진 수많은 아이들이 “신체적, 언어적, 심리적, 영적 학대”를 겪었다. 많은 아이들이 열악한 위생과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토록 오랫동안 교황을 기다린 원주민들이 환영한 발언에는 분명한 판단이 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이 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어긋나는 처참한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식민주의 시대는 물론 훗날 기숙학교가 따라야 할 정책과 태도에 식민화 사고방식이 계속 영향을 미치던 시기에도 복음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당시에도, 역사적·문화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원주민의 전통은 멸절이 아니라 환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식별하고 이해하는 것이 가능했다. 신앙은 다른 토착문화 안에서 제안돼야 하지 그들의 문화를 파괴함으로써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수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저지른 폭력은 예수님의 증언으로 이미 심판받았다. 예수님께서는 미움이 아닌 사랑을 가르치셨고, 무고한 희생자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역사의 모든 희생자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셨다. 

문화적 파괴와 동화정책이 자행되던 당시에도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것이 가능했다. 파라과이의 ‘식민지 정착촌(Reducciones)’이나 중국에서 선교한 마테오 리치 신부의 태도에서 볼 수 있듯 토착문화를 존중했던 고대 복음화의 예를 생각해보라.

교황이 보여주듯 겸허하게 경청하는 자세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캐나다 원주민들의 말대로 수백년이 지나도 치유되지 않는 상처가 있음을 자각하면서 말이다. 

물론 캐나다 땅에서 수백년 동안 수많은 선교사들이 묵묵히 이룩한 선익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실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한 유일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응답은 독특한 식별이나 역사적 분석이 아니다. 아직도 기숙학교에서 벌어진 일의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시신이 묻힌 곳조차 알지 못한 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을 마주하면 침묵을 지키고, 기도하고, 경청하고, 껴안고, 용서를 구할 수밖에 없다. 휠체어를 탄 고령의 교황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교황은 “4개월 전 바티칸에서 있었던 원주민 대표단과의 만남을 기억한다”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당시 저는 원주민 아이들, 특히 불행하게도 기숙학교에서 더 이상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이 겪은 고통을 상징하는 두 켤레의 모카신(원주민 전통신발)을 받았습니다. 캐나다에 오면 그 모카신을 돌려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 모카신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연설을 마친 다음 그것들을 돌려드릴 것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두 켤레의 모카신은 저에게 슬픔과 분노와 수치심을 생생하게 되살려줬습니다. 그 아이들에 대한 기억은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그것은 모든 아이들이 사랑, 명예, 존경으로 대우받을 수 있게 행동하라고 우리를 일깨웁니다.”

교황은 “이런 트라우마들은 관련 주제가 떠오를 때마다 어떤 식으로든 다시 살아난다”고 말했다. “오늘 우리의 만남이 옛 기억과 상처를 다시 떠오르게 할 수 있고, 제가 말씀드리는 동안에도 많은 분들이 불편을 느끼실 수 있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망각은 무관심으로 이어지므로 기억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생명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엘리 비젤).”

기숙학교에서의 파멸적인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충격적이고, 분하며, 고통스럽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다. 

 https://www.vaticannews.va/ko/pope/news/2022-07/request-for-forgiveness-for-attitudes-incompatible.html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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