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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9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7-28 조회수830 추천수1 반대(0) 신고

 


마르타와 마리아와 라자로는 형제간으로, 예루살렘과 가까운 베타니아에서 살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 열렬히 환대하였으며, 마르타는 정성껏 시중을 들고, 마리아는 그분의 말씀을 경건하게 들었다.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셨고, 그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셨다.

 

본디 729, 오늘은 성녀 마르타 기념일이었으나, 올해부터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로 변경되었다(교황청 경신성사성, 2021121일 교령).

 

새 전례문의 번역은 주교회의 2021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 승인되었으나, 사도좌의 추인을 받지 않았기에 매일미사7월 호에는 기존 전례문을 그대로 실었다. 그런데 매일미사7월 호 인쇄 직후에 새 전례문의 우리말 번역 추인 교령(교황청 경신성사성, 2021419일 교령)을 전달받았기에, 매일 미사 고유 기도문과 홈페이지에는 새 전례문으로 바꾸어 수록한다.

 

 

 

 

 

 

1독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7-16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9

9절에선 하느님 아들의 강생을 논한다. 하느님의 아들을 수식하여 외아들이라 한다. 요한계문헌에선 하느님의 하나뿐인 아들이라 하고 공관복음에선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한다. , 수식어 모두, 하느님과 예수의 관계는 극적 독보적이라는 것이다.9.14절에 나오는 세상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이다.

 

10

10절은 예수의 죽음을 대속사건으로 본다. 아울러 이 사건은 하느님 사랑의 발로라고 풀이한다. 요한 1서의 경우 1.7;2.2; 3,5.16; 4.10에 대속신앙이 나타난다.

 

 

12

12ㄱ절은 하느님을 직관한 양 설처대는 영지주의 이단자들을 겨냥한 반론인 것 같다. 12-13,16절은 하느님과 사랑하는 이들의 상호내주를 말한다.

 

14

구원자존칭은 신약성경의 경우 예수님을 가리키기도 하고 하느님을 가리키기도 한다. “세상의 구원자라는 표현은 신약성경을 통틀어 오직 요한계 문헌에만 두 번 나온다. 14절에서는 무슨 뜻으로 예수를 일컬어 세상의 구원자라고 했을까?

 

예수는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신 분,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신 분이라는 뜻이다.

 

종교사적으로 볼 때 칠십인역에서는 하느님을 구원자라고 했다. 헬라-로마 문화권에서는 임금 또는 황제를 그렇게 불린다, 일례로,117~138년에 통치한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를 세상의 구원자라고 불린다. 헬라 종교계에서는 신들에게도 같은 존칭을 사용했다. 예로, 치유의 신 이스클레피오스를 구원자라고 했다.

 

 

 

 

 

 

 

 

복음

<주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9-27
그때에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19

조문객들을 가리키지만 문맥상 중요한 역할을 한다. , 판단하는 군중으로서 그리고 목격증인 및 믿는 자들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에는 장례식 후에도 일주간 동안 상가를 방문하여 유족들을 위로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런 위로행위를 일종의 이웃사랑 실천으로 여겼다.

 

20

관상적인 마리아의 활동적인 마르타에 대한 전통적 생각이 반영된 듯하다.

 

21

마리아도 똑같은 말을 했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비난이나 불평 또는 죽음을 막을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 등을 드러내는 의미는 아니다. 슬픔 가운데서도 살아 있는 믿음을 드러낸다. 라자로가 죽어갈 때 마르타와 마리아는 이런 말을 주고받았으리라 여겨진다.

 

22

하느님의 결속된 예수를 믿는 마르타의 신앙이 표현된다. 예수의 권능적인 도움에 대한 신뢰도 내포한다.

 

23

죽은 라자로를 되살리겠다는 예수의 원의가 시사된다. 하지만 마르타의 대답에서처럼 종말 부활신앙의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24

종말 부활에 대한 믿음은 예수시대에도 이미 군중들 가운데 퍼져 있었다.

 

25

형상어로 표현된 예수의 자기계시다. 예수는 자기 자신을 우선 부활로 계시함으로써 마르타의 미래적 시선을 현재 자기 자신에 집중시킨다. 예수 자신이 바로 부활이니 마르타는 종말 부활신앙을 이제 예수 자신에게서 찾으라는 것이다. 예수는 또한 자기 계시능력을 생명으로 계시함으로써 믿는자 모두의 시선도 자기 자신에로 집중시킨다.

 

생명부활의 의미를 내용적으로 좀더 분명히 밝힌다. , 생명의 개념은 부활을 구원사건으로 명시한다. 따라서 예수는 여기서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유보된 능력, 죽은 자를 살리는 힘을 부여받아 생명을 가진 자로서 증언한다. 예수의 이 계시적 증언이 죽은 라자로의 소생으로 입증되고, 믿는자는 계시되는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26

믿음에 대한 촉구와 참된 생명, 곧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에 대한 약속이 언급된다. 믿음 안에서 육체적 죽음의 한계를 이녀낼 수 있고, 지상의 삶은 예수로 인해 새로운 차원에 이른다는 뜻이다. 예수는 계시자일 뿐 아니라 또한 참된 생명을 주는 구원자다. 그리고 예수는 종말에 죽은 자를 살리는 자로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구원을 주는 자로서 계시되고, 바로 이런 계시자를 지금 여기서믿어야만 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는 죽음의 세력을 이겨내고, 예수로 인해 이루어진 라자로의 소생은 바로 이 승리의 표징이다.

 

계시된 예수의 인격과 말씀

 

27

예수의 물음에 대한 마르타의 대답은 예수의 계시를 이해했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 계시자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마르타의 고백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로서 유다인들의 메시아 대망이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뜻하고, 또한 하느님의 아들로서 유다인들의 그 기대를 뛰어넘는 메시아, 곧 하느님과 유일무이한 결속관계를 지닌 메시아임을 의미한다.

 

세상에 오시기로 된이란 표현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구원자로서 표시한다. 마르타의 이 고백은 문맥상 예수의 자기계시에 대한 결정적 응답이요 절정에 달하는 신앙고백이다. 역사상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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