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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 묵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사이비 이단 클리닉
작성자이정임 쪽지 캡슐 작성일2021-04-15 조회수1,450 추천수2 반대(0) 신고

제7회 요한 묵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사이비 이단 클리닉 (가톨릭평화방송)



 


▶ 요한 묵시록에서 숫자 3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숫자 7은 완전성을 상징하고 숫자 10은 충만함, 숫자 4는 동서남북, 사방 천지를, 6은 7에서 1이 빠진 수라서 부족한 수, 하느님을 대적하는 수처럼 많이 이용되죠. 그리고 많이 등장하는 '바빌론'은 사실은 요한이 그 편지를 쓸 때 로마의 박해 시기였기 때문에 자기를 박해하는 사탄과 같은 그룹 또는 집단 또는 나라를 로마라고 표기할 수 없는 거예요. 직접적으로 로마라고 표기했다가 걸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쓰기는 바빌론이라고 쓰고 읽기는 전부 다 사실 로마라고 읽었던 거예요.

 

▶ 구약성경, 신약성경 전통 안에서 성경이 쓰일 때 각 성경마다의 '문학 장르'가 있습니다. 우리 예전에 국어 시간에 배웠었죠. 시, 수필, 산문 등 여러 장르가 있잖아요. 그 글을 읽을 때는 그 글의 성질에 맞는 자세로 그 글을 읽어야 됩니다. 예를 들어 백분 토론 볼 때, 개그콘서트 볼 때 장르마다 시청자의 마음이 다르죠.

 

개그콘서트 같은 예는 프로그램에서는 약간 허황되고 과장된 모습들이 나올 수가 있지만, 시사프로 그런 데서는 그런 모습이었다가는 난리가 나죠. 다른 거예요. 구약성경, 신약성경 안에서도 예언문학과 묵시문학의 전통이 있는데 사실은 요한 묵시록은 이 두 개가 섞여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요한 묵시록을 읽을 때 예언 문학 전통과 묵시문학 전통의 그런 지식을 가지고서 읽어야 되거든요.

 

▶ 예언? 계시? 비슷한 듯 다른 말?

예언 문학 전통이라는 것은 쉽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서와 관련이 된 것인데 기본적인 구조는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예언자가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을 신탁의 형식으로 하느님의 심판을 사람들에게 예고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예언 문학 전통의 돌출되는 결론은 '똑바로 살아라!' 곧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중점입니다.

 

반면에 묵시문학 전통은 기원전 2세기, 1세기 이때부터 오는 건대 예언 문학 전통 이후 등장한 묵시 문학 전통은 살짝 초점이 다릅니다. 묵시문학은 환시, 뭔가를 본 거죠. 뭔가를 본 그 환시를 경험한 사람이 하느님의 심판을 예고하지만 동시에 본인이 직접 목격한 환시의 의미들을 설명해 줍니다. 회개를 촉구하면서도 한발짝 더 가는 거죠. 환시 속에 담겨 있는 의미들을 풀어서 설명해 주는 묵시문학 전통이고요.

 

그래서 묵시문학 전통에서 원하는 초점은 지금 고통받고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 희망을 주는. 지금 너희들이 박해를 받고 어려움이 있겠지만 곧 하느님이 마련하신 때가 올 것이라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가 있어요. 그 안에 묵시문학을 표현할 때 방법론으로 상징 이런 것들이 들어가는 거죠.

 

애매한 숫자, 애매한 인물, 애매한 동물 이런 것들이 결국에는 묵시문학에서는 하나의 장치예요. 왜냐하면 그거 있는 그대로 다 쓰면 예를 들어서 뿔 달린 용은 누구입니다. 이러면 끌려가서 맞는 거죠. 그 당시에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핍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애매하게 그리고 각 시대의 다양한 이야기들로 섞어놓아 숨은 뜻을 가지고 있는 요한 묵시록을 사이비, 유사종교에서는 교묘하게 이용해 신자들을 현혹하고 있는 것이죠.

 

▶ 평상시는 신경 쓰지 않다가 뭔가 기대고 싶을 때면 숫자 같은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그렇단 말이죠.

▶ 그러니까 그런 미신, 숫자, 타로, 영성을 해칠 수 있는 것들을 주의하라고 하는 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 말씀에 따라서 살아야 하는데 숫자가 주는 의미에 따라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거든요. 잘못하면.

 

▶ 운명론이죠. 마치 내 운명이 정해진 것처럼. 근데 우리 신앙의 가장 큰 핵심은 자유로운 나와 자유로운 하느님이 각자 인생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는 희망이 열려 있는데 '운명론'은 가둬 놓는 거죠.

 

▶ 요한 묵시록 속 숫자 역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게 맞나요?

▶ 과도한 의미 부여가 위험할 수 있다는 거죠. 공부는 열심히 해야 하지만 기초적인 지식 없이 그 의미만 배우는 것은 금물.

 

▶ 오히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요한 묵시록 속 희망의 의미 '오십시오, 주 예수님!' 하면서 간절히 오심을 기다려서 그분이 오신 후 싹 다 갈아엎어 주시기를~ 그런데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에서도 정말 지독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예를 들어 코로나로 인해 너무나 암울한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이거를 정말 싹 다 갈아엎어 주실 주님이 빨리 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그런 희망을 아마 그 책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지 않을까?

 

▶ 사람들이 힘들고 아플 때 사이비에 빠질 수 있는 확률이 높다는 거죠.

▶ 그런 더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힘들고 고달프고 괴롭고 그럴 때에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없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런데 사실 그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꺼내놓을 수 있는 자체가 어렵지만 이게 누구나 다 겪는 거구나. 이걸 다 겪으면서 앞으로 나가는 거구나 하는 걸 배우고 이렇게 하게 되는데, 그걸 하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다가 어느 날 이상한 곳으로 가는 게 많은데 그런 면에서는 누구에게? 특히 신부님이나 수녀님이나 성당의 어떤 동료들에게, 형제자매님들에게 열어놓을 수 있는 것이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 저는 본당에서 청년회하고 교리교사만 했지 교구에 있는 청년회 연수에 가 본 적이 없어요. 어렵게 참석했던 2박 3일의 청년회 연수를 통해서 힘든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 다 같은 고민과 힘듦이 있네 ...라는 생각에 눈이 번적 뜨이고 힘이 됐어요.

 

▶그러니까 사이비 종교에 청년이 많은 이유가 뭐냐 하면, 청년이 청년을 부르거든요. 그래서 불러서 거기에 가 보면 진짜 나와 똑같은 고민, 아픔들을 가지고 있는 청년들이 거기 많은 거예요. 그러면 이제 성경이 옳고 그름은 이제 두 번째가 되고 그 공동체 속에서 위로와 위안을 받는 그 좋은 느낌들을 가지고 가면서 거기에 점점 빠져들게 되는 거죠.

 

◆ 이 요한 묵시록을 신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는 오늘의 한 줄 결론으로!

 

▶ 요한 묵시록은 희망이다.

너는 지옥에 갈 거야, 너는 하느님께 벌받을 거야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위로를 주는 책이다. 그래서 관련된 가톨릭 서적을 찾아서 읽으시면 정말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 요한 묵시록은 위로와 희망,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지금 현재 내가 고통받고 있고 우울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음에도 사실 요한 묵시록이 쓰인 배경이 그렇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쁨과 희망과 위로를 실현해 주실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 요한 묵시록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하느님께서 '내가 곧 간다! 문을 두드릴 테니 기다려서 나를 반겨라.' 문 앞의 주님이에요. 그분이 나에게 오셔서 싹 다 ~ 갈아엎어 주실 테니까 설렘으로 그분을 기다리는. 그래서 신앙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우리 모두 설레는 마음을 갖고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

 

▶ 요한 묵시록은 위로, 희망, 기쁨, 설렘을 더해 평화를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 묵시록은 불안한 마음을 평화로 가져갔을 때 정말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주시는 모든 게 이루어지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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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요한묵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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