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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활 제7주간 화요일]영원한 생명 (永生) (요한17:1~3)
작성자김종업 쪽지 캡슐 작성일2020-05-26 조회수1,629 추천수0 반대(0) 신고

부활 제7주간 화요일(공동번역성서)

 

 영원한 생명 (永生)

(요한17:1~3)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때가 왔습니다아들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어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여 주십시오. 2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사람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고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게 되었습니다. 3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아멘

 

오늘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과연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어떠한 이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영원한 생명은 지금도 살 수 있는 삶인지 아니면 우리가 죽고 부활한 뒤에나 오는 것인지를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永生)을 한 마디로 정의해 주십니다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영원한 생명 참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입니다그게 무슨 뜻입니까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는 말이 이해가 가세요?

사람들은 영생’ 하면 대개 영원히 사는 것 을 생각합니다즉 부활과 영생을 함께 생각하여 죽은 자가 다시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는 몸으로 존재하는 것을 영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하지만 이러한 이해에는 문제가 있습니다현재와 영생을 별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결국 현재는 나중에 주어질 영생을 위해 예수를 믿어주는 과정으로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영생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잘못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다시 보면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영생은 영원히 죽지 않고 사는 것이다’ 라는 설명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물론 신자는 부활하여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영원히 산다는 것은 신자에게만 주어지는 일이 아닙니다세상 모든 자들이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요한5:29) 그 때가 오면 선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고 악한 일을 한 사람들은 부활하여 단죄를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 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뜻합니다그런데 선한 일을 한 사람과 악한 일을 한 사람이 모두 다 부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24:15) 그리고 저를 고소하는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하느님을 믿으며 올바른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다 같이 부활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활은 선한 일을 행한 자나 악한 일을 행한 자 모두에게 주어지는 일입니다다만 생명이냐 죽음이냐가 다를 뿐입니다중요한 것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태로 영원히 존재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부활은 부활이되 생명의 부활이 있는 반면 죽음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때문에 영생을 단지 시간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영생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영생복락’ 이라는 말 좋아하시지요영생은 복이며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도대체 영생이 무엇이기에 신자에게 복이 된다는 것일까요?

’ 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한 피조물들이 하느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 성실하게 존재하기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충만한 하느님의 생명력을 말합니다그러니까 쉽게 말해 하느님의 창조의 목적에 맞게 하느님의 뜻대로 존재하고 살아가는 피조물들에게 충만하게 쏟아 부어지는 하느님의 은혜를 ’ 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창조주 하느님께 순종하며 하느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존재의 상태를 영생’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그래서 신학에서는 영생을 다가올 세대의 생명’ 이라고도 하고 신적 생명 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그렇다면 성도의 영생은 하느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그 분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라 정의를 해도 되겠지요그런데 그 삶은 하느님의 크심과 그 분의 성품과 그 분의 능력을 알며 자기 자신의 무력함을 아는 것에서 비로소 격발이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주님은 영생을 가리켜 참되시고 오직 한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피조물 중 도덕적 피조물인 천사들과 인간들 사이에서 불순종의 반란이 일어났습니다성경은 그것을 ’ 라 합니다죄는 영생의 삶을 파괴해 버렸습니다영생은 순종을 전제하는 삶인데 불순종이라는 죄가 들어오면서 도덕적 피조물들에게 주어진 그 영생이 파괴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와 허물로 죽었다’ 라고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모든 인간은 하느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대신에 자신을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하느님마저도 자신의 종으로 삼아 사는 자아숭배의 삶을 택해 버렸기 때문입니다그게 바로 죽음입니다.

그러한 자아숭배의 삶 불순종의 삶을 사는 죽은 자들에게 다시 생명을 허락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그리고는 그들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다 도말(塗抹)하시고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의 삶 즉 영생을 완벽하게 살아내시고는 그 삶을 하느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은혜의 선물로 전가시켜 주셨습니다그래서 이제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죄 없는 삶 순종하는 이의 삶인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 된 것입니다.

 

(요한6:51,54)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내가 줄 빵은 곧 나의 살이다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의 덕분으로 영생을 살게 됩니다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 여전히 이 죄악의 세상에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일정 기간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들은 이미 영적으로 죄와 무관한 사람들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온전히 순종한 자들이 되어 영생을 소유한 이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육신의 몸과 죄악의 세상의 영향 아래에서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영생을 소유한 자들이 여전히 죽음의 세상에서 죽음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그런데 그 상태에서 어떻게 영생을 삽니까그게 가능한가요?

이제부터 고민을 좀 해 보자고요영생은 죄가 없는 상태이며 순종의 상태를 말합니다영생은 하느님의 성품이 투영된 신적생명이며 다가올 세대의 생명입니다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영생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그런데 현실에서 우리는 영생의 삶과는 전혀 다른 불순종과 죄악의 삶을 삽니다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쫓아 살려고 하기는커녕 하느님을 종으로 부리며 우리의 뜻에 그 분의 뜻을 맞추려 합니다그건 순종이 아니잖아요순종의 범주를 벗어난 것은 영생일 수가 없습니다그런데 성경은 우리 성도에게 영생을 살라고 영생을 취하라고 요구를 합니다.

(1디모6:12) 믿음의 싸움을 잘 싸워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시오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그대를 부르셨고 그대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훌륭하게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영생은 이미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하면서 한쪽에서는 영생을 취하라고 강력하게 요구를 하십니다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이를 악물고서라도 순종의 삶을 살아내라는 것인가요혀를 깨물면서라도 죄를 멀리하라는 것인가요만일 그런 것이라면 어느 정도까지 살아내야 영생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까어느 정도까지 순종을 해야 합니까커트라인이 있을 것 아닙니까?

(신명18:13) 너희는 한 마음으로 너희 하느님 야훼만 섬겨라.

(야고2:10) 누구든지 계명을 다 지키다가도 한 조목을 어기면 계명 전체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이게 바로 하느님이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의 커트라인입니다그렇다면 영생을 취하라는 말이 과연 완전한 순종과 완전한 율법지킴을 향하여 분투하며 애를 쓰라는 말일까요아닙니다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영생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과 그 하느님을 이 땅에 계시하러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이 세상에서 죄 없는 자로 순종한 자로 영생을 살 수 있는 길은 이렇게 불가능하고 무력한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내신 후 우리 성도들에게 무상으로 전가시켜 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성도가 이 세상에서 영생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라 칭하신 곳이 또 있습니까여기 한 곳입니다예수님께서 굳이 당신을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고 자기계시를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영생은 메시아이신 예수의 오심의 이유를 알고 그를 보내신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것임을 알려주시기 위해 당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 라 칭하신 것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 를 아는 것이 永生을 사는 유일한 길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영생은 환경과 조건이 변하고 그로 말미암아 행복과 평안이 오는 그런 것 혹은 우리의 삶이 순결하게 업그레이드 되어 경험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고 무력한 자신의 삶을 폭로당하며 면목 없이 사는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다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모든 죄가 사해졌고 완전한 순종의 사람으로 여겨주셨다는 믿음으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비록 이 모양이지만 하느님의 은혜의 힘에 의해 반드시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완성이 될 자신의 종말적 현실을 굳게 믿는 것을 영생이라 하는 것입니다아울러 자신이 이 죄악 된 세상에서 겪고 있는 모든 상황들이 자신에게 영생을 주신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주관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 상황에 순응하는 삶 그것이 바로 영생입니다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현실을 인정하고 이겨내는 것 그것이 영생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영생을 사는 이들은 그렇게 행복하고 편안하고 안심이 되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면목 없고 죄송하고 몸 둘 바를 모르는 그러한 자기 인식 속에서 오직 하느님의 은혜만을 꼭 붙들고 사는 그런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철저한 자기부인 속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은혜의 십자가 뒤로 꼭꼭 숨어 버리는 삶이 바로 영생인 것입니다예수님이 이 땅에서 그렇게 사셨잖아요그렇게 영생을 사는 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철저한 자기인식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요한5:24) '정말 잘 들어 두어라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그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섰다.

(요한3:14~16) 14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요한3:36)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의 영원한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이렇게 죄인들은 자신들의 영생에 전혀 기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정을 하고 오직 하느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의 공로만을 믿고 의지하는 영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13:48) 바울로의 말을 듣고 이방인들은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작정된 사람들은 모두 신도가 되었다.

영생이 누구의 손에서 작정이 된 것이지요하느님입니다영생은 창세전에 하느님에 의해 계획되고 작정이 된 것입니다그 말은 하느님이 당신의 백성들의 순종의 삶을 창조이전부터 계획하고 계셨다는 말인 것입니다영생의 시작도 하느님이요 영생의 수여도 하느님의 은혜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디도1:2) 2 우리 종교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져다줍니다이 영원한 생명은 거짓말을 하시지 않는 하느님께서 아득한 옛날에 벌써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요?

 

영생은 하느님에 의해 창세전부터 준비되고 작정된 것입니다그 하느님의 작정이 역사 속에서 실현이 되는 것이 바로 성도의 구원인 것입니다그것을 믿으시면 되는 거예요그게 영생을 사는 삶입니다. ‘영생은 하느님과 그 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뭐 대단하게 이 세상에서 이루어 내려 하지 마세요율법에 묶여 자신을 너무 비하하지도 마세요왜 호세아 선지자가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며 지켜내려 애를 썼던 이스라엘에게 우리가 야훼를 알자 힘써 야훼를 알자’ 고 외쳤겠습니까율법으로는 영생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제사로는 생명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야훼를 알라고 외친 것입니다야훼 하느님을 알고 너희 자신을 알라는 것입니다너희는 절대 율법으로 제사로 선한 삶으로 하느님의 영생을 취할 수 없는 것이니 야훼를 아는 것으로 영생에 이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즉 성경을 잘 지켜서 영생에 이르려 했다는 것은 우리도 잘 알 것입니다율법의 성격이 그렇듯이 성경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예수의 필연성을 십자가의 필연성을 깨달아 알라고 주신 것입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성경에서 영생을 얻으려 하지 말고 즉 그거 지켜서 영생에 이르려 하지 말고 야훼하느님과 그 하느님을 계시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요한5:39~40) 39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 40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성경은 예수의 필연성을 가르치시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 거기에 적힌 것대로 살아내어서 구원에 이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몇 가지 비유를 들어서 영생의 본질에 대해 설명을 해 주셨는데 그 중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영생의 본질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는 것이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이웃 사랑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이웃 사랑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라 영생의 본질에 대한 설명인 것입니다.

(루가10:25~29)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27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28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그대로 실천하여라그러면 살 수 있다하고 말씀하셨다. 29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묻습니다예수님은 율법에 능통한 그 율법교사에게 율법에서는 뭐라 하더냐?’ 하시며 다시 되물으십니다그랬더니 율법교사가 훌륭하게도 신명기 6장의 쉐마로 율법을 잘 요약하여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바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 이라고 아주 잘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네 대답이 옳으니 그대로 행하라’ 고 하십니다거기까지만 보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 이 우리의 몫인 것처럼 보입니다그리고 그것만 잘하면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그러나 끝까지 잘 봐야 합니다이 이야기에는 커다란 반전이 있습니다.

 

그 율법교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즉 자신은 충분히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누가 내 이웃입니까?’ 하고 묻습니다누가 이웃인지 말만해주면 다 사랑해 버리고 말겠다는 기세입니다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이웃을 스스로 규정하고 있었습니다일단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은 절대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도 절대 이웃이 될 수 없었습니다유대인들의 이웃은 자기들과 같은 민족 혹은 자기들의 종교인 유대교를 믿고 자기 민족으로 편입이 된 사람들에 한해 이웃을 삼았습니다그러니까 민족과 종교가 같고 한 가지 뜻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그런 사람들만을 이웃으로 규정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쉬웠습니다그래서 그 율법교사는 자신 있게 누가 내 이웃입니까말만 하세요제가 가서 죽도록 사랑해 버리겠습니다’ 하고 나선 것입니다그 때 주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영생의 본질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루가10:30~37) 30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31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 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32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34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35 다음 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비용이 더 들면 돌아 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36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하여라하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가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을 만치 맞았습니다. ‘반쯤 죽여’ 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헤미다데스’ 는 거의 죽다 완전히 기진하다라는 뜻입니다그러니까 그 강도 만난 사람은 숨만 겨우 쉬고 있는 상태로 완전히 자아방어 능력을 상실한 사람인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당시에 아주 유명한 강도 출몰 지역이었습니다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성전이 있는 곳이었고 예리고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약 만이천명 정도가 살고 있는 성전 섬김이 들의 집단 거주 지역이었습니다그래서 그들을 노린 강도들이 수시로 출몰을 하여 제사장들이나 레위인 들이 마차나 말 등에서 절대 내리는 일이 없었고 도보로 다니는 사람들도 무리를 지어서 다니거나 길에서 멈춰서는 일없이 바삐 오가던 그런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강도들의 미끼가 길에 던져져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길에 넘어져 있는 사람들을 만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불문율처럼 지켜지던 그런 곳이었습니다강도들의 일행이 강도를 만나 신음을 하고 있는 여자나 노약자로 가장해서 길에 누워있는 것이 다반사였다고 합니다그래서 길을 가던 사람들이 길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을 보고서도 그냥 바삐 지나가곤 했던 것입니다그런데 거기에 강도만난 사람이 거의(반쯤죽어서 누워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입니까?’ 를 묻는 율법교사에게 누가 강도만난자의 이웃이냐?’ 라고 되물으시지요그렇다면 지금 예수님은 그 율법교사를 누구에 비유하고 계신 것입니까강도만난 자에 비유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으로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고 그렇게 실행하고 있다고 하는 율법교사에게 너는 누구를 사랑하고 도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네가 바로 은혜와 자비를 입어야 할 강도만난 자’ 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심지어 그는 강도를 만나서 거의 죽어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그게 바로 인본주의에 빠져 율법지킴을 구원의 방법으로 알고 있는 이들의 상태였던 것입니다바오로의 표현을 빌리면 그 상태가 바로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강도만난 자로 비유되고 있는 율법교사는 무엇을 강탈당한 상태라는 것입니까강도만나 거반 죽어있는 자가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자라면 그 강도만난 자는 무엇을 빼앗긴 상태입니까하느님을 잃은 상태인 것입니다하느님을 잃은 자들을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자라고 하니까요하느님만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야 하는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가 뱀(마귀)이라는 강도의 속임수에 속아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죽어있는 상태가 바로 율법주의 유대주의 인본주의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느님을 강탈당한 채 죽어 있는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이 뻗칩니다구약의 율법과 제사를 상징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강도 만나 거반 죽은 자를 보도고 그냥 지나갑니다손도 못 댑니다그건 율법과 제사로는 하느님을 잃고 거반 죽어있는 상태인 강도 만난 자를 절대 도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쳤다고 해서 그들의 매정함을 나무라는 데에만 집중하면 안 됩니다제사장들과 레위인 들은 성전으로 제사를 지내러 가는 길 아니면 제사를 지내고 집으로 내려가는 길이었을 것입니다그들은 절대 부정한 것을 만져서는 안 되는 성전의 섬김이들 이었고 율법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나 마차에서 내리거나 멈추어서 얼쩡거릴 수 없는 그런 위험한 길이었습니다뿐만 아니라 그 강도만난 사람은 강도들의 미끼일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이었습니다그런 상황에서 그 길을 지나는 사람을 반응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는 것은 자비심보다는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우리도 다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그런데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매정하고 매몰찬 자들로 몰아세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이야기의 초점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율법과 제사 즉 행위는 절대 강도 만난 자를 도울 수 없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이웃 사랑은 사람의 행위에서 생산되어 나올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그러한 자에게 사마리아인이 다가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는 길은 유대 땅입니다유대 땅에서의 사마리아인은 개 취급도 못 받았던 사람들입니다심지어 사마리아 사람들은 남 유대사람들의 원수였습니다오죽하면 유대인들은 너무나 장사가 안 돼서 굶어 죽기 일보 직전에도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물건을 팔지 않았을 정도입니다그런데 그러한 위험한 땅에 율법주의의 이방인이자 유대주의의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등장한 것입니다그곳은 율법의 땅의 상징인 예루살렘과 예리고를 잇는 유대 땅입니다그곳은 성전과 그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거주지를 잇는 곳입니다뿐만 아니라 강도들의 땅이며 원수들의 땅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그곳에서 그 누구에게 붙들려도 죽음을 당하게 되는 그런 곳입니다그 율법의 땅 강도들의 땅에 그들과는 전혀 다른 이방인 율법의 화신인 유대인들의 원수가 사마리아인으로 등장한 것입니다자기들의 안위와 유익을 위해서는 거반 죽어가는 이도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 형식적인 율법과 제사의 땅에 진짜 선한 이방인이 원수들의 땅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그리고는 위험을 무릅쓰고 원수를 살려냅니다자신의 목숨을 걸고 원수를 살려내는 것입니다그게 바로 영생이며 그게 바로 구원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죄인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이웃인 예수에 의해 사랑을 받고 섬김을 받아 주어지는 것이라는 구원과 영생의 본질을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자신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도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고 믿는 인본주의의 땅 죄인들의 땅 율법의 땅에 그들과는 전혀 다른 십자가의 삶은혜의 삶을 가지고 원수인 강도 만난 자들을 구원하러 오신 이 세상의 이방인인 선한 예수가 바로 그 사마리아인으로 비유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하느님을 목숨 걸고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우리는 우리의 선한 이웃으로 오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면목 없는 강도만난자의 모습으로 영생으로 가야 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그런데 평생을 인본주의라는 뱀의 아가리 속에서 살아온 죄인들은 예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하느님의 말씀이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그래서 될 수 있으면 자신의 영생에 자기도 뭔가를 기여하고 싶어 합니다그런 이들에게 오직 은혜만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처럼 낯설고 미운 것입니다아니 원수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만일 강도를 만나 예루살렘 길에 쓰러져 있던 그 사람이 조금의 힘이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았을까요절대 안 받습니다왜 치사하게 남의 도움을 그것도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습니까그게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처럼 되어 보겠다고 나선 타락한 죄인들의 속성입니다나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이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게 되었지요반쯤 죽었거든요거의 죽어서 사마리아인이 이리 굴리면 이리 구르고 저리 굴리면 저리 구르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거부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아직도 항복하지 않고 있는 성도들이 바로 그 자리로 해체되어 가는 것입니다전적인 하느님의 은혜만을 의지할 때까지 하느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헤미다네스’ 반쯤 죽여 버리십니다그게 자기부인입니다그게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성도는 이 땅에서 그렇게 반쯤 죽어 이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의지할 수 없고 오직 하느님과 그 분이 보내신 예수만을 의지하여 자신을 내어 맡기는 자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그러한 이들에게 내 뜻 내 꿈 내 비전 내 야망 내 의견 내 주장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그런데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너무 많이 남아있습니다그래서 하느님이 계속 우리를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하여 헤미다네스’ 반쯤 죽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의 은혜만 붙들라고 이 세상의 삶의 원리인 힘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십자가라는 하늘의 삶의 원리를 들고 이 땅에 오신 세상의 이방인이신 예수를 붙들라고 우리를 반쯤 죽이시는 것입니다왜 죽은 자들이 자신들이 죽은 자라는 걸 인정하지 않고 마치 산자들처럼 기고만장하느냐는 것입니다그게 바로 세상에 대해 살아있고 하느님에 대해 죽은 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진짜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느님에 대해 산 자들은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은 하느님 앞에서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티끌처럼 겸손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하느님께서 펄떡 뛰는 당신의 백성을 반쯤 죽여 가시는 것입니다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입니다거부하시면 안돼요.

우리가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져 주라고 당해 주라고 섬겨 주라고 십자가를 지라고 용서해 주라고 요구하시면서 우리를 치유하고 계시는 그 착한사마리아인인 예수의 말씀을 듣고도 이 이방인이 왜 이렇게 낯선 이방나라 말만 하고 있는 거야?’ 하며 계속 거부하다보면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철장으로 반쯤 죽이실 수밖에 없습니다그래야 하느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시키시는 예수님의 치료를 순순히 받게 되는 거니까요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반복하여 외치는 것입니다자기를 부인하라 십자가를 져라’ 조금이라도 살아있으면 안 됩니다그건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의 삶이 아닙니다.

 

(마태18:8-9) 8 '손이나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던져 버려라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 9 또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두 눈을 가지고 불붙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한 눈을 잃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

이 말씀은 성도들이 하느님과 예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것 이외에 그 어떤 것을 의지하고 있다하더라도 다 잘라내시겠다는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그게 팔 다리라도 잘라내신다고 하시는데 하물며 돈 명예 자존심 자식 건강 이런 것은 어떻겠습니까그런 것을 힘 삼아 펄떡 펄떡 뛰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하느님께서 그냥 놔두시겠어요아닙니다하님은 거의 반쯤 죽이십니다반드시 자기 부인을 시키십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는 어절의 진의가 무엇인지 이제 잘 아시겠지요어서어서 우리들의 티끌 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공로만을 꼭 붙드세요그게 이 세상에서 永生을 누리는 자의 올바른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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