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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해성사] 고해성사 다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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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호식 [ jpatrick ] 작성일2016-02-25

고해성사 다시 보기 (1) 자비, 하느님의 영원한 짝사랑

 

 

‘자비의 특별 희년’을 살아가고 있다. 믿는 이들과 믿는 이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가 측량할 수 없는 사랑과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신 얼굴을 바라보고 그러한 아버지의 자비를 우리 역시 살아가도록 초대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체험해야 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과연 어떠한 모습일까?

 

옛날에 어느 망나니 같은 아들을 둔 홀어머니가 있었다. 마음이 비뚤어진 아들은 어릴 적부터 사고만 치다가 커서는 강도들의 소굴로 들어갔다. 두목은 아들에게 자신들의 무리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몇 가지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모든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아들에게 부과된 마지막 시험은 자기 어머니의 심장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심장을 꺼내 달려가던 아들은 중간에 다리가 후들거려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그때 어머니 심장으로부터 들려온 한 마디, “얘야 다치지 않았니?”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라는 책 제목이 있듯이, 자식을 향한 대책 없는 부모의 사랑과 헌신이야말로 한 인간이 이 지상에서 신(神)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본능적이면서도 근원적인 체험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모의 마음은 누군가의 마음과 특성을 닮아 있다. 바로 하느님의 자비이다.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 하느님의 고유한 본질입니다. 바로 그 자비 안에서 하느님의 전능이 드러난다.”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말처럼 그분의 자비는 결코 나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전능하신 당신의 특성이다.

 

루카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당신 생애를 통해 궁극적으로 보여주시고자 하셨던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 주신다. 비록 우리는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데 ‘대상’과 ‘횟수’에 제한을 두지만(루카 18,21.33 참조),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한량없다. 무조건적이다. 그분은 당신이 우리로부터 사랑받으셨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결코 아니다. 비록 사랑받지 못하실 때라도 그분은 ‘언제나’ 사랑하신다. 그분 사랑이 ‘하나의 응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의 자비와 용서는 거저 주는 선물이요, 그래서 ‘은총’인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이유 없는 사랑’이시다.

 

‘자비의 특별 희년’에 우리는 자주 자비로우신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며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라고 요청받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편에서 자비하신 그분을 만나려는 구체적인 실천이 요구된다. 가장 좋은 실천과 체험은 “고해성사를 통한 하느님과의 화해”이다.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과 화해할 때, 우리에게 올해는 ‘자비와 해방을 체험하는 특별한 해’(特別 禧年)가 될 것이다. [2016년 2월 7일 연중 제5주일, 대전주보 3면, 송인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신학원 전례담당 겸 전례꽃꽂이교육원장)]

 

 

고해성사 다시 보기 (2) 손 씻는 빌라도, 죄의식 없는 이 시대의 자화상

 

 

사형수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들 사이에서 폭동이 일어날까 두려워하던 빌라도는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한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마태 27,24 참조)

 

세상 곳곳에서 발생하는 비참함과 불의와 아픔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아파하며 눈물도 흘린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러한 상황을 야기한 원인들과 해결책에 집중한다. 하지만 진정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이내 자기 책임의 꼬리를 자르거나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할 뿐이다. “남들도 다하던데…”, “상사의 지시를 따른 것뿐입니다”, “저는 모르고 한 일입니다.” … 책임을 회피하는 이러한 모습들은 진리와 책임으로부터 달아나려 했던 모든 시대의 죄인들, 곧 빌라도의 그림자는 아닐까?

 

“금세기의 대표적인 죄는 죄에 대한 감각의 상실에 있습니다.”라고 교황 비오 12세가 지적한 것처럼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제와 죄의 상황들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죄 많은 인간들이 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죄에 대한 의식에 대한 경계와 성찰을 게을리 하거나 그 상황에 대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올바로 회개하지 않는 한, 아무리 외적인 법이나 구조와 제도를 바꾼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불완전하여 늘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화해와 참회, 16항 참조)

 

오늘날 죄에 대한 감각(죄의식)이 흐려진 근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하느님께 대한 감각’이 흐려진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고 교회는 지적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인간의 가장 은밀한 안방이요, 인간이 자기 혼자서 하느님과 같이 있는 지성소”(사목헌장,16항)라고 규정한 바 있는 인간의 양심은 인간의 자유와는 절대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양심이 둔화되면 하느님께 대한 감각도 흐려지게 되고 따라서 죄에 대한 감각도 소멸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죄에 대한 건전하고도 합당한 감각을 회복하는 일은 현대인을 위협하는 심각한 정신적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과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진다는 것이요,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되 변명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그 잘못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결정이었음을 인정하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중 하나이다.

 

오늘날 고해성사의 위기를 말하면서 신자들이 고해성사를 기피한다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위기의 핵심은 죄의식의 부재(不在), 곧 죄의식을 갖지 않는 내적 태도이다. 매 미사 때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내 탓이오”를 외치는 신앙인이라면, 고해성사 역시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1요한 1,8) [2016년 2월 14일 사순 제1주일, 대전주보 3면, 송인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신학원 전례담당 겸 전례꽃꽂이교육원장)]

 

 

고해성사 다시 보기 (3) 고해성사, 화해하는 기쁨의 잔치

 

 

어느 더운 여름날, 어떤 사람이 길을 가고 있었다. 그의 눈에 반대쪽에서 또 다른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자전거를 짊어지고 오는 것이 보였다. ‘자전거를 타면 더 빨리 갈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에 그는 자전거를 지고 오는 사람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저는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데요…”

 

실제로 이런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우화(寓話)는 현대인의 신앙생활 특히 고해성사에도 적용해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생길을 더 편하고 더 신나게 달리라고 우리에게 ‘신앙’이라는 자전거를 선물하셨다. 처음에는 자전거 타는 법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동네 여기저기를 신나게 쏘다닌다. 그러다 언제부터인지 신앙이라는 자전거는 우리 관심에서 멀어져 마당 한구석에서 차츰 먼지만 쌓여간다.

 

우리네 신앙생활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싶다. 처음에 세례를 받고 성당에 나올 때는 좋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 순간 기쁨은 사라지고 세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강한 관성이 생길 때쯤이면 이미 신앙은 녹슨 자전거가 되기 쉽다. 더욱이 고해성사라는 소중한 자전거는 이미 나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되어버렸음을 발견하게 된다.

 

고해성사라는 자전거가 이미 녹슨 듯한 이 시대에 고해성사에 대한 참 의미와 필요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근원적이면서 공통된 욕구 중 하나는 속죄(paenitentia)를 통해 신(神) 혹은 다른 사람과의 일그러진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많은 종교들은 이 새로운 관계의 시작을 일정한 예식을 통해 표현해 왔는데, 유다인들의 경우, ‘참회의 날’이면 자신들의 죄 목록을 멘 속죄양을 사막으로 보냄으로써 하느님께 용서받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요구하신 것은 ‘속죄’가 아니라 ‘화해’(reconciliatio)이다. 즉 ‘아버지와 다시 하나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화해가 참되게 이루어지면 늘 ‘기쁨의 축제’가 따른다.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작은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 어떤 문책이나 추궁도 없이 아들을 껴안고 잔치를 벌인다.(루카 15장 참조)

 

이처럼 고해성사는 한 죄인이 하느님과 공동체와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기쁨의 잔치’이다. 자신의 죄 때문에 그분을 멀리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속죄 행위가 선행될 필요는 없다. 자캐오의 경우처럼 참다운 화해가 이루어지면 선행은 자연스레 따라오기 마련이다.(마태 19,8) 우리는 그저 두 팔 벌려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감사히 응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의 이 응답은 무엇보다 하느님께 큰 기쁨을 드리게 된다.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2) [2016년 2월 21일 사순 제2주일, 대전주보 3면, 송인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 성사신학)]

 

 

고해성사 다시 보기 (4) 회개, 기나긴 부르심과 은총의 열매

 

 

마르코 복음에 따르면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은 이렇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 말씀을 곰곰이 음미해 보면 우리가 회개하고 그분의 기쁜 소식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 가까이,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회개와 믿음은 무엇보다 ‘주어진 은총’이다. 왜냐하면 우리 편에서 무언가를 잘해서, 우리가 속죄와 보속을 완전히 마쳐서, 우리가 너무도 의로워서 우리에게 그분의 나라가 열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는 매우 역동적인 두 가지 방향성이 존재한다.(루카 15장 참조) 하나는 작은아들이 자기 행복의 근원인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방향성’이고, 다른 하나는 돼지를 치며 갖은 고생을 하던 아들이 제정신이 들어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방향성’이다. 헛된 욕망에 이끌려 아버지를 떠나는 것,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으려고 하는 것, 자신의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들이 죄의 본질이라 한다면, 이와는 반대로 자신이 비참한 상황에 빠져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자신이 의지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 깨닫는 것,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것, 그리고 다시 일어나 죄스러운 삶을 뒤로하고 아버지께로 향하는 것들을 회개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안에 하느님의 은총이 작용한다.

 

작은아들의 경우, 도덕적·재정적 파탄에 ‘때맞추어’ 기근이라는 자연재해가 닥쳤다. 그러나 신앙의 견지에서 보면 이는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였을 것이다. 그러한 심각한 재해만이 작은아들을 회개로 이끌 수 있는 필요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은 단지 향수병 때문이 아니라 굶주림과 수치심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처럼 회개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기나긴 부르심과 은총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작은아들에게만 회개의 은총이 작용한 것이 아니다. 그분의 은총은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와 늘 함께하였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가 말에서 떨어졌을 때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하고 있는 중이었다.(사도 9장)

 

회개를 뜻하는 그리스 말, “metanoia”의 뜻은 ‘생각을 바꾸다’, ‘달리 생각하다’, ‘이면을 살펴보다’ 등이다. 이 어원을 신앙의 견지에서 다시 풀어보면, 회개란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일과 관계들,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등의 이면에 작용하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는 것, 문제의 상황 속에서 그분을 바라볼 줄 아는 것, 바로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눈을 갖길 청한다면, “회개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사순시기이다. 이번 사순시기에 우리가 진정 회개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 보면 어떨까? [2016년 2월 28일 사순 제3주일, 대전주보 3면, 송인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 성사신학)]

 

 

고해성사 다시 보기 (5) 성찰과 통회, 기나긴 죄악의 어둠을 뚫고…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 수 없네, 저기 개똥 무덤이 내 집인 걸….” 너무도 유명한 ‘개똥벌레’라는 노래이다. 이 노래를 만들고 부른 사람들의 의도가 어떠한지는 모르겠으나 살아가면서 나 자신의 한계와 초라함을 체험할 때면 이 노래가 가끔 생각난다. 특히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반복해서 같은 잘못과 죄를 범하는 자신을 바라볼 때면 더욱 그러하다.

 

“주일미사 ○번 빠졌습니다.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 고해소에서 적지 않게 듣게 되는 고백이다. 오랜만에 하는 고백인데도 이런 피상적인 고백을 들을 때면 고해자가 하느님의 사랑을 잘 모르고 있거나 자신이 성찰하고 고백해야 할 잘못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어떤 경우에는 애써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보려하지 않거나 알고 있어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그 안에 숨어 있다는 것도 보게 된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한량없는 그분의 사랑 앞에서 자신의 초라함과 비참함을 깨닫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침 혹은 저녁에 실내로 들어오는 강력한 한 줄기의 빛이 평소 잘 보이지 않던 실내의 먼지를 확실히 볼 수 있게 하듯이 하느님의 강렬한 사랑은 영혼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어두움을 보게 해 준다. 때문에 고해성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깊은 내면을 성찰하려고 노력하는 영혼은 이미 그 과정 안에서 전에 깨닫지 못했던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서서히 깨닫게 된다.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여정에는 자신의 어두움과 인정하고 싶지 않은 한계와 보고 싶지 않은 자기 모습을 직면하는 고통이 반드시 따른다. 이것이 ‘통회’(痛悔)이다.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우리는 아프지 않고는 치유될 수 없고 더 나아갈 수도 없다. 치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환자는 자신의 썩은 이를 뽑아내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래야 더 아프지 않게 된다. 마음과 영혼이 아픈 사람도 낯선 상담자에게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상태와 경험을 꺼내놓아야 한다. 그래야 영혼에 치유가 일어난다. 이런 까닭에 통회는 영적인 성장통이요 성숙의 밑거름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참다운 의미의 통회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단순히 아파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긍정적인 의미에서 통회는 하느님 은총의 빛 안에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과정이다.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른 다윗 왕도 나탄 예언자가 자신을 꾸짖자,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라며 인정하고 고백하였다.(1사무 12,13) 자신을 괴롭히는 잘못된 과거를 하느님께 내어 맡길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뉘우쳤다고 말할 수 있다.

 

촛불 앞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나를 뒤따르는 그림자가 더욱 짙어지듯이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면 갈수록 우리는 자신의 죄악과 부족함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통회가 참되면 참될수록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결심 또한 굳건해진다. 오히려 죄와 유혹 앞에 당당해 질 수 있다. 이처럼 진정한 통회는 하느님의 사랑받은 우리를 더욱 우리답게 만들어 준다. [2016년 3월 6일 사순 제4주일, 대전주보 3면, 송인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 성사신학)]

 

 

고해성사 다시 보기 (6) 고백과 용서, 그 가슴 떨린 해방감

 

 

창세기 첫머리에 하느님은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에게 물으신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또 동생을 죽인 카인에게도 물으신다.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하느님의 이 질문은 사람에게 그 어떤 정보를 원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이미 다 알고 계셨다. 그분이 기다리신 것은 ‘그들이 했어야 했는데 하지 않은 것’, 곧 ‘완전한 고백’이었다. 하느님은 그들을 위해 그들이 다시 진실 안에 살 수 있도록 고백하기 원하셨으나 불행히도 그들은 하느님께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아담과 카인의 모습은 우리들의 솔직한 모습이기도 하다.

 

고백은 내적 완성을 지향하는 인간이 지닌 하나의 욕구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더욱더 참된 인간이 될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엉킨 실타래 같이 복잡한 죄에 대한 경험을 하나하나 풀어가는 가운데 인간은 자신의 부족함과 잘못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성찰하고 결심하였다고 해서 고해소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고백할 죄가 있어도 어렵고, 고백할 죄가 없어도 어렵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제대로 죄를 고백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경험과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무엇을 고백해야 할까? 크게 다음의 세 가지를 점검하길 권한다. 첫째,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이다. 둘째, 나와 타인과의 관계이다. 셋째,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이다. 고해자는 이 세 관계를 면밀히 검토하여 현재 자신이 이 관계들 속에서 어떠한 상태(긍정적 혹은 부정적 상태인지)에 있는지, 어떤 관계가 자신을 불만족스럽게 하는지 또는 어떤 관계에서 자신이 죄책감을 가지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어떻게 고백해야 할까? 다음의 네 가지를 유의하자. 첫째, 빠짐없이 고백하라! 가장 고백하기 힘든 죄목을 먼저 고백하는 것이 현명하다. 다음번으로 미루지도 말고 창피하다는 이유로 특정한 죄를 빠뜨려서는 안된다. 둘째, 자신의 죄를 고백하라! ‘상황이 이랬기 때문에 죄를 범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변명을 하거나 다른 이의 죄를 대신 고백해서도 안된다. 자신이 의지적으로 잘못한 것을 고백하는 것이 기본이다. 셋째, 분명하게 표현하라! 애매하게 표현해서는 안된다. 애둘러 말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은폐하려 하지 말고 사제가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범죄의 횟수나 정도 혹은 어떤 피해를 끼쳤는지 등을 표현해야 한다. 넷째, 간략하게 고백하라! 분명하게 표현한다고 해서 세부적인 이야기까지 길게 늘어놓을 필요는 없다. 만일 사제가 질문한다면 솔직하고 성실하게 답해야 한다.

 

고해성사는 우리로 하여금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결코 떠나시지 않는다는 사실,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끌어안으신다는 사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조건없이 우리를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하는 체험이다. 예수님이 당신의 피를 흘려 마련하신 화해의 성사를 통해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절절히 체험하는 이는 얼마나 복될까? [2016년 3월 13일 사순 제5주일, 대전주보 3면, 송인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 성사신학)]

 

 

고해성사 다시 보기 (7) 보속,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변화의 체험

 

 

고해성사의 마지막 단계는 사제에게 받은 보속(補贖)을 실천하는 것이다. 오늘날 일부 신앙인들은 경중을 떠나 보속을 ‘해야 하지만 못해도 그만’으로 여기는 듯싶다. 하지만 고해성사의 완결을 위하여 올바로 보속을 행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오늘날과 같은 개별적인 참회 예식이 시작되기 전(적어도 6세기까지)에는 교회는 주교를 중심으로 모든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공적 참회 예식’을 거행하였는데, 이 참회에서는 참회자가 매우 무거운 보속을 다 마치지 않으면 용서가 허락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참회자를 위한 ‘공동체의 기도’와 함께 ‘보속’을 죄인이 용서받을 수 있는 필수조건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고해성사 신학에 따르면 죄의 용서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자비’에 근거하여 고해사제의 직무 수행(사죄경)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지만 죄를 용서받은 이후에도 그 죄의 결과로 생긴 모든 폐해는 여전히 남아 있다. 때문에 용서받은 사람이 다시금 완전한 영적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방법으로 죄를 ‘보상’하거나 ‘속죄’해야 한다. 그래서 보속은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죄가 남긴 어두운 그림자까지 지워보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죄의 결과, 곧 하느님과의 단절 혹은 그분의 사랑을 거부함으로써 생긴 이웃과의 관계 손상 및 단절, 자기 소외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바로 ‘보속’인 것이다. 그렇다면 보속을 어떤 마음으로 실천해야 할까?

 

“우리의 보속, 곧 우리 죄 때문에 치르는 보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 처지로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다.’(필립 4,13)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서 보속한다. 이러한 보속들은 우리가 우리 죄 때문에 한 번에 영원히 속죄하신 그리스도를 닮도록 도와준다.”(가톨릭교회교리서 1460항)

 

「교리서」에 따르면 용서받은 죄인의 속죄 행위(보속)는 무엇보다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관계성 안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보속의 긍정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다. 보속은 용서받기 위해 우리가 억지로 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다. 오히려 보속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그리스도를 닮도록 도와준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깊은 일치 안에서 성실히 행할 때, 보속은 우리의 빈약한 행동과는 비교할 수 없이 풍요로운 그리스도의 빠스카 업적으로 승화되기 때문이다.

 

한편, 누군가에게 경제적·윤리적 피해를 끼쳤을 경우, 고해소에서 그러한 갈등 상태와 죄를 고백하였다고 해서 모든 문제와 어려움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 용서받은 것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자기 삶의 자리로 돌아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거나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과 반드시 화해해야 한다. 또한 보속으로 요구된다면 자캐오의 경우처럼 피해를 끼친 사람에게 적당한 방법을 찾아 보상해 주어야 한다.(루카 19,8) 이것이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고해의 종착점이다. [2016년 3월 20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대전주보 3면, 송인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 성사신학)]

 

 

고해성사 다시 보기 (8 · 끝) 대사(大赦), 왜 필요하지?

 

 

‘자비의 특별 희년’에 오늘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였다. 이 기쁨에 더하여 올해 우리에게 전대사가 수여되고 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가끔 묻는다. “고해성사를 보면 다 용서받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굳이 전대사를 얻어야 하나요?”

 

우선 「가톨릭교리교회서」 1471항은 대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대사는 이미 그 죄과에 대해서는 용서받았지만, 그 죄 때문에 받아야 할 잠시적인 벌(暫罰)을 하느님 앞에서 면제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용서와 자비의 성사인 고해성사를 통해서도 사라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께서도 뒤끝(?)이 있으시다는 얘기인가? ‘잠벌’이라고 불리는 그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대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죄(罪)가 우리 안에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죄는 우리에게서 하느님과 이루는 친교를 앗아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게 만드는데, 이것을 죄의 ‘영벌’(永罰)이라고 한다. 한편 모든 죄는 우리 영혼에 부정적인 영향과 상처들을 남기는데, 이것을 ‘죄 때문에 받게 되는 잠시적인 벌’(잠벌)이라 부른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혹은 죽은 뒤 연옥에서라도 정화되어야 이 잠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그런데 유의할 점은 이 두 가지 벌이 하느님께서 외부에서 가하시는 일종의 복수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죄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교리서 1472항 참조)

 

좀 더 설명하자면, 대죄를 통해 하느님과의 친교가 깨어지는데, 이런 단절과 소외는 하느님이 내리시는 벌이라기보다는 인간 스스로 하느님에게서 등을 돌림으로써 일어난다. 예를 들어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하느님이 그 죄를 물으시기 이전에 그분이 두려워 스스로 숨는다.(창세 3,8) 하느님은 여전히 사랑과 자비 안에 머물러 계시지만, 빚을 진 사람이 빚쟁이를 두려워하고 범죄자가 경찰을 무서워하듯 하느님을 등진 인간은 그분을 더 이상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 또한 모든 죄는 우리 안에 괴로움과 불안을 남겨 놓고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후 내적인 불안에 떨게 되면서 다른 사람이 자기를 죽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고통을 당한다.(창세 4,13-14) 이러한 상태가 죄의 결과이고, 이것은 죄의 용서를 받은 후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 죄책감 등으로 극복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된다.

 

따라서 구원의 분배자인 교회는 이러한 죄의 부정적인 결과들을 소멸시키기 위해 애쓰는 신자들의 힘겨운 과정에 함께한다. 즉 교회는 대사를 얻을 수 있는 일정한 조건을 채운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보속의 보물을 자신이 받은 권한으로 나누어 줌으로써 잠벌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이렇게 죄인들은 자비와 자선의 행위, 기도와 여러 속죄 행위를 통하여 죄의 결과에 잡혀있던 “묵은 인간”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새로운 인간”으로 갈아입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대사는 받아도 되고 받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기회 주어질 때마다 교회를 통해 받아야 할 하느님 자비와 은총의 선물인 것이다. [2016년 3월 27일 예수 부활 대축일, 대전주보 3면, 송인찬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 성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