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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체성사] 신앙교리: 성체에 대한 공경 (2) 고대교회에서의 성체공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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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호식 [ jpatrick ] 작성일2019-02-13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성체에 대한 공경 (2) 고대교회에서의 성체공경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에 따라 거행된 초대교회에서의 성찬례는 감사의 기도와 함께 배불림의 식사를 포함한 식사로서 공동체를 위한 사랑의 만찬과 잔치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예배에 이어 성찬례를 가지다가 차츰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으면서 독립된 성체성사를 거행하였습니다. 이렇게 거행된 박해시대의 미사는 자연스럽게 성체에 대한 공경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미사 밖에서의 성체공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면 박해시대 이후 고대교회에서의 성체공경의 역사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바실리카미사와 성체공경의 시작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285-337)가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를 선포함으로써 그리스도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박해시대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 그리스도교회는 바실리카(Basilica)와 같은 로마시대의 공공건물에서 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321년에는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주일예배가 국법으로 선포됩니다. 이렇게 교회가 이제 소위 ‘제국교회’(帝國敎會)가 되면서 미사를 더 성대하게 드리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성체에 대한 공경과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제대에 대한 공경도 더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성찬례 풍경의 장엄한 변화

 

다음에 소개해 드리는 글에서 당시에 행해지던 성찬례의 풍경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박해 시대가 끝나고 교회가 자유로이 그 신앙을 나타내고 전례를 행할 수 있게 되면서 로마 제국 각처에 큰 성당이 세워지고 신자는 증가되고 일요일에는 성찬례가 성대히 거행되게 되었다. [···]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의식도 점차로 장엄해졌다. 최후 만찬 때 예수의 말씀을 내포한 감사기도로 빵과 포도주가 축성되는 점은 변하지 않았지만 점차로 초나 향이나 무릎을 꿇는 등의 로마 황제 궁전에서 사용되던 의식이 성찬례에도 도입되어 노래와 행렬로 의식의 장엄성이 증가되었다. 성찬례에 참가하는 것은 뚜렷이 세례를 받은 신자에만 국한되어 있어서, 성찬례 전에 행해지는 성서 낭독과 주교의 강론에 참가하는 것은 세례 지망자(예비신자)에게도 허락되어 있었으나 강론이 끝나고 성찬례가 시작되면 성당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 성찬례 동안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성당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을 성찬례에 참가시키지 않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세례나 성체에 대한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습관도 4세기 교회 전반에 지켜졌다.”(P. 네메세기, 주의 만찬, 105-106쪽)

 

 

노자성체예식과 성체에 대한 직접적 공경

 

4세기 이후에는 성체에 관한 기적 이야기들이 생겨나 신자들의 신심을 자극하곤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임종을 앞둔 신자에게 성체를 ‘노자’(路資, Viaticum)로 영해주기 시작하였고,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안전을 위해서 성체를 지니고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매일미사가 일반화된 것은 5세기경부터 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체를 직접적인 공경의 대상으로 삼아 집에까지 성체를 모셔가서 경배하는 신자들도 있었고, 급기야 성체를 훔쳐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병자봉성체와 공복제 규정

 

로마에서는 미사 중에 교황이 축성한 성체를 시내 각 성당으로 보내 (교회 일치의 상징으로) 그 성체 조각을 성혈에 넣는 관습이 있었고, 영성체 예식 후에 환자들에게 성체를 모셔가는 봉성체도 행해졌습니다. 동방교회의 전례문에는 ‘거룩한 것을 거룩한 사람에게’ 라는 표현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처럼 영성체를 하려는 사람은 먼저 ‘죄가 없이 거룩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영성체에 대한 규정이었습니다. 영성체 전의 공복상태를 요구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인데, 9세기까지는 손으로 영성체를 하되 영성체시 엄격한 규정을 두어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신자석에서 멀어지게 된 사제석과 제대

 

시간이 흘러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로마제국의 여러 요소를 받아들인 교회는 바실리카 미사를 더욱 더 성대하게 거행하였고, 이에 따라 성사의 외적인 의식이나 전례 행사 등에 더 치중하는 경향이 생겨났습니다. 미사의 규모가 커지면서 성당의 규모가 더 커짐에 따라 사제석이 신자석에서 더 멀어지게 되었고, 제대는 높은 곳에 설치되어 신자들의 접근이 어려워졌습니다.

 

 

신자들의 영성체 약화와 교회의 엄격한 준비 규정

 

신자들이 높고 먼 곳에 위치한 사제석과 제대를 바라보며 미사를 구경하는 식이 되다보니 미사 참례가 점차로 적극적인 면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이미 4세기 무렵 ‘미사에 참여하는 모든 신자들은 영성체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식이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즉 신자들의 영성체가 더 이상 당연한 일이 아니게 되어, 5세기 말부터 6세기 초를 거치면서는 영성체자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의식의 변화 속에서 이후 한동안 영성체는 사제만 행하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때문에 506년 지금의 프랑스 악드(Agde)에서 개최되었던 공의회는 ‘적어도 성탄, 부활과 성령강림날 영성체를 하지 않으면 신자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악드 공의회는 엄격한 영성체 준비를 강조하였고, 그래서 영성체를 권장함에 있어서는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자들이 영성체를 멀리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이렇게 교회가 너무 영성체를 위한 조건을 엄격히 정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체사리오(Caesarius, 470-542)는 영성체를 위해서 며칠 동안 금욕할 것을 요구하였고, 심지어 신혼부부의 경우에는 한 달 동안 교회에 나오지 말라는 권고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성인신심의 성행

 

이제 매일의 미사가 잦은 영성체와 무관한 것이 되었고, 성체성사는 차츰 공동체의 만찬이라기보다 개인적인 은혜를 위한 신심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자들은 좀 더 감각적인 종교행위를 찾아, 이제 ‘그리스도 중심의 신심’ 보다 ‘성인 중심의 신심’을 더 즐겨 구하였습니다. 특히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교회 전례 안에 정식으로 도입된 것이 6세기 말에서 7세기경이었는데, 성지순례와 순교자, 성인들의 유해와 유물에 대한 공경이 성행하여 이 제대에서 저 제대로 옮겨 다니며 제대에 모셔져 있는 순교자나 성인의 유해 앞에서 기도하는 신자가 많아진 것이 이때부터 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2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목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