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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57 김종업로마노 [rlawhddjq] 2022-06-23

제가 보관하고있는 시편 해설서 입니다.

보시고 참고가 되셨으면 합니다.  

 

(공동번역)  제 137 편


바빌론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 흘렸다.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 위에 우리의 수금 걸어놓고서.
우리를 잡아온 그 사람들이 그 곳에서 노래하라 청하였지만, 우리를 끌어온 그 사람들이 기뻐하라고 졸라대면서 "한 가락 시온 노래 불러라." 하였지만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야훼의 노래를 부르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버릴 것이다.
네 생각 내 기억에서 잊혀진다면 내 만일 너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것이 있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
야훼여, 잊지 마소서. 예루살렘이 떨어지던 날, 에돔 사람들이 뇌까리던 말, "쳐부숴라, 바닥이 드러나게 헐어버려라."
파괴자 바빌론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악을 그대로 갚아주는 사람에게 행운이 있을지라.
네 어린것들을 잡아다가 바위에 메어치는 사람에게 행운이 있을지라.

 

1. 시편 137편은 공동체 애가로서 바벨론의 포로 생활과 관련된 노래이다. 이 시의 배경은 바벨론 포로기로 추정 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 시는 포로기 이후에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포로 생활의 고통을 회고하면서 저작한 것이라고도 한다.

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3절의 ‘거기서’라는 말이 시인의 현재 위치가 바벨론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시는 예루살렘 함락 당시의 성전 파괴를 회고하는 압(Ab)월 9일이 되는 날의 금식 일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편은 포로 생활의 슬픔을 말하고(137:1-4), 다음으로 예루살렘을 기억하고(137:5,6),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훼파한 자들에 대한 복수를 말하고 있다. 

 

2. 이 시편은 외형적으로는 나라를 잃은 이스라엘의 애국심을 노래한 시이다.

물론 여기 애국심 이면에는 신앙이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게 시온은 단순한 영토나 거주지로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이며 하느님을 경외하도록 주신 축복의 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온을 잃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잃었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그들이 나라를 잃은 슬픔을 노래한 이 시는 동시에 신앙을 잃어버린 슬픔의 노래이기도한 것이다.


 바빌론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 흘렸다.(137:1)”

여기 ‘시온’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말하는데, 시온은 때로 이스라엘 전체를 상징하는 언어로도 사용되기도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하느님을 경외하도록 택함 받은 백성이고, 이로 인하여 복된 삶을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백성이기 때문이다.

 시온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곳을 상징한다면 이스라엘도 동일하게 하느님을 경외하는 나라라는 점에서 시온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실제로 시온은 하느님을 예배하는 성전이 있었고, 항상 예배 자들로 넘쳤고 그들의 찬양소리와 기쁨으로 넘쳐 있는 것이었다.

예언자 미가는 이와 같은 시온을 이렇게 노래했다.

어느 민족이나 저희 신의 이름을 부르며 살지 않느냐? 우리도 자손 만대에 우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부르며 살아가자.(미가4:5)” 

예언자 이사야도 시온의 축복을 노래했다

. “야훼께서 되찾으신 사람이 이 길을 걸어 시온 산으로 돌아오며 흥겨운 노래를 부르리라. 그들의 머리 위에선 끝없는 행복이 활짝 피어나고 온몸은 기쁨과 즐거움에 젖어들어 아픔과 한숨은 간데없이 스러지리라"(이사35:10)
이처럼 ‘시온’은 장소적으로나 내용적으로 볼 때 하느님의 축복이 머무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시온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시온에서 죄 가운데 살 수 있었고 또한 예언자들을 통하여 죄로부터 돌이키지 않는다면 시온을 잃어버린다는 하느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듣고도 회개치 않았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하느님의 진노하심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고 결국 시온을 잃어버렸다. 이스라엘은 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 알지 못하여 결국은 그것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귀한 것은 귀한 것으로 알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교훈 받는다. 실제로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시온과 같은 귀한 은혜들은 주셨다.

특별히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들 가운데 하느님을 경외하며 살도록 부르신 부르심, 서로 사랑하도록 부르신 부르심, 그리고 일하며 살도록 부르신 부르심 등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하느님의 축복 가운데 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은혜들이다. 실제로 하느님을 경외하며 살도록 부르신 부르심은 우리에게 힘의 원천이 된다.

삶의 여정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경외함으로 언제나 새롭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부르신 부르심을 통하여 서로를 세워 줄 수 있고, 일하며 살도록 부르신 부르심을 통하여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은혜들을 귀한 것으로 아는 자들은 언제나 하느님의 축복 가운데 살 수 있는 것이다.
 바빌론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 흘렸다.”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은 바벨론 여러 강가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 여기 ‘바벨론’은 ‘시온’에 대한 반어적인 말로서 하느님의 백성이 거해서는 안 될 곳을 말한다. 이곳에는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허락해 주신 어떠한 축복도 없는 곳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백성들이 그 땅에 거하는 한 그 땅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시온을 기억하고 눈물을 흘리는 일뿐이다.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 위에 우리의 수금 걸어놓고서. 우리를 잡아온 그 사람들이 그 곳에서 노래하라 청하였지만, 우리를 끌어온 그 사람들이 기뻐하라고 졸라대면서 "한 가락 시온 노래 불러라." 하였지만 우리 어찌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야훼의 노래를 부르랴!(137:2-4)” 

본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거하며 당한 고통스런 삶을 계속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버드나무에 자신들의 수금을 걸어놓았다’고 말하였고, 또한 바벨론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흥을 위해 시온의 노래를 불러달라고 청하지만 어떻게 거룩한 시온의 노래를 그들의 흥을 위하여 부를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탄식하고 있다.

즉 시온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은 노래도 잃어버렸다. 시온에 거할 때 그들은 하느님께 예배 들일 때마다 수금을 타며 시온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제는 수금도 필요 없게 되었고 또한 시온의 노래도 더 이상 부를 일이 없게 된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들이 시온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 순간부터 노래를 잃어버리게 된다. 물론 여기에 말하고 있는 노래란 삶의 기쁨을 말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버릴 것이다. 네 생각 내 기억에서 잊혀진다면 내 만일 너보다 더 좋아하는 다른 것이 있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137:5,6)”

시인은 반의적 용법을 통하여 시온을 잊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즉 오른 손의 재주를 잊을 수 없는 것처럼 예루살렘을 잊을 수 없다는 의미고, 자신의 혀가 입천장에 붙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시온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시온을 잃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시온의 귀함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시온을 그리워하고 사모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자기 백성들이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할 때 은혜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시기 위하여 잠시 은혜를 취하여 가기도 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됨은 하느님께서 섭리 가운데 그들로 하여금 은혜를 은혜로 알도록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허락하신 일이다.
“ 야훼여, 잊지 마소서. 예루살렘이 떨어지던 날, 에돔 사람들이 뇌까리던 말, "쳐부숴라, 바닥이 드러나게 헐어버려라."  파괴자 바빌론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악을 그대로 갚아주는 사람에게 행운이 있을지라. 네 어린것들을 잡아다가 바위에 메어치는 사람에게 행운이 있을지라."(137:7-9)

시인은 예루살렘을 훼파하는 일에 참여한 에돔과 바벨론을 저주하고 있다. 특별히 에돔은 직접적으로 예루살렘을 훼파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저주의 대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은 언제나 이스라엘을 시기의 대상으로 여기고 이스라엘의 황폐함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돔과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반목은 에서와 야곱으로부터 시작 되었고, 이런 갈등은 역사 가운데 계속 되었다. 여기 예루살렘을 훼파한 자로 에돔을 말하고 있는 것은 예루살렘의 황폐함을 바라는 모든 자들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이처럼 에돔을 저주한 다음 바벨론을 저주했다. 바벨론은 실제로 예루살렘을 훼파한 자들이고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다. 그러므로 바벨론은 마땅히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시인은 바벨론을 여자 같은 존재라고 했다. 이것은 그들이 세계에서 스스로 강한 자라고 말하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나약한 여자와 같은 존재임을 말해 주기 위함이다.

시인은 바벨론에 대하여 “ 파괴자 바빌론아, 네가 우리에게 입힌 해악을 그대로 갚아주는 사람에게 행운이 있을지라. ”고 말함으로 바벨론을 파괴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고,

계속하여 “네 어린것들을 잡아다가 바위에 메어치는 사람에게 행운이 있을지라”고 말하고 있다.

특별히 이 표현은 바벨론에게 가장 큰 슬픔을 가져다 주는 자는 복이 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시인은 이미 바벨론을 여자로 표현한 바 있다. 여인에게 가장 고통스런 것은 바로 그 자식의 죽음이다.

그런데 여기 표현된 자식의 죽음은 가장 잔혹하게 당하는 죽음이다. 즉 바벨론이 패망하되 여인이 그 자식이 반석에 메침을 당하여 죽임을 당할 때 당하는 고통처럼 패망하기를 바란다는 표현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저주를 통하여 스스로의 유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야 말로 얼마나 저주스런 일인지 교훈 받는다.

에돔과 바벨론은 자신들만을 생각하고 이스라엘의 고통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의 황폐함을 기뻐했고 또한 그들을 파괴하고 포로로 잡아갔다.

만일 이들이 자신들보다 연약한 이스라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더라면 이처럼 이스라엘을 파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 더불어 복된 삶을 누리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잘 되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면 그 고통은 반드시 우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우리는 7-9절의 저주를 이와 같은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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