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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특집기획
2021.04.07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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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간 이웃에 반찬 나눔… 기쁨 조미료로 ‘행복의 맛’ 전한 의인
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만난 사람 - LG 의인상 수상자 이상기씨
▲ 34년째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이상기씨. 이씨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봉사를 계속할 생각"이라고 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이었다. 집에 있는데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홍수가 나 집에 갇혔다는 절박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평소 마음을 두고 있던 조손가정 아이들이었다.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슬리퍼만 신고 내달렸다. 방안에 갇힌 아이들을 찾았지만, 물이 차면서 수압이 높아져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앞뒤 가리지 않고 문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튀어나온 못에 발이 찔린 것도 모른 채로. 주변의 도움을 받아 아이들은 구했지만 결국 두 발에 파상풍을 얻었다. 의인이라고 불리는 이상기(안토니아)씨에 관한 수많은 일화 중 하나다. 하느님의 자비 주일을 맞아 최근 LG의인상을 수상한 이상기씨를 만났다.




의인(義人)을 만나러 가는 길


"지하로 내려가시면 문이 하나 있는데 그 문을 열면 있습니다." "반찬 만들어 어려운 이웃에게 전하는 분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다"고 하자 시흥시체육관 관계자가 말했다. 지하로 내려갔더니 정말 문이 하나 나왔다. 문을 열기 전 생각했다. 이런 데 반찬 만드는 곳이 있다고? 그리고 문을 열었는데 어두컴컴한 지하주차장이 나타났다. 도대체 반찬 만드는 곳은 어디지?라고 생각하던 순간 멀리서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 시흥시체육관 지하주차장 한편에는 이상기씨의 부엌이 있다.

오전 9시가 조금 지난 시간, 봉사자들은 이미 반찬을 용기에 옮겨 담고 있었다. 이씨를 찾았더니 한 봉사자가 말했다. "인터뷰 긴장된다고 화장실 가셨어요." 봉사자들이 반찬을 담는 것을 보며 얼마쯤 기다렸을까 이씨가 모습을 나타냈다. 사람의 인생은 얼굴에 묻어난다고 했던가. 이씨의 얼굴에서 여유와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의 마음은 따뜻한 손에서 느껴졌다. 인사를 하고 취재내용에 대해 설명하려 했는데 이씨가 다시 장갑을 끼며 말했다. "저 일 해도 되죠?" 부엌으로 들어가는 이씨를 따라 그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의인의 부엌

간장과 참기름, 깨, 고춧가루 등 각종 양념이 나물과 만나 이씨의 손에서 맛깔나게 버무려진다. 이씨가 반찬을 만드는 모습은 그야말로 뚝딱뚝딱이다. 채소를 다듬고 데치고 볶고, 양념도 툭툭 던지듯 넣는다. 많은 양을 만드는데 양 조절은 어떻게 할까 싶지만 늘 해오던 일이라 문제는 없다. 하지만 눈대중으로 만드는 탓에 조리법을 알려 줄 수는 없다.

메뉴 선정은 이씨가 직접 한다. 반찬을 받는 분들에게 주문을 받아서 만들기도 한다. 제철음식도 자주 오른다. 고기 반찬도 일주일에 2번 정도는 꼭 들어간다. 고기 비싸지 않느냐고 했더니 이씨는 "요즘은 채소보다 고기가 더 싸다"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부엌에서 이씨가 반찬을 만들어 내면 봉사자들이 위생 장갑을 끼고 반찬 주위로 모여든다. 반찬은 용기에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꽉 눌러서 담는다. 반찬을 받는 사람을 생각하며 용기 주변을 깨끗하게 닦아 뚜껑을 닫는 매너는 덤이다.

반찬 포장이 끝나갈 때쯤 이씨의 주특기인 조금만 더 하자가 나왔다. "국이 없는데 미역국을 끓일까요?" 이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봉사자들이 이씨를 말렸다. 만약 말리지 못했더라면 이날 70인분의 미역국을 끓일뻔했다.


▲ 반찬 A세트. 반찬에 커피까지 준비했다.



"아까워하면 안 돼요"

이씨에게 봉사에 대한 생각을 물었는데 곧바로 대답이 이어진다. 이씨는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아깝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된다"며 "반찬을 만들어 나눌 때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내가 안 먹는다고 대충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 이씨가 단골거래처라도 물건이 좋지 않으면 받지 않고 돈을 더 주더라도 좋은 물건을 고르는 이유다. 김치를 담그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씨의 김치에는 국산 채소와 과일을 갈아 넣고 육수를 직접 우려 만든 김칫소가 들어간다.

이런 마음에 더해 이씨가 반찬을 만들 때 반드시 지키는 것이 있다. 반찬을 만들 때 기쁜 마음으로 만드는 일이다. 그래야 반찬을 받아서 먹는 사람들도 기쁜 마음으로 먹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이씨는 "화내고 다투면서 반찬을 만들면 그것들이 모두 반찬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건강하시라고 드리는 건데요. 반찬 만들 때 화내거나 다투면 안 돼요."

이렇게 만든 반찬은 주로 조손가정, 청년, 홀몸노인, 장애인, 다문화가정 등에 배달한다. 배달은 매주 수요일이지만 이씨는 매일 반찬을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둔다. 사람들이 언제든 와서 반찬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반찬 봉사를 시작한 지 벌써 34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은 매주 70~80가정, 한 달로는 350가정에 반찬을 전달한다. 이씨는 동네 어르신들 간식도 챙긴다. 그는 "어르신들을 보면 그분들이 고생해서 우리가 이만큼 잘살고 있는 건데 그럼에도 대접도 제대로 못 받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며 안타까워했다.


▲ 봉사자들이 반찬을 용기에 옮겨 담아 포장하고 있다. 이날 준비한 반찬은 무장아찌와 콩나물무침, 멸치볶음, 김치, 계란, 백숙 등이다.



가슴이 시키는 사랑


이씨는 꽃동네 주방 봉사를 시작으로 34년간 이웃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이씨가 반찬 나눔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비닐하우스에서 사는 사람을 보고 나서다. 이씨는 저렇게 어렵게 사시면 드시는 것도 부실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주변에서는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뭐 하려 하느냐", "자기 돈 써가며 왜 그러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씨는 그런 말에 반응하지 않는다. 반찬을 만들어 나누는 일은 이제 이씨에게 삶이고 생활이 된 지 오래다. 그래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일 아침 6시면 어김없이 반찬을 만든다.

오래 하다 보니 누가 어디가 아픈지, 어떤 반찬을 좋아하는지 등 반찬을 나누는 가정들의 사정도 알고 있다. 반찬 나눔을 하지 않는 날에도 이씨는 각 가정을 다니며 안부를 묻곤 한다.

반찬 나눔에 들어가는 비용은 기부와 후원으로 마련한다. 하지만 후원이 많지 않아 사비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이씨는 "후원금보다 사비가 들어가는 게 훨씬 많다"며 "후원이 없을 때는 사비로 운영한다"고 말했다. 이씨 성격상 후원 좀 해달라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데다 후원은 마음에서 비롯돼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씨는 올해 3월 LG의인상을 받았다. 그는 "저보다 더 많이 봉사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큰 상을 주신 건 마음 변하지 말고 처음 시작할 때처럼 끝까지 하라는 뜻인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다른 꿈을 좇아

이씨는 현재 지역봉사단체인 나눔자리문화공동체 대표로도 활동하고 있다. 나눔자리문화공동체는 시흥시 청소년이 주체가 된 비영리 단체다. 취약계층의 자활과 복지 증진, 지역사회의 건전한 청소년 봉사 문화와 복지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씨는 청소년과 청년 문제에 큰 관심이 있다. 그는 "청소년과 청년들이 부담 없이 와서 따뜻한 밥을 먹고 갈 수 있는 무료급식소를 운영하고 싶다"며 앞으로 청소년과 청년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봉사요?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해야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하지 말라고 하면 저보고 죽으라는 것과 같아요. 아이들이 아기 좀 봐달라고 하는데 안 된다고 했어요."

이날은 이씨의 생일이었다. 봉사자들이 "생일에 꽃놀이를 가야지 봉사하고 있으면 되느냐"고 하지만 이씨는 그저 웃기만 한다. "봉사가 좋은걸요."


도재진 기자 djj1213@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