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을 해주세요.

로그인
닫기
성지 :
지명 :
내용 :
인천교구 > 갑곶 순교성지
증거자 박순집(朴順集) 베드로(1830-1911년)
 
많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듣고, 목격한 것을 증언하고 순교자들의 유해 발굴에 큰 공을 세운 박순집(朴順集) 베드로는 1890년에 인천 제물포로 이주(移住), 1911년에 숙골(현 도화동)에서 82세의 나이로 선종, 인천 교구와 인연을 갖게 되었다.
 
박순집 베드로는 1830년 10월 9일 서울 남문 밖 전생서(典牲署, 현 용산구 후암동)에서 순교자 박(朴) 바오로와 김(金) 아가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 바오로 나이 21세에 맏아들 요왕을 낳고, 24세 둘째 아들 베드로를 낳았다. 두 아들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으나 베드로가 세 살 때에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의 보살핌으로 성장하였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착한 베드로는 신체 발육이 남달라 성장하며 힘이 장사로 마을 대항 씨름 대회에 나가 소년 장사가 되어 황소를 타 마을로 개선하기도 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소년 박 베드로는 이조모(姨組母)댁이 1837년에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 범(范)] 주교가 입국하여 은신하며 머물고 있는 북촌 마을 근처에 있어 이모의 도움으로 주교님의 심부름꾼이 되기도 하며 주교님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교의 사랑을 받은 지 1년 남짓한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 많은 교우들과 앵베르 주교, 모방(Maubant, 羅) 신부, 샤스탕(Chastant) 신부가 잡혀 주교와 신부들은 새남터에서, 교우들은 서소문 밖 형장에서, 당고개에서, 옥에서 치명 순교하였다.
 
이러한 기해(己亥)박해 때 그의 부친 박 바오로는 훈련도감 포수(訓練都監 砲手)로 봉직하고 있었기에 새남터에서 순교한 주교, 신부들의 순교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에 박 바오로는 몇몇 교우들의 도움으로 새남터에서 주교와 신부들의 시신을 지키던 군사들이 잠든 틈을 이용하여 모래로 대강 덮은 무덤 가까이 가서 손으로 모래를 파헤치고, 잘라진 목과 시체를 전부 찾아내어 머리 셋은 다 수염이 길어 입에 물고, 시체 삼구는 등에 업고 양팔에 끼고 나와 기다리고 있던 교우들이 준비한 관에 대강 수습하여 그 밤으로 노고산(老古山, 현 마포구 노고산동)에 안장하였는데 이는 죽음을 각오한 순교자적 고귀한 희생이었다. 그 후 박 바오로는 복잡한 서울 근교에 안장한 성직자의 묘가 안심이 안 되어 1843년, 박씨 집안의 선산인 삼성산(三聖山, 현 관악구 신림동)으로 이장하며 사기그릇에 순교 연월일과 이름을 먹으로 써서 묘에 함께 묻고, 후일 찾기 쉽게 표식을 해 놓기도 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삼성산에 모셔진 묘로 그의 아들 베드로를 데리고 가서 “후일 성교회에서 성직자 무덤을 찾을 터이니 네가 잘 보아 두었다가 가르쳐 드려야 한다.”고 전하였다.
 
그리고 박 바오로는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안성(安城) 미리내로 이장되기 전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새남터에서 김 신부의 시신을 찾아내서 와서(瓦署, 현 용산구 한강로 3가 왜고개)에 안장하였다. 당시 17세였던 박순집도 서소문과 당고개를 거쳐 새남터 형장으로 가는 김대건 신부를 목격하였다.
 
박순집은 25세에 그의 부친과 같이 훈련도감의 군인이 되었다. 1866년 병인(丙寅)박해가 일어난 뒤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 주교, 브르트니에르(白) 신부, 볼리외(徐) 신부, 도리(金) 신부, 프티니콜라(朴) 신부, 푸르티에(申) 신부와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 등이 3월 7일과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할 때 박순집은 군인으로 참여하게 되어 이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그래서 박순집은 아버지 박 바오로의 뜻을 이어 가기로 결심하고, 박순지(朴順之, 요한) 등 몇몇 신자들과 함께 3월 28(음) 시신을 찾아내어 새남터 부근에 임시 매장한 후 4월 14일(음)에 다시 와서(왜고개)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3월 7일과 9일에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남종삼(南鍾三, 요한)과 최형(崔炯, 베드로) 시신도 신자들과 함께 찾아내어 와서에 안장하였으며, 3월 9일에 순교한 전장운(全長雲, 요한), 3월 11일에 순교한 뒤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진 정의배(丁義培, 마르코) 회장의 시신은 훗날 노고산에 안장하였다.
 
병인년 박해가 날이 갈수록 혹독해져 갈 즈음, 프랑스 함대가 서양 선교사의 처형에 대한 항의로 강화도를 통해 한강 양화진까지 침입, 전투를 벌임과 동시에 강화도에 상륙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관아와 민가에 방화한 후 많은 문화재를 약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대동강을 통해 평양까지 들어온 미국 상선이 통상을 요구하다 아군에 의해 배가 전소된 사건을 빌미로 미국 함대가 인천 제물포까지 올라와 항의를 하는 등의 사건이 발행하여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실권자 대원군은 천주교인들이 서양 오랑캐를 불러 들였다는 빌미로 더욱 박해를 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박순집의 가족도 결국 검거망에 걸리게 되어 양화진(현 절두산)에서 1866년 10월 17일 형 요왕의 아들 박 바오로(20세), 고모 박 막달레나, 1868년 3월 29일 부친 박 바오로(63세)가 잡혀 순교하였고, 포청 옥에서 1868년 3월 26일 큰삼촌 박 바오로(70세), 큰삼촌 아들과 그의 부인, 작은삼촌과 그의 부인, 3월 29일 형 박 요왕(46세), 형수 손 발바라(39세), 12월 21일 장모 홍 유시디아(58세), 1870년 2월 21일 팔촌 형 박 바오로와 함께 옥사하였고, 인천 제물포에서 이모부 손 베드로 넓적이(68세)와 이모, 이모부의 사위 박치문(요왕, 42세)이 1868년 4월 20일에 인천에서 순교하였고, 형 박 서방(58세)이 4월 20일에 강화에서 순교하였다. 이처럼 박순집 일가에서 16위의 순교자가 탄생하였으나 박순집은 여러 박해의 검거망을 기적적으로 피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래서 박 베드로는 가족 시체들을 찾아내어 아버지와 형님 내외분, 백부의 시체를 '둔짐'이란 곳에 안장하였다.
 
공식적인 박해가 철회된 1876년, 박순집은 교회의 밀사 최지혁(崔智赫, 요한)과 고종의 유모 박(朴) 마르타의 딸 원(元) 수산나 등과 협력하여 드게트(崔) 신부, 블랑(Blanc, 白) 신부 등을, 1877년에는 리델(Ridel, 李, 제6대 교구장) 주교, 두세(丁) 신부, 로베르(金) 신부 등을 입국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 후 1888년에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白) 주교가 프오델(朴) 신부에게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도록 하자 프오델 신부는 박순집을 불러 자신이 보고 들은 것과 순교자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 자신의 집안과 다른 순교자들의 행적을 교회 법정에서 증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서기 권 타대오에게는 한 마디도 바꾸지 말고 기록하도록 하여 증언록이 작성되었는데 이 증언록이 박순집 증언록(丙寅事蹟 朴順集證言錄)으로 3권에 153명의 순교자 행적이 기록되어 현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1899년 10월 30일, 박순집의 도움으로 와서에 있던 7명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안장되었고, 1901년 10월 21일에 삼성산에 묻혀 있던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유해도 발굴되어 예수성심신학교를 거쳐 같은 해에 명동성당 지하실에 안치되었으며, 1909년 5월 28일에는 와서에 묻혀 있던 남종삼과 최형의 시신이 발굴되어 명동성당에 안치되었다.
 
이처럼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과 유해 발굴에 큰 공을 세운 박순집은 1878년에 홍제원(현 홍제동) 장거리 고개 밑에서 살았는데 교회를 위해 자신의 집을 공소로 내놓았고, 1888년에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자 셋째 딸 박황월(朴黃月,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을 수녀회에 입회시켰다. 그래서 박 수녀는 조선인 최초 5명의 수녀 중 한 분으로 그가 95세의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어릴 때부터 보고 들은 것을 자세히 기록하여 놓았는데 이 글에는 자신의 가족들의 순교 행적과 신앙생활, 수도회 역사의 내용으로 아버지 박순집 증언록처럼 교회의 산 기록이 되고 있다.
 
1889년에는 인천에 사는 한 교우가 박순집을 찾아와서 인천 제물포(濟物浦)로 내려와 전교해 줄 것을 간곡히 청하자 1890년에 전교의 원대한 포부를 간직하고 아들 식구와 전 가족을 데리고 제물포로 이사했다. 박순집이 제물포에 와서 근교에 교우를 살펴보니 자기를 인천으로 초대한 교우 가정과 또 한 가정, 일본인 교우집, 중국인 한 사람이 전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 베드로는 1889년에 한국인 59명, 일본인 25명으로 설립된 답동본당(초대 주임 빌렘 신부) 사목을 도우며 전력을 다하여 전교에 힘썼다. 그런데 1893년에 박순집의 집터가 경인 철도 부설로 인하여 철도 부지로 편입되어 부득이 외곽지역인 주안 숙골(현 도화동)에 밭을 사서 이주하여 생활을 하다가 1911년 6월 27일 82세의 나이로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며 선종하였다.
 
그런데 방안에는 향기가 풍기어 장손 요셉이 밖으로 나가 지붕을 올려 보자 동쪽으로 뻗친 두 줄기 광채는 마치 쌍무지개 같았고, 이웃 동네 사람들은 온통 불빛에 쌓여 있는 박 베드로의 집을 보고 불이 난 줄로 알고 손에 손에 물통을 들고 불을 끄려고 몰려왔다. 그러나 집은 타지 않고 광채의 서기만 있어 모두 놀라 장남 요셉에게 신비스런 현상을 이야기하며 주위를 살피니 박순집 베드로가 선종하면서 나타난 서기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모두 땅에 무릎을 꿇고 박순집 베드로가 성인이 되었다고 칭송하였다. 그리고 박순집 베드로의 시신은 독쟁이(현 용현동)에 묻었다.
 
이처럼 박순집 베드로의 일생은 순교자의 정신으로 신앙생활을 실천한 증언자의 삶이었다. 그리고 인천으로 이주해 와서 산 20여년은 평신도 사도직을 성실히 수행하여 오늘날 인천교구 발전에 초석이 된 삶이었다.
 
그래서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에서는 교구 신자들의 순교자 현양정신을 함양하기 위하여 용현동(독생이)에 묻혔다가 1961년 8월 31일 천주교 서울교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내로 천묘된 박순집 베드로의 유해를 서울교구의 도움으로 2001년 5월 24일 그가 말년에 살았던 도화동과 인연이 있는 도화동 성당 내에 봉안하여 순교자 현양 기도 모임을 갖고, 9월 순교자 성월에 강화 갑곶 성지 내에 천묘하였다. [출처 : 갑곶순교성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