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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선종한 곳
지번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진안리 92-6 
전화번호 (010)9944-0145
홈페이지 http://cafe.daum.net/Mawon.Jinan
관련기관 마원진안 성지 담당    
관련주소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청운로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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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최양업 신부의 행적에 대한 재검토: 유학로와 선종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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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1-18 조회수116 추천수0
파일첨부 최양업 신부의 행적에 대한 재검토_유학로와 선종지를 중심으로.hwp [276480]  

최양업 신부의 행적에 대한 재검토


- 유학로와 선종지를 중심으로 -

 

 

1836년 12월 3일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떠난 최양업(토마스)과 동료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안드레아)은 다음해 6월 7일 그곳의 조선대목구 신학교에 도착하였다. 이 유학로는 조선 최초로 서양식 교육을 받기 위해 마카오까지 가야만 했던 신학생들의 첫 여정으로, 첫걸음을 뗀 천주교 사제 양성사의 한 과정을 규명한다는 교회사의 의미도 담고 있다.

 

조선 신학생들은 1836년 12월 28일 중국 변문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선 선교사 샤스탕(J. Chastan) 신부와 그를 인도해 온 왕 요셉, 서만자의 안내자 Touan 마리아노와 Tchen 요아킴을 만나게 된다. 이후 신학생들은 중국인 안내자들을 따라 요녕성의 심양, 내몽고의 마가자, 하북성의 서만자를 거쳐 산서성의 장치에 도착하였다. 그런 다음 왕 요셉은 장치에 남고, 서만자의 안내자 2명이 마카오까지 조선 신학생들을 인도하였다.

 

이처럼 최양업 신부와 동료 신학생들의 유학로는 ‘변문-심양-마가자-서만자-장치’로 이어졌다. 그러나 현재까지는 장치까지의 유학로만 밝힐 수 있었고, 이후의 여정은 육로를 택했다는 것 외에는 추정할 만한 자료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1861년 6월 15일에 선종한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요 가매장지에 대해서는 진천 공소 선종설, 문경 약국 선종설, 배티 선종설이 제기되어 왔다. 이에 대한 근거 자료는, 정규량 신부의 전문 내용, 최상종이 기록한 집안의 전승, 유영근 신부의 기록 등인데, 이 중에서 최상종의 기록은 최 신부의 선종지 가매장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점 등 몇 가지 중요한 약점들을 지니고 있으며, 유 신부의 기록도 훗날 자신의 의견을 추가했다는 점에서 문제점이 발견된다. 따라서 최양업 신부의 시신이 충북 제천의 배론으로 이장될 때 목격했을 최경신의 증언을 직접 듣고 기록한 정규량 신부의 ‘진천 공소 선종설’이 가장 신빙성이 높다.

 

한편 최양업 신부의 선종을 직접 목격한 푸르티에(J.A. Pourthie) 신부의 기록, 그 사실을 전해들었던 페롱(S. Feron) 신부의 기록에는 선종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내용이 없다. 다만, 푸르티에 신부는 자신의 거처가 있던 배론에서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까지의 거리를 ‘17리외 혹은 17~18리외’로 기록했는데, 이 거리 개념은 <대동여지도> 상에서 약 214~226리가 된다. 그렇다면 배론에서 가장 먼 진천의 배티 공소(교우촌)을 포함하여 모든 진천 공소들은 <대동여지도> 상에서 220리 이내에 분포되어 있으므로 위의 범주에 들어가게 된다.

 

기록에 나타나는 박해기의 진천 공소(교우촌)들은 이미 이 지역을 순방한 적이 있던 페롱 신부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최 신부의 선종지를 자신이 알지 못한 ‘한 작은 교우촌’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최양업 신부가 진천의 어느 공소에서 선종했다면, 그곳은 담당 선교사에게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었음이 분명하다.

 

 

Ⅰ. 머리말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요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1821~1861) 신부의 신앙 생애와 행적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고, 필자 또한 오랫동안 여기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1) 특히 최근에는 그의 사목 중심지와 선종지에 대한 연구가 새롭게 시도되었으며,2) 집안의 가계나 부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1804~1839), 모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 1801~1840)의 신앙 생애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지게 되었다.3) 이러한 현상은 최양업 신부와 모친 이성례가 교황청 시성성의 교령에 의해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면서 시복 시성 작업이 추진되고 있는 데다가 관련 교회 순례지(일명 성지)에서 이들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 결과 최양업 신부가 1850~1861년 사이에 조선에서 활동한 유일한 한국인 사제로서 교회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고, 그가 남긴 업적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문제 등이 더 분명히 설명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최양업 신부의 행적과 관련된 국내외 순례지들의 현재 위치와 각 순례지들의 의미는 물론 그의 관명[九鼎]이나 형제 관계까지도 폭넓게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최양업 신학생의 마카오 유학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미온적인 시도만 있었을 뿐 본격적인 연구가 시도된 적이 없다. 아울러 그의 선종지도 확정적으로 규명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에 본고에서는 먼저 최양업 신학생의 유학로, 다시 말해 1836년 12월 3일부터 6개월 동안 이어진 서울에서 중국 마카오까지의 여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여정은 최양업 신학생만이 겪은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유학을 떠난 동료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820?~1837)와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1821~1846) 신학생의 여정도 된다. 아울러 여기에는 조선 최초로 서양식 교육을 받기 위해 마카오까지 가야만 했던 조선 신학생들의 유학로라는 의미와 함께 첫걸음을 뗀 천주교 사제 양성사의 한 과정을 규명한다는 교회사의 의미도 들어 있다.

 

다음으로 본고에서 규명하고자 한 것은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이다. 물론 이는 기존의 연구 과정에서 이미 관련 자료들이 종합적으로 수집 검토된 적이 있으므로4) 새로운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는 아니라는 약점을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재검토하게 된 이유는, 자료에 대한 의미 규정이나 해석 과정에 자의적이면서도 미흡한 점이 엿보이며, 그 결과 기존의 연구나 설명 자체에 객관성을 부여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유학로와 선종지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단절되어 있는 두 가지 문제를 함께 다루었다는 점에서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연구는 최양업 신부의 신앙 생애와 행적을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부분들이고, 자칫 소홀히 하기 쉬운 교회사의 한 부분을 밝혀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Ⅱ. 최양업 신학생의 유학로


1. 기존의 추정 경로와 문제 제기

 

1821년 충청도 홍주 다리골(Taricol, 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락골)5)에서 태어난 최양업은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836년 2월 6일 서울에 있는 모방(P. Maubant, 羅 베드로) 신부댁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일에는 최방제 · 김대건 신학생과 함께 모방 신부 앞에서 서약을 한 뒤 이튿날6) 조선 교회의 밀사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이광렬(李光烈, 요한) 등 4명과 함께 서울을 출발했고,7) 1836년 12월 28일 중국 변문(邊門, 일명 柵門, 현 요녕성 봉성시 변문진)에서 조선 입국을 기다리던 샤스탕(J. Chastan, 鄭 야고보) 신부를 만났다. 그리고 6개월 만인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즉 경리부)에 도착해서 사제의 길을 닦는 유학 생활을 시작하였다.8) 다시 말해 최양업과 동료 신학생들은 서울을 떠난 지 정확히 187일 동안, 변문을 떠난 지 162일 동안 중국 대륙을 북에서 남으로 종단했던 셈이다.

 

지금까지 ‘서울~마카오’의 신학생 유학로를 정확히 규명하고자 한 연구는 없었지만, 미온적이나마 여기에 관심을 갖고 신학생들의 유학 여정을 추정해 본 경우는 여러 차례 발견된다. 그중에서도 가정 선구적인 시도는 1981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간된 《성지 II》라는 책자를 통해 이루어졌다.9) 여기에 수록된 유학로는 아무런 근거 자료 없이 ‘서울-평양-차주(의주의 오기인 듯)-변문-봉천(심양)-북경-천진-제남-남경-항주-복주-하문-광동-마카오’로 이어져 있으며, 이후에 발간된 책자들에서도 별다른 의견 없이 위의 여정과 거의 유사하게 신학생들의 유학로를 표기해 왔다.10)

 

언뜻 보면 위의 유학로는 중국 대운하(북경-천진-청강-소주-항주)의 수로를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운하에서 벗어나 있는 산동성의 제남(濟南)과 강소성의 남경(南京), 그리고 복건성의 복주(福州) · 하문(厦門) 등을 첨부한 것으로 볼 때, 대운하 수로에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B. Bruguiere, 蘇 바르톨로메오) 주교와 모방 신부의 일부 여정(마카오-복주 · 푸간 · 힝화-남경)11)과 샤스탕 신부의 일부 여정(마카오-복주-상해-요동-북경-산동 · 제남)12)이 고려되었을 수도 있다. 다만, 이 중에서 ‘서울-의주-변문’ 사이의 여정은 연행사나 교회 밀사들의 여정, 모방 · 샤스탕 신부의 여정 등을 고려할 때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13)

 

일찍이 모방 신부는 1836년에 조선 신학생들을 마카오로 보내면서 그곳의 르그레즈와(P.L. Legregeois) 대표 신부에게 발송한 서한을 통해 “샤스탕 신부가 조선 소년들을 변문에서 마카오까지 어떻게 배려했는지 당신께 알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14) 샤스탕 신부가 그의 안내자들과 마카오 여정에 대해 의논한 뒤 신학생들의 유학로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릴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산동에서 변문까지 샤스탕 신부를 인도한 안내자들이 최양업과 동료 신학생들을 마카오 대표부까지 데려갈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샤스탕 신부의 서한에서는 유학로에 대한 설명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그의 서한에는 “음력 11월 21일(양력 12월 28일)경에 조선 신학생들을 만날 예정”이라는 내용, “마카오로 보낸 3명의 조선 신학생들을 르그레즈와 신부가 돌봐주고 있다”는 내용, “이미 3명의 조선 신학생들을 마카오로 보냈다”는 내용만이 나타날 뿐이다.15) 조선 신학생들을 만난 직후인 1836년 12월 30일자 서한과 조선 입국 이후인 1837년 9월 15일자 서한에는 신학생들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16) 반면에 샤스탕 신부는 다른 서한 내용에서 그의 조선 입국을 도왔던 안내자들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신학생들의 유학로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와 같이 샤스탕 신부는 최양업과 동료 신학생들이 어떠한 경로로 마카오까지 갔는지 알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경로를 알기 위해서는 그들을 마카오로 인도한 안내자들이 누구였고, 그들은 어떻게 해서 조선 신학생들을 안내하게 되었으며, 과연 어느 지역을 통해 신학생들을 마카오까지 인도했는지 등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2. 마카오 유학로의 안내자

 

마카오 대표부의 바랑탱(A.N.A. Barrentin) 부대표 신부는 파리의 지도자 신부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최양업과 동료 신학생들을 마카오까지 인도한 안내자들에 대해 설명하기를 “샤스탕 신부가 보낸 2명의 안내자들이 (1837년) 6월 7일 3명의 조선 신학생들을 데리고 왔다”고 하였다.17) 그러면 샤스탕 신부가 보낸 2명의 안내자들은 과연 어디 출신이고, 어디에서 활동하던 안내자들이었으며, 어떻게 해서 조선 신학생들을 인도하게 되었던 것일까?

 

일반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샤스탕 신부가 산동에서 사목하다가 변문으로 갔기 때문에 조선에 입국할 때도 산동 안내자들의 안내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정작 그의 조선 입국을 도운 사람들은 산동 안내자가 아닌 다른 지역 사람들이었다.

 

산동 지역에 머물던 샤스탕 신부는 1836년 3월에 그곳을 떠나 요동으로 향하였다. 이때 그와 동행한 이들은 산동 안내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있었던 것 같다. 샤스탕 신부가 요동으로 향하면서, 그리고 요동에 도착한 뒤에도 ‘서만자’(일명 Sivang, 현 하북성 장가구시 崇禮縣 西灣子鎭)18)에 있는 왕(王) 요셉(Ouan Joseph) 신학생이 열의를 가지고 자신의 조선 입국을 도와줄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는 점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19) 왕 요셉은 샤스탕 신부가 교수로 재임했던 말레이시아 페낭(Penang) 신학교 출신으로, 마카오에서부터 오랫동안 브뤼기에르 주교를 인도하면서 중국 여정에 정통하게 되었고, 이후 조선 교회 밀사들과의 연락을 도맡았으며, 모방 신부가 조선에 입국할 때도 변문까지 안내했었다.20)

 

요동 지역의 상황을 살핀 뒤 샤스탕 신부는 일단 산동으로 귀환해 사목하다가21) 1836년 11월 초에는 모방 신부의 서한에 따라 변문으로 가기 위해 산동을 떠났고, 12월 13일에는 심양(봉천)에 도착하였다.22) 이에 앞서 샤스탕 신부는 북경 인근에서 왕 요셉과 함께 그가 데려온 2명의 안내자들 즉 Touan 마리아노와 Tchen 요아킴을 만나게 된다.23) 이들은 샤스탕 신부가 왕 요셉에게 서한으로 요청하여 북경 인근의 약속 장소에까지 그와 함께 오게 된 신자들이었다. 이후 샤스탕 신부는 이들과 함께 변문에 도착했으며, 12월 28일에는 조선 신학생 일행을 만난 뒤 밀사들의 인도로 조선에 입국하였다.

 

Touan 마리아노와 Tchen 요아킴은 서만자 출신으로 그곳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1835년에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 신부를 안내한 적이 있었고, 오랫동안 조선대목구를 위해 서만자와 마 카오와의 연락을 맡아온 신자들로, 왕 요셉과는 이미 깊은 교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서만자 안내자들에 대해서는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L. Imbert, 范世亨 라우렌시오) 주교24)의 서한에 잘 나타나는데,25)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서만자에서 활동하는 안내자들 즉 앵베르 주교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안내자들’ 혹은 ‘조선대목구를 위해 활동하는 안내자들’이 조선 신학생들을 마카오까지 인도했다는 아주 결정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1837년 마카오에 갔을 때 그들(즉 서만자의 안내자들)이 3명의 학생(즉 조선 신학생)을 데리고 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갈 때 288냥을 써버리고, 돌아올 때 188냥 5돈 6푼을 쓴 데다가 은으로 바꾼 결과 120냥의 손실을 입었습니다.26)

 

앵베르 주교는 이처럼 1837년에 조선 신학생들을 마카오까지 인도한 안내자들이 서만자에서 활동하는 안내자들이라고 하였다. 이들이 왕 요셉과 함께 샤스탕 신부를 변문까지 인도한 뒤, 샤스탕 신부의 명에 따라 변문에서 만난 최양업과 동료 신학생들을 마카오까지 인도했던 것이다. 그런 다음 서만자 안내자들은 마카오에 도착한 지 1주일 만인 6월 14일 대표부의 명에 따라 다시 서만자로 향해야만 했는데, 이에 대해 마카오 대표부에서는 “서만자에서 앵베르 주교를 데리고 나오기 위해 거기에 제때에 도착할 수 있게끔 안내자들을 내일(1837년 6월 14일) 보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27) 서만자에 와 있을 앵베르 주교의 안내를 위해서 이 안내자들을 급히 그곳으로 되돌려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앵베르 주교는 서만자 안내자들이 전교비를 헤프게 사용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였고, 이후로는 그들의 도움 없이 사천 신학생인 범(范) 요한과 사천성의 안내자 회장과 함께 조선 입국을 시도하게 된다.28) 또 앵베르 주교는 이에 앞서 서만자의 라자로회[遣使會] 장상인 물리(J.M. Mouly)29) 신부에게 마리아노를 비롯하여 서만자의 안내자들을 해고하도록 종용하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전교비를 헤프게 사용하는 데다가 헌신적인 사천성 · 산서성 안내자들과는 달리 안내를 생업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앵베르 주교가 언급한 마리아노는 샤스탕 신부의 서한에 언급되어 있는 (Touan) 마리아노와 동일인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리 신부는 이후에도 계속 서만자 안내자들을 고용했던 것으로 나타난다.30)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왕 요셉과 마리아노 · 요아킴은 샤스탕 신부를 변문까지 인도한 뒤, 그곳에서 최양업과 동료 신학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특히 마리아노 · 요아킴은 서만자 출신으로 그 지역에서 안내를 생업으로 삼아 활동하던 신자들이었으며, 샤스탕 신부로부터 안내 요청을 받은 왕 요셉의 소개로 샤스탕 신부와 함께 변문까지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신학생들을 만나 마카오까지 안내하게 된 것이다. 바랑탱 신부의 서한에 나타나는 2명의 안내자가 곧 이들이었음이 분명하다.

 

 

3. 유학로 규명과 남은 과제

 

당시 하북성과 내몽고, 요녕성 지역은 모두 북경대목구에 속해 있었으며, 남경교구장으로 재임하던 포르투갈 출신의 라자로회 선교사인 피레스 피레이라(C. Pires-Pireira, 畢學源) 주교가 1827년 8월 이래 북경대목구의 대리자(Administrator)를 겸하고 있었다. 따라서 북경대목구의 실질적인 관리는 각 지역에 거주하던 장상 신부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반면에 이웃해 있는 산서성 지역은 1815년 이래 이탈리아 출신의 프란치스코회 선교사인 살베티(J. Salvetti) 주교가 관할하던 산서대목구 관할 지역으로, 산서성 장치(長治, 현 산서성 장치시)에 선교 본부가 있었다.31)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2년 10월부터 다음해 9월까지 체류했던 곳이다.

 

프란치스코회의 선교 본부가 있던 산서성 장치와 함께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4년 10월 이후 약 1년 동안 체류한 적이 있던 하북성의 서만자는 중국의 북동부와 남부 지역을 이어주는 선교 루트에서 중요한 연결 고리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37년 8월에 사천성을 출발한 앵베르 주교가 1차 목적지를 서만자로 정했던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또 앵베르 주교는 서만자에 도착하기 전에 산서성 장치를 경유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가 “서만자는 물론 산서성에서도 왕 요셉은 호평을 받고 있다”32)고 기록한 내용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이에 앞서 1836년 12월 28일 변문에서 최양업과 동료 신학생들을 만난 왕 요셉과 서만자의 안내자 마리아노 · 요아킴은 신학생들을 데리고 일단 서만자로 향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왕 요셉은 서만자를 거쳐 산서대목구의 선교 본부가 있던 장치(長治, 현 산서성 장치시)까지 간 뒤, 마카오로 가지 않고 장치에 남아 서만자를 오가면서 활동한 것 같다. 또 그는 1837년에 앵베르 주교와 함께 서만자에 머물기도 하였다. 이후 앵베르 주교는 왕 요셉을 산서성 부주교(A.M. di Donato, O.F.M.)에게 보내면서 6개월 동안 그를 살펴본 뒤 사제품에 올려도 좋다는 수품 허가장을 보냈는데, 이는 그가 산서성 출신이었기 때문으로 이해된다.33) 한편 서만자에는 라자로회에서 운영하는 예비 신학교가 있었는데,34) 짧은 기간이나마 이 신학교는 조선 신학생들이 거처하기에 적당한 장소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왕 요셉과 서만자 안내자들이 택한 ‘변문-심양-서만자’의 여정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왕 요셉을 시켜 탐색한 여정이요, 모방 신부가 조선 입국 때에 택했던 여정의 역순이었다. 앵베르 주교는 그중에서도 ‘서만자~심양’ 여정의 상황과 환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갑사(Capse) 주교(즉 브뤼기에르 주교)는 북경대목구장(즉 북경대목구 대리자인 남경교구장 피레스 피레이라 주교)으로부터 서한을 받았는데, 서한의 의미는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고 몰래 북경에 들어갈 경우 시내의 나쁜 교우들 때문에 주교님의 통행이 극히 위험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산서성으로 우회하여 서쪽 지역과 타타르(Tartarie) 지방으로 해서 길을 찾아보아야 했습니다. 그곳(즉 서만자~심양)으로 돌아가면 검문소들의 수가 적고, 덜 엄격한 데다가, 도와주려고 하고 도와줄 수 있는 교우는 (하북성 지역보다) 더 많습니다.35)

 

(브뤼기에르 주교님이 가시고자 했던 길은) 눈이 많이 쌓인 곳에서는 길을 알아볼 수 없어서 말이나 말을 타고 가는 사람도 구덩이에 빠져 눈 속에 파묻혀 빠져나오지 못할 곳이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앵베르 주교는) 차라리 (달단 지역으로부터) 중국으로 되돌아가 북경에서 봉천(심양)으로 가는 국도로 가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였습니다.36)

 

이처럼 서만자에서 심양에 이르는 길은 검문소가 적은 데다가 언제든지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신자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던 반면에 눈이 쌓이는 겨울에는 아주 위험하였다. 반면에 앵베르 주교가 1837년에 택한 여정 즉 ‘서만자-북경-산해관-심양’의 여정은 비록 거리는 멀지만 겨울에는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다.37)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 요셉이나 서만자 안내자들이 1836년 12월에 브뤼기에르 주교가 계획했던 여정을 역순으로 따른 이유는, 모방 신부가 이미 경유했고, 서만자 안내자들도 여러 차례 왕래한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서만자로 가던 조선 신학생과 안내자들이 경유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마을로는 ‘심양~서만자’ 중간 지점에 있는 마가자(馬架子, 현 내몽고자치구 적봉시 松山區 東山鄕)가 있다. 이 마을은 1835년 10월 20일에 선종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원 무덤이 있는 교우촌으로, 모방 신부는 같은 해 11월 21일 이곳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장례 미사를 집전했으며, 이때 왕 요셉이나 서만자 안내자들도 그 자리에 함께 했었다.38) 따라서 ‘심양~서만자’ 여정에 마가자를 포함 시켜도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최양업과 동료 신학생들의 유학로는 일단 ‘변문-심양-마가자-서만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신학생들의 유학로를 밝히는 데 또 하나의 중요한 단서는 마카오의 조선교구 신학교 교장을 맡게 된 칼르리(M. Callery) 신부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조선 신학생들이 마카오에 도착한 뒤에 파리외방전교회의 신학교 교장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우리의 이 용감한 소년들은 8개월 동안 요동(Leao-Tong)과 타타르(Tartarie, ??)와 중국(대륙)을 걸어서 종단한 끝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고 하였다.39) 다시 말해 신학생들은 바다를 이용하지 않고 육로를 이용해서 마카오까지 갔던 것이다.

 

그러면 칼르리 신부가 언급한, 다시 말해 서만자 안내자들과 조선 신학생들이 그에게 알려주었을 ‘요동과 타타르 지역’은 과연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당시 브뤼기에르 주교와 앵베르 주교와 같은 프랑스 선교사들은 타타르 지역을 아주 넓게 표현하였다. 즉 그들이 말하는 타타르 지역은 서쪽으로 만리장성이 지나는 산서성 접경인 하북성 북서쪽에서부터 그 동쪽 지역, 그리고 요동에 이르는 지역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음이 확실하다. 그들은 심양(봉천)이 타타르의 중심지라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요동 지역을 ‘동부 타타르’, 그 서쪽 지역에서 산서성까지를 ‘서부 타타르’라고 불렀다.40)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칼르리 신부의 서한에 요동과 타타르라는 지명이 함께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동부 타타르(요동)와 서부 타타르(내몽고와 하북성)를 구분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신학생들의 여정 가운데 ‘변문~심양’이 요동 지역(동부 타타르)이었다면, ‘심양~서만자’는 칼르리 신부의 기록에 나타나는 타타르 지역(서부 타타르)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최양업과 동료 신학생들의 유학로는 ‘변문-심양-마가자-서만자’임이 분명하며, 그들 일행에게 휴식처요 연락처가 될 수 있었던 산서성의 장치를 포함한다면 ‘변문-심양-마가자-서만자-장치’를 유학로의 한 여정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거리는 대략 1,690km(4천 2백여 리) 정도가 된다.

 

그러면 산서성의 장치에서 최종 목적지인 마카오까지의 남은 여정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장치~마카오’ 사이의 여정은 대륙을 종단하는 육로를 택했다는 것 외에는 아직까지 추정할 만한 자료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 거리는 대략 1,780km(4천 4백여 리)가 된다.

 

 

Ⅲ.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

 

중국에서의 오랜 유학 생활을 마친 최양업 신학생은 1844년 12월 10일경 동료 김대건 신학생과 함께 장춘 인근의 팔가자 성당(현 장춘시 合隆鎭 小八家子鄕)에서 부제품을 받았고, 1849년 4월 15일에는 상해 장가루(張家樓) 성당(당시 浦東 소재)에서 나폴리 성가회의 남경교구장 마레스카(F.X. Maresca, 趙方濟)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그런 다음 요동으로 건너가 차구(?溝) 성당(현 요녕성 장하시 蓉花山鎭)에서 7개월 동안 사목한 뒤 1849년 말에는 그곳을 떠나 변문을 통해 조선으로 귀국했으며, 이후 10여 년 동안 전국을 순방하면서 사목하다가 1860년의 경신박해(庚申迫害)를 당해 ‘조선의 맨 구석 한 모퉁이’ 즉 죽림 교우촌(현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의 간월산중)에 은거해 지내야만 하였다.41)

 

박해가 잠잠해지자 최양업 신부는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시메온) 주교에게 순방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다시 교우촌 신자들을 방문하면서 서울로 향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과로로 몸이 약해진 데다가 장티푸스까지 겹쳐 쓰러졌으며, 소식을 듣고 달려온 배론 신학교(현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교장 푸르티에(J.A. Pourthie, 申妖案 요한)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1861년 6월 15일에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선종 장소에 가매장되었다가 같은 해 11월 초 배론 신학교 뒤에 있는 언덕으로 이장되어 베르뇌 주교의 장엄 예절 아래 안장되었다.42) 이와 같은 최양업 신부의 마지막 행적 가운데서 그 위치가 분명한 무덤 소재지와는 달리 선종지와 가매장지에 대해서는 각각 다른 의견들이 제기되어 왔다.

 

 

1. 진천 · 문경 · 배티 선종설과 문제 제기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를 밝힐 수 있는 자료들은 최양업 신부의 동료 선교사들이 남긴 당대의 서한들, 훗날의 전문 자료, 집안의 전승과 현존하는 구전 등이다. 이 중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자료는 목격 증인들의 1차 사료인 선교사들의 서한인데, 여기에는 아쉽게도 선종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내용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 한 가지 이유는 서한이 분실 혹은 탈취되어 선종지가 노출되지나 않을까 염려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선교사들의 서한을 검토하기에 앞서 지금까지 가장 많이 인용되어 왔고, 최양업 신부의 선종 과정과 선종지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다음의 전문 자료와 전승 들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A-① (정규량 신부의 기록) : 노인들에게 들으니, (최양업 신부님이) 항상 길로 다니시는 고로 얼굴이 항상 그을고, 갓끈 자리에 완연히 표가 드러났다고 한다. 이렇게 전교하시다가 진천군(鎭川郡) 어느 공소에서 병드사 부감목 신 신부(즉 푸르티에 신부)께 최후 성사를 받으시고 선종하셨는데, 그 귀한 시신은 배론학당 뒷산 중턱에 안장한 후 병인년 군난 후 수십 년 동안은 실전되었더니, 10여 년 전(즉 1910년대)에 다시 찾을 때에는 무주고총과 같이 그 분묘 위에 수목이 성림한 것을 벌목 개초하여 지금까지 그곳에 계셔 부활 기약을 기다리시더라.43)

 

A-② (최우정의 이력서) : (최양업 신부님이) 12년간 전교하시다가 마침 경상도의 전교를 마치시고 돌아오시는 길에 병이 깊어져 문경(聞慶)읍에서 괘약(掛藥, 즉 약국)하시는 교우 이씨 집에 들어가 치료하시나 병세는 점점 위중하시었다. 이에 제천 배론의 신 신부께 병보를 고하매, 신 신부가 즉시 오사 최후 성사를 영수하시고 선종하시니, 때는 신유년(1861년) 6월의 일이었다. 신 신부가 지도하사 제천군 봉양면 배론리 중동 후록(後麓)에 안장하여, 현금까지 산소가 그곳에 계시니라.44)

 

A-③ (최양업 신부의 이력서) : (최양업 신부님은) 그러시다가 무더운 6월경(음력)에 경상도로 전교 가셨다가 돌아오시는 길에, 문경 고을로 오시어서 점심을 못 하시고 약주만 몇 잔 잡수셨는데, 잘 마련하지 못한 황육(즉 쇠고기)을 잡수시고 크게 체하시어 말 위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시었다. 모시고 가던 복사가 민망히 여겨 여쭙기를, ‘너무나 불편하신 모양이오니, 이 문경읍의 평창이씨(平昌李氏)라는 교우 한 집이 괘약하고 있사오니, 그 집으로 들어가셔서 치료하심이 필요한 줄로 아옵니다. 그 집으로 가십시다’ 하고 간간이 고하였으므로 허락하시고, 이씨 집으로 들어가셔서 선약(仙藥)으로 치료하셨으나 백약이 무효하고 증세는 날로 위중하셨다. 제천 배론에 계시는 신 신부께 병보를 고하니, 신 신부께서는 즉시 오시어 최후 성사를 다 받으시고, 1861년 음6월 10일(음5월 8일의 잘못)에 편안히 선종하셨다. 신 신부님의 주선과 지도로 상여를 꾸며 영화로이 운구하여 제천 배론의 신학원 뒷산에 안장한 뒤에, 최 신부의 둘째 계씨 야고버(즉 최희정 야고보)가 상경하여 장 주교(즉 베르뇌 주교)를 뵙고 애절한 기별을 전했다.45)

 

A-④ (유영근 신부의 기록) : 최 도마(토마스) 신부가 시골서 서울로 올라오시다가 문경 새재 주막에서 시장하신 판에 무슨 고기를 잡수신 것이 섭체(즉 체증)가 되어 고생하시며 오시다가 진천 배티(현 충북 진천군 양백리의 梨峙)에 오셔서 고만 누워 앓으시고 거기서 임종하셨다 하더라.46)

 

A-①은 원주 본당에 재임(1928~1938)하던 정규량(鄭圭良, 레오) 신부가 최경신(바르나바, 약 82세)의 증언을 듣고 1929년에 기록한 것으로,47)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증언자 최경신은 1848년경에 출생하여 18세가 될 때까지 배론에서 살았던 신자로,48) 1861년 11월(최경신의 나이 약 14세)에 있은 최양업 신부의 이장과 장례식을 직접 목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1929년 증언 당시에는 원주 용소막 본당 아래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나이에서 볼 때 위의 증언은 이장 당시의 목격 증인들에게 전해 들은 전문 자료일 가능성이 높다. 바로 이 내용이 ‘진천 (공소) 선종설’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공소(公所)는 박해기의 교우촌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A-②는 최양업 신부의 셋째 아우인 최우정(崔禹鼎, 바실리오)의 맏아들 최상종(崔相鍾, 빈첸시오)이 1939년 1월 10일에 기록한 것이고, A-③은 최상종이 1945년 광복 직후에 신자들이 배론의 무덤 앞에 묘비를 세우자 여기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기록한 것으로, 이른바 ‘문경 (약국) 선종설’의 진원지가 된 내용들이다. 최우정(1832~1886)이 혼인한 해가 1853년경이고, 최상종이 탄생한 해는 1870년이므로49) 최양업 신부가 선종할 당시 최상종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따라서 위의 내용은 그가 성장한 후에 들었을 집안 전승에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최상종이 A-②의 기록을 남겼을 때는 만 69세였고, A-③의 기록을 남겼을 때는 약 75세였다.

 

그러나 ‘문경 (약국) 선종설’의 배경이 된 최상종의 A-②와 A-③의 기록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발견된다.

 

첫째, 최상종은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 가매장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둘째, 베르뇌 주교가 최양업 신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상황에서 푸르티에 신부가 선종 직후 모든 장례 절차를 주관한 것처럼 서술하였다.

 

셋째, A-②에 보이지 않던 내용, 즉 최양업 신부의 선종 이유가 과로나 장티푸스가 아닌 ‘황육(쇠고기)에 의한 체증’ 때문이라는 내용이 A-③에 새로 추가되었다.

 

위와 같은 오류가 발견되는 이유는, 집안의 전승 과정에서 와전된 내용이나 최상종 자신이 훗날에 덧붙인 내용이 첨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신뢰성은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50) 특히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 가매장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점과 배론 이장 후 베르뇌 주교가 장엄 예절을 주관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점은 위의 ‘문경 선종설’에서 가장 큰 단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아울러 A-③에서 ‘(최희정) 야고보가 상경하여 베르뇌 주교를 뵙고 애절한 기별을 전했다’고 기록함으로써 마치 최양업 신부의 첫째 아우인 최희정(崔羲鼎, 야고보)이 최양업 신부의 안장 사실을 듣고 상경하여 베르뇌 주교에게 이 사실을 비로소 알린 것처럼 기록한 내용은 잘못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최상종이 집안의 전승에 따라 위의 내용들을 기록하였다면, 그 전승 자체에 오류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최양업 신부와 절친했던 페롱(S. Feron, 權 스타니슬라오) 신부는 선종 장소에 대해 “(배론)신학교에서 12리외 정도 떨어진 한 작은 교우촌(une petite chretiente)”51)이라고 했는데, A-②와 A-③에 나오는 문경읍은 ‘한 작은 교우촌’ 즉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교우촌에 해당되지 않는다. 실제로 최양업 신부의 선종 장소는 서양 선교사인 푸르티에 신부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방문할 수 있던 장소라야 더 타당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52) 다만, 페롱 신부가 전해들은 12리외의 거리는 전문 과정에서 생겨난 잘못이거나 거리 개념 상의 차이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53)

 

A-④는 원주본당에 재임했던(1939년) 유영근(兪榮根, 요한) 신부가 전임 정규량 신부에게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11년 뒤인 1950년 무렵에 작성하여 경향잡지사에 투고한 것인데, 유 신부가 1950년의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된 후 경향잡지사에서 이전의 투고 원고 중에서 남아 있는 부분을 1956년 4월호의 《경향잡지》에 게재한 것이다. 여기에는 특히 정규량 신부의 A-①에 없었던 ‘문경 새재 주막’과 ‘진천 배티’라는 지명, 오류가 분명한 ‘고기 체증’이라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54) 유영근 신부의 이 기록이 바로 ‘배티 선종설’이다.

 

위의 A-④ 기록은 그 내용과 작성 시기에서 볼 때, 유영근 신부가 1939년 정규량 신부로부터 최경신의 본래 증언을 들은 뒤 다른 경로를 통해 알게 된 내용들을 추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1939년에는 윤의병(尹義炳, 바오로) 신부가 진천 삼박골(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용덕리)과 배티를 무대로 지은 박해소설 《은화(隱花)》가 《경향잡지》(1939. 1~1950. 6)에 게재되기 시작할 때였다. 이후 유영근 신부는 장호원 본당 재임 시절에 최양업 신부의 행적과 배티 인근의 교우촌 흔적을 조사했으며,55) 충주 본당 재임 시절인 1949년부터 〈최 도마 신부 전기〉를 《경향잡지》에 게재하였다.56) A-④의 기록이 바로 그 일부분이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유 신부는 최상종이 기록한 A-②와 A-③의 내용을 접하거나 정규량 신부의 진천 선종설에 문경 (새재 주막) 발병설과 배티 선종설을 추가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유영근 신부의 기록은 A-①과 같은 전문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그만큼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2. 기존 연구와 진천 선종설 검토

 

그동안 연구자들은 대체로 문경 선종설을 주장해 왔다.57) 그러다가 류한영이 최근의 연구에서 최양업 신부가 병을 얻은 곳은 경상도 문경이고, 선종한 곳은 진천의 어느 공소 즉 진천의 일송정(현 진천군 백곡면 건송리)일 가능성이 크며, 가매장지는 진천 배티 교우촌이라는 의견을 제기하였다.58) 마찬가지로 원재연은 문경 선종설을 따르면서 최양업 신부의 가매장지만은 그의 첫째 아우인 최희정과 제수 이 마리아 부부가 살던59) 일송정 인근의 바라산 즉 발래기(현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가 유력하다고 설명하였다.60) 그러나 이 발래기 가매장지설에 따른다면, 과연 그 집안에서 가매장에 대한 전승이 내려오지 않았을까? 뿐만 아니라 같은 집안의 전승인 A-②와 A-③에서 보는 것과 같이 전혀 다른 문경 (약국) 선종설이 나올 수 있었을까 의문이다.

 

이와 함께 원재연 · 류한영의 연구에서 언급한 ‘일송정 공소’61)는 고옥자(마리아, 1940년생)에게서 채록한 최근의 구전에 나온다. 그러나 그 전문 과정에 의심스러운 점이 많다.62) 또 그 전문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일송정 공소는 상당히 중요한 교우촌이나 공소였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박해기의 교회 기록에는 그 이름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일송정 공소를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와 관련지어 설명하려면 먼저 이 공소에 대한 고증과 신뢰성 여부가 선결되어야만 할 것이다.

 

최근의 구전들은 원형이나 근거가 없는 데다가 와전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사실들이 하나씩 부연 되거나 근거 없는 내용들이 첨가되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승자들의 생각에 고착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 진위 여부가 확실히 가려진 뒤에야 자료로 이용할 수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고옥자(마리아)의 구전뿐만 아니라 최양업 신부 집안의 구전 즉 최신정 · 송 아가다의 손녀 최현수(요안나, 1902경~1978)의 진천 선종설,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각되는 또 다른 구전들도63) 원형이나 근거가 확인되지 않는 한 변질되었다는 의심을 극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이 구전의 내용들은 증언자의 나이나 채록 시기에서 볼 때, 유영근 신부의 A-④ 내용(배티 선종설)이 널리 알려진 뒤에 재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와 관련해서는 정규량 신부의 기록인 A-①에 나오는 ‘진천 선종설’이 가장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단순한 내용이지만, 오히려 이 내용이 최상종의 기록이나 유영근 신부의 기록보다 더 신뢰성이 높고 오류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천 선종설’이 타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를 밝히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되는 푸르티에 신부의 서한에 담긴 열쇠를 풀어야만 할 것이다.

 

B-① (1861년 10월 20일자 서한) 이 해의 가장 주요한 사건은 방인 사제 토마스의 애석한 죽음입니다. 그는 갑자기 장티푸스에 걸려 15일에서 16일 동안 병을 앓다가 쓰러졌습니다. 그가 누워있었던 집은 저의 거처에서 17리외(lieues) 내지 18리외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의 상태를 전해들은 것이 너무 늦어서 저는 그가 숨을 거두기 8시간 내지 9시간 전에 간신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64)

 

B-② (1861년 11월 2일자 서한) 장티푸스가 매우 애석하게도 훌륭한 방인 사제 토마스를 우리에게서 빼앗아갔습니다. 그는 매우 위중한 상태에서 나의 산에서 17리외 떨어진 한 교우 집(une maison chr tienne)에 간신히 도착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즉시 나는 그곳으로 달려갔고, 그가 운명하기 8시간 내지 9시간 전에 도착했습니다.65)

 

위의 서한 내용을 종합해서 시간대별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최양업 신부는 장티푸스에 걸려 위중한 상태로 한 신자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둘째, 그가 장티푸스로 앓은 기간은 15~16일 동안이었다.

 

셋째, 그가 앓던 신자집은 푸르티에 신부가 있던 배론 신학교에서 17리외(혹은 17~18리외) 떨어져 있었다.

 

넷째, 푸르티에 신부는 최양업 신부가 선종하기 8~9시간 전에 도 착할 수 있었다.

 

이 중에서 첫째와 둘째 내용을 종합하여 ‘최양업 신부가 병을 얻은 뒤 15~16일 동안 이동해서 앓던 신자집’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66) 이미 지적된 것과 같이 병자가 이처럼 긴 시간을 이동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며,67) 따라서 ‘장티푸스에 걸린 최양업 신부가 위중한 상태로 도착한 신자집에서 15~16일 동안 앓았다’고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그 신자집은 페롱 신부가 기록한 대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한 작은 교우촌에 있었고, 따라서 푸르티에 신부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이 집을 방문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당시의 선교사들은 나름대로 상당히 정확한 거리 개념을 갖고 있었지만, 실제의 거리 개념은 1리외를 ‘10리’로 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페롱 신부도 1리외를 10리로 보았으며,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페롱 신부가 기록한 ‘배론~선종지’ 사이의 12리외는 그의 거리 개념으로 볼 때 120리에 해당한다. 그러나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안토니오) 주교와 같이 1리외를 ‘6.8리’로 보거나 프티니콜라(M.A. Petitnicolas, 朴 미카엘) 신부와 같이 1리외를 ‘8.9리’ 본 선교사들도 있었다고 한다.68)

 

푸르티에 신부의 거리 개념은 1856년 10월 6일자 서한에 유일하게 나타나는데, 그는 자신이 조선어를 배우는 경기도의 손골[蓀谷] 교우촌(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에서 프티니콜라 신부가 있던 홍산 내대(內垈) 교우촌(현 충남 부여군 외산면 갈산리)까지 25리외라고 하였다.69) 아마도 이 거리는 손골 신자들이 가르쳐 준 것으로, 푸르티에 신부가 이를 자신의 거리 개념으로 삼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손골~내대’의 거리는 당대의 거리 개념인 〈대동여 지도〉(손골-평택-예산-청양-내대) 상으로 305~325리에 해당한다.70)

 

이렇게 볼 때 푸르티에 신부가 말하는 1리외의 거리 개념은 조선 후기의 ‘약 12.6리’(315리 : 25리외)이고, ‘배론~선종지 17리외(혹은 17~18리외)’는 〈대동여지도〉 상에서 약 214~226리가 되어야 한다.71) 그런데 정규량 신부의 A-①에 나오는 진천의 공소(교우촌)들은 다음에서 보는 것과 같이 모두 이 범주에 포함될 수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타당성을 얻는다. 배론에서 가장 먼 배티까지의 거리가 〈대동여지도〉 상에서 220리 정도가 되기 때문이다.

 

  

 

 

3. 선종지 진천 공소와 남은 과제

 

그러면 ‘진천의 어느 공소’ 즉 페롱 신부가 기록한 ‘한 작은 교우촌’ 혹은 푸르티에 신부가 기록한 ‘한 교우집’은 지금의 어디였을까? 박해기의 기록에 나타나는 진천 지역의 공소로는 배티 · 삼박골을 비롯하여 발래기(퉁점 포함), 용진골(절골 · 정삼이골 포함, 백곡면 용덕리), 지장골(진천읍 지암리), 새울(이월면 신계리), 동골(진천읍 문봉리 · 연곡리 혹은 백곡면 용덕리) 등으로, 이들은 대부분 신자 공동체형의 순수한 교우촌들이었다.72) 또 이 지역은 1858년 10월 이후 프티니콜라 신부의 사목 관할구역에 속해 있다가 경신박해가 계속되던 1860년 5월경 프티니콜라 신부가 서울로 피신하면서 담당 사제가 없는 상황이었다.73)

 

진천 지역의 신자들은 경신박해로 인해 포졸들에게 쫓기거나 약탈을 당해야만 했고,74) 진천의 옹견이(Hong-kien-i, 백곡면 용덕리의 용진골로 추정됨)와 정삼이 교우촌은 천주교 신자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75) 따라서 이 마을과 이웃해 있던 절골 교우촌도 위험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옹견이는 배티의 장 시몬 회장과 함께 프티니콜라 신부를 서울로 피신시킨 배 바오로 회장이 살던 마을이었다.76) 또 동골 교우촌 신자들은 박해 때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이때 동골에 살던 최양업 신부의 셋째 아우 최우정(바실리오) · 송 막달레나 부부도 그곳을 떠나 상경하였다.77) 이후 동골 신자들은 다시 이곳에 모여 살았고, 1862년 10월에는 페롱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78)

 

한편 프티니콜라 신부가 경신박해 이전인 1859년 말까지 거처하던 배티 교우촌과 다른 교우촌들은 경신박해로 큰 피해를 입은 것 같지 않다. 게다가 1862년 가을에는 페롱 신부가 배티 교우촌에 거처한 사실이 나타난다.79)

 

이렇게 볼 때, 진천의 동골 · 배티 · 삼박골 · 발래기 · 지장골 · 새울 교우촌은 모두 장티푸스에 걸려 찾아온 최양업 신부를 보호하고 보살펴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최희정 부부가 거주하던 발래기 (퉁점)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또 배티 교우촌은 1862년 가을부터 페롱 신부가 거처한 곳이었고, 동골 교우촌은 같은 해 10월에 페롱 신부가 방문한 곳이었으므로80) 만일 이곳이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였다면, 그리고 이곳에 가매장되었던 시신이 1년 전에 배론 뒷산으로 이장되었다고 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페롱 신부의 서한에서 이러한 사실이 언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서한에는 이와 관련된 어떠한 내용도 나타나지 않는다.

 

사실 진천 교우촌들은 1857년 12월에서 다음해 10월까지 페롱 신부의 사목 관할 지역이었고, 그는 이때 배티의 장 시몬 회장을 복사로 임명하기도 했었다.81) 따라서 ‘진천의 어느 공소’에 해당하는 남은 교우촌들인 삼박골 · 지장골 · 새울 교우촌도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들 교우촌이 선종지요 가매장지였다면, 페롱 신부가 그곳을 ‘신학교에서 12리외 정도 떨어진 한 작은 교우촌’으로 표기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최양업 신부가 진천의 어느 공소에서 선종했다면, 그 교우촌은 당시의 선교사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제 푸르티에 신부의 서한 기록과 후대의 전승 자료인 A-①의 기록, 그리고 다른 선교사들의 기록을 종합해서 설명한다면, 최양업 신부가 선종할 당시의 상황과 선종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경신박해 이후의 과도한 선교 활동으로 인한 과로에도 불구하고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그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상경하던 최양업 신부는 장티푸스까지 걸리자 진천 공소 즉 진천의 한 작은 교우촌을 찾아가 그곳의 집에 유숙하면서 15~16일 동안 앓아눕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병이 더욱 위중해지자 복사로 추정되는 신자82)가 17~18리외(약 214~226리) 거리의 배론 신학교 교장 푸르티에 신부에게 이를 알렸으며, 최양업 신부는 그에게서 병자성사를 받고 1861년 6월 15일에 선종한 뒤 진천의 작은 공소(교우촌)에 가매장되었다.

 

 

Ⅳ. 맺음말

 

서울에서 마카오까지 이어지는 넓은 공간에서 최양업과 동료 신학생들의 유학로를 정확히 밝힌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동안 이들의 여정이 막연하게 설명되어 온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연구는 최양업 신부의 행적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요, 교회사의 한 부분을 밝혀내는 작업도 된다. 이에 필자는 오랫동안 여기에 관심을 갖고 관련 자료 들을 섭렵하거나 현지를 답사하면서 확인하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그 결과 최양업과 동료 신학생들은 중국 변문에 도착한 1836년 12월 28일에 샤스탕 신부를 북경 인근에서 그곳까지 안내한 산서성 출신의 왕 요셉과 서만자 안내자 즉 Touan 마리아노와 Tchen 요아킴을 만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샤스탕 신부가 특별히 요청한 안내자들이고, 조선 신학생들을 마카오까지 인도한 사람들이었다.

 

조선 신학생들은 일단 안내자들을 따라 변문에서 라자로회의 예비 신학교가 있던 서만자까지 간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 그들은 도중에 브뤼기에르 주교가 선종한 교우촌이자 모방 신부가 주교의 시신을 안장했던 마가자도 경유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만자와 함께 중국의 북동부와 남부 지역을 이어주는 선교 루트에서 중요한 연결 고리 역할을 했던 산서성의 장치도 경유한 것이 거의 확실하다. 왕 요셉은 이곳 장치까지만 신학생들과 함께 하였고, 마리아노와 요아킴이 마카오까지 신학생들을 인도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최양업과 동료 신학생들의 유학로는 ‘변문-심양-마가자-서만자-장치’로 이어졌다. 그중 변문에서 심양에 이르는 요동 지역은 당시의 선교사들이 말하는 동부 타타르 지역이고, 심양에서 서만자까지의 여정은 서부 타타르 지역이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아쉽게도 장치까지의 유학로만 밝힐 수 있었고, 이후의 여정은 육로를 택했다는 것 외에는 아직까지 추정할 만한 자료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1861년 6월 15일에 선종한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와 가매장지에 대해서는 그 동안 진천 (공소) 선종설, 문경 (약국) 선종설, 배티 선종설이 제기되어 왔다. 그리고 이에 대한 근거 자료는, 첫째 정규량 신부가 1929년에 기록한 최경신의 전문 내용, 둘째 최상종이 1939년과 1945년경에 기록한 두 가지 전승, 셋째 유영근 신부가 1949년에 기록한 내용 등 세 가지로 구분된다.

 

반면에 최양업 신부의 선종을 직접 목격한 푸르티에 신부의 서한, 선종 사실을 전해듣고 기록한 페롱 신부의 서한 등에는 선종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내용이 없다. 뿐만 아니라 최근의 구전들은 와전되거나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그 신빙성을 인정할 수 없다.

 

이 중에서 최상종의 기록은 집안의 전승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 가매장 사실을 알지 못했던 점, 베르뇌 주교가 장례 미사를 집전한 사실을 몰랐다는 점, 선종 이유를 사실과 다르게 황육에 의한 체증 때문이라고 기록한 점 등은 큰 약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또 유영근 신부의 기록은 1939년에 들었던 최경신의 증언 내용에 자신의 의견을 추가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에 대한 근거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신뢰성이 떨어진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정규량 신부의 전문 기록 즉 ‘진천 선종설’이 원형에 가까우면서도 가장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진천 지역의 공소(교우촌)들은 모두 푸르티에 신부가 기록한 것과 같이 ‘배론~선종지’ 사이의 거리 개념 즉 ‘17리외(혹은 17~18 리외)’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푸르티에 신부의 이 거리 개념은 〈대동여지도〉 상에서 약 214~226리가 되는데, 배론에서 가장 먼 진천의 배티 교우촌도 〈대동여지도〉 상에서 220리 정도 되기 때문이다.

 

박해기의 진천 공소(교우촌) 중에서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백곡면의 배티 · 삼박골 · 발래기(퉁점) · 용진골(절골 · 정삼이골), 진천읍의 지장골, 이월면의 새울, 현재의 지명이 확실치 않은 동골 등이 있다.

 

그러나 이 교우촌들을 페롱 신부의 기록에 나오는 작은 교우촌, 다시 말해 그의 사목 관할 지역이었던 진천 지역에서 그가 들어보지 못한 교우촌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 이들이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요 가매장지였다면, 분명 이에 대한 전승이나 관련 기록이 전해졌을 것이라는 점 때문에 선종지로 보기 어렵다. 최양업 신부가 진천의 어느 공소(교우촌)에서 선종했다면, 그곳은 선교사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었음이 분명하다.

 

 

[참고문헌]


1. 원사료 및 사료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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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외방전교회 한국 관련 문서(1797~1874)〉(A-MEP Vol.579)

〈마카오 극동대표부 문서집〉(A-MEP Vol.303)

〈앵베르 주교 서한집〉(A-MEP Vol.1254) : 역주본 - 〈파란 눈 목자와의 대화〉 《상교우서(上敎友書)》 3~28호, 수원교회사연구소, 2004~2010

〈모방 신부 서한집〉(A-MEP Vol.1260)

〈샤스탕 신부 서한집〉(A-MEP Vol.1256)

〈푸르티에 신부 시복관련 문서〉, A-MEP, Vol.15

〈프티니콜라 신부 시복관련 문서〉, A-MEP, Vol.14 

 

2. 연구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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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회사연구소, 《교회사학》 6호(특집 - 최경환 성인과 수리산 성지, 동 연구소, 2009)

양업교회사연구소, 《최양업 신부의 선교 활동과 천주가사》(양업연구총서 제2집, 동 연구소, 2003)

양업교회사연구소, 《최양업 신부의 사목 지역과 선종지 연구》(양업연구총서 제4집, 동 연구소, 2007)

《한국천주교회사》 3,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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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천주교 전주교구, 1998

배은하, 《역사의 땅, 배움의 땅 배론》, 성바오로출판사, 1992

한국천주교창립200주년기념 인천교구준비위원회, 《성지 II》, 성황석두루가서원, 1981

차기진, 〈최양업 신부와 배티성지〉, 《교회와 역사》 206호, 1992

―――,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 활동의 배경〉, 《최양업 신부의 선교 활동과 천주가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3

―――,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에 대한 연구 : 요동 차구와 진천 동골 · 배티를 중심으로〉, 《최양업 신부의 사목 지역과 선종지 연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7

―――, 〈최양업 신부의 사목 관할 구역과 관련 지명 연구〉,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천주교 청주교구, 2009

―――, 〈조선 후기 충청좌도의 천주교 전파 과정 연구〉, 《한국 천주교회사의 빛과 그림자》, 디자인흐름, 2010

정양모, 〈최양업 신부의 사목과 사상〉, 《한국 가톨릭 文化活動과 敎會史》(성농 최석우 신부 고희 기념),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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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행적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양업교회사연구소, 《최양업 신부의 선교 활동과 천주가사》(양업연구총서 제2집, 동 연구소, 2003)를 참조.

 

2) 양업교회사연구소, 《최양업 신부의 사목 지역과 선종지 연구》(양업연구총서 제4집, 동 연구소, 2007)

 

3) 수원교회사연구소, 《교회사학》 6호(특집 - 최경환 성인과 수리산 성지, 동 연구소, 2009)

 

4) 원재연,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 연구 : 교회 안의 전승을 중심으로〉; 류한영, 〈동료 선교사들의 서한을 중심으로 한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 연구〉, 《최양업 신부의 사목 지역과 선종지 연구》, 2007.

 

5) 〈모방 신부가 조선 신학교 교장에게 보낸 서약서〉, A-MEP(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 Vol.1260, p.99. 이에 따르면, 최양업 신부의 고향은 조선 후기까지 ‘다리골’로 불린 것이 분명하다. 이곳은 현재 ‘다락골 새터’라고 불리는데, 그 지명 유래를 찾아보면 ‘본디 달안골[月內洞]로 불리다가 후에 다락골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위에서 말하는 ‘다리’는 예전에 여자들이 머리숱을 많게 보이려고 덧넣은 다리[月乃]에서 나온 말로, 여기에 마을을 뜻하는 골[洞]이 덧붙여져 ‘다리골’이라 하였고, 이것이 다시‘월내동(月乃洞)→월내동(月內洞)→달안골→다락골’로 변한 것이다. 따라서 다락골의 한자를 누곡(樓谷)으로 적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이하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는 A-MEP로 표기함.

 

6) 조선 신학생들의 서약 날짜는 12월 3일이 아니라 12월 2일이고, 서울을 출발한 날짜는 12월 3일이라는 것이 최근에 새로 확인되었다(청주교구배티성지 · 양업교회사연구소 편,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 천주교 청주교구, 2009, pp.15~16).

 

7) 신학생들을 인도한 4명의 밀사에는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많다(《일성록》, 헌종 5년 기해 8월 7일, 鄭牙各伯口招; 8월 15일, 趙信喆結 案). 샤스탕 신부도 자신을 맞이한 밀사들이 4명이라고 하였다(〈샤스탕 신부가 알르망(Alemand) 지도자 신부에게 보낸 1836년 12월 30일자 서한〉, A-MEP, Vol.1256, p.86).

 

8)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 활동의 배경〉, 《최양업 신부의 선교 활동과 천주가사》, p.21.

 

9) 한국천주교창립 200주년기념 인천교구준비위원회, 《성지 II》, 성황석두루가서원, 1981, p.34.

 

10) 이원순 · 허인 편, 《김대건의 편지》, 성요셉출판사, 1983; 《한국가톨릭대사전》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배티 사적지 편, 《최양업 신부의 서한》, 천주교 청주교구, 1996;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동 연구소, 1996; 《한국천주교회사》 3,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p.163.

 

11) 천주교 개포동 성당 현양위원회,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행기와 서한집》, 천주교 개포동 성당, 2005, pp.81~82. 브뤼기에르 주교와 사천(四川) 선교사 모방 신부 등은 1832년 12월 17일 마카오를 출발하여 1833년 3월 1일 도미니코회의 선교 본부가 있던 복건(Fokien)성의 성도인 복주의 푸간(侯官, Fougan)에 도착하였고, 모방 신부는 3월 9일 이곳에서 조선 선교를 자원한 뒤 북쪽의 힝화(興化, Hing-hoa)로 가서 머물렀다. 푸간은 복주시 북쪽 약 18km에 있는 민후현(?侯縣)의 옛 이름이고, 힝화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활동하던 지역이었다. 1680년 복건대목구 설정 당시 파리외방전교회가 맡았던 복건성 지역의 선교는 1718년 스페인의 도미니코회에 위임되었으며, 파리외방전교회 선교 구역으로 남아 있던 힝화 지역도 훗날 복건대목구에 통합되었다.

 

12) F. Fauconnet-Buxelin, Mourir pour la Coree Jacques Chastan, Paris : L'Harmattan, 1996, p.144.

 

13) 모방 신부는 ‘서만자(西灣子)-마가자(馬架子)-심양-변문’을 거쳐 1836년 1월 13일 조선에 입국했으며(〈모방 신부의 1836년 4월 4일자 서한〉, A-MEP, Vol.1260, pp.77~82; 정양모 · 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가톨릭출판사, 1997, 36쪽), 샤스탕 신부는 ‘산동-북경-심양-변문’을 거쳐 1836년 12월 31일 조선에 입국하였다(F. Fauconnet-Buxelin, Op.Cit, p.184). 위의 서만자와 마가자는 다음 본문에서 설명할 것이다.

 

14) 〈모방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6년 12월 3일자 서한〉, A-MEP, Vol.1260, pp.105~107.

 

15) 〈샤스탕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6년 10월 26일자 서한〉, 〈샤스탕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8년 10월 10일자 서한〉, A-MEP, Vol.1256, p.75 ? 115 ; 〈샤스탕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알르망 교장 신부에게 보낸 1838년 10월 16일자 서한〉, Œuvres de la Propagation de la Foi, No. 4, p.3.

 

16) 〈샤스탕 신부가 알르망 지도자 신부에게 보낸 1836년 12월 30일자 서한〉, 〈샤스탕 신부가 친척들에게 보낸 1837년 9월 12일자 서한〉, 〈샤스탕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지도자 신부와 대표 신부들에게 보낸 1837년 9월 15일자 서한〉, A-MEP, Vol.1256, pp.85~87 · 93~96 · 97~103.

 

17) 〈바랑탱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보낸 1837년 6월 13일자 서한〉, A-MEP, Vol.303, p.965.

 

18) 필자는 지난 2005년 7월 16~18일에 서만자를 찾아가 그곳의 요량(姚良, 레오) 부주교(2009년 12월 30일 선종)와 함께 브뤼기에르 주교가 거처했던 이전의 예비 신학교 위치와 피신처였던 토굴집들(현재도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했으며,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 신부가 조선 입국을 위해 여행했던 ‘서만자~마가자’도 답사하였다.

 

19) 〈샤스탕 신부가 산동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6년 3월 4일자 서한〉, 〈샤스탕 신부가 요동에서 지도자들에게 보낸 1836년 5월 1일자 서한〉, A-MEP, Vol.1256, p.63 · 67.

 

20) 《일성록》 헌종 5년 기해 8월 15일, 조신철결안.

 

21) 〈샤스탕 신부가 산동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6년 9월 16일자 서한〉, A-MEP, Vol.1256, pp.71~73.

 

22) 《推案及鞫案》, 도광 19년 기해 8월 7일, 鄭牙各伯供述; 〈샤스탕 신부가 산동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6년 10월 26일자 서한〉, 〈샤스탕 신부가 심양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6년 12월 18일자 서한〉, A-MEP, Vol.1256, p.75 ? 77.

 

23) 〈샤스탕 신부가 심양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6년 12월 18일자 서한〉, A-MEP, Vol.1256, p.78 ; F. Fauconnet-Buxelin, Op.Cit, pp.193~194.

 

24) 중국 사천성 선교사로 모팽(Mo-pin) 신학교(현 사천성 雅安市 寶興縣)를 설립한 것으로 유명한 앵베르 주교는 1836년 4월 26일 조선대목구의 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837년 5월 14일 주교로 서품됨과 동시에 이미 선종한 브뤼기에르 주교를 승계하여 제2대 조선대목구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8월 17일에 사천을 떠나 10월 말경에는 라자로회의 선교지인 하북성의 서만자에 도착해서 보름 동안 머물렀고, 11월 13일에는 그곳을 떠나 조선으로 향하였다(〈앵베르 주교가 앙리 볼로(Henri Bolot) 씨에게 보낸 1837년 12월 6일자 서한〉, A-MEP, Vol.1254, p.94 ; 최세구 감수, 김미연 · 엄윤숙 역주,〈파란 눈 목자와의 대화〉, 《上敎友書》 11호, 수원교회사연구소, 2006. 6, pp.48~49). 이하 앵베르 주교의 서한 내용은 《상교우서》의 역문에 힘입었음을 밝혀둔다.

 

25) 〈앵베르 주교가 파리 신학교 교장과 지도자 신부들에게 보낸 1838년 11월 30일자 서 한〉, 〈앵베르 주교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8년 12월 3일자 서한〉, A-MEP, Vol.1254, pp.108~109 · 134~135 ; 《상교우서》 7 · 21 · 22호, 2005. 6, pp.41~43, 2008. 12, 34~35쪽, 2009. 3, pp.26~28.

 

26) 〈앵베르 주교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8년 12월 3일자 서한〉, A-MEP, Vol.1254, p.135; 《상교우서》 22호, 2009. 3, p.27.

 

27) 〈바랑탱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보낸 1837년 6월 13일자 서한〉, A-MEP, Vol.303, p.965.

 

28) 〈앵베르 주교가 앙리 볼로 씨에게 보낸 1837년 12월 6일자 서한〉, 〈앵베르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지도자들과 마카오 경리부장(대표) 신부에게 보낸 1837년 12월 8일자 서한〉, 〈앵베르 주교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8년 12월 3일자 서한〉, A-MEP, Vol.1254, pp.94 · 103 · 134~135; 《상교우서》 11 · 13 · 22호, 2006. 6, p.59, 2006. 12, pp.48~49, 2009. 3, pp.26~29. 앵베르 주교는 서만자에 있을 당시에 이미 범 요한의 사제 수품을 주선해 주도록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그의 수품 허가장을 보냈으며, 조선에 입국하기 전에 그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냈다.

 

29) 물리(1807~1868) 신부는 프랑스 출신으로, 1831년 4월 2일 라자로회 선교사로 사제품을 받았으며, 1840년 8월 23일 몽골대목구장 주교로 임명되었고, 1846년 4월 28일에는 북경대목구 대리로 임명되었다가 1856년 1월 3일 북경대목구장에 임명되었다(http://www.catholic-hierarchy.org).

 

30)〈앵베르 주교가 파리 신학교 교장과 지도자 신부들에게 보낸 1838년 11월 30일자 서한〉, 〈앵베르 주교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8년 12월 3일자 서한〉, A-MEP, Vol.1254, p.108 · 134 ; 《상교우서》 7 · 22호, 2005. 6, p.42, 2009. 3, p.26.

 

31) http://www.catholic-hierarchy.org ; http://en.wikipedia.org/wiki. 산서대목구는 1890년 6월 17일 ‘남산서대목구’로 개칭되고, 동시에 ‘북산서대목구’(선교 본부: 太原)가 분리 설정되었다.

 

32) 〈앵베르 주교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8년 12월 3일자 서한〉, A-MEP, Vol.1254, p.134 ; 《상교우서》 22호, 2009. 3, p.26.

 

33) 〈앵베르 주교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38년 12월 3일자 서한〉, A-MEP, Vol.1254, p.134 ; 《상교우서》 22호, 2009. 3, p.26. 앵베르 주교는 왕 요셉이 사제품을 받으면 조선대목구를 위한 타타르(??) 지역의 연락소 책임까지 맡길 생각이었다고 한다.

 

34) 천주교 개포동 성당 현양위원회, 앞의 책, 178쪽 ; 〈앵베르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지도자들과 마카오 경리부장(대표) 신부에게 보낸 1837년 12월 8일자 서한〉, A-MEP, Vol.1254, p.101 ; 《상교우서》 13호, 2006. 12, p.46. 브뤼기에르 주교에 의하면, 서만자의 예비 신학교는 라자로회의 쉬에 신부가 설립한 것으로, 학생들을 마카오의 성 요셉 신학교로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35) 〈앵베르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지도자들과 사천 ? 통킹 ? 코친차이나 교구로 보낸 1838년 11월 24일자 서한〉, A-MEP, Vol.1254, p.169; 《상교우서》 15호, 2007. 12, pp.32~33.

 

36) 〈앵베르 주교가 앙리 볼로 씨에게 보낸 1837년 12월 6일자 서한〉, A-MEP, Vol.1254, p.94; 《상교우서》 11호, 2006. 6, p.48.

 

37) ‘심양~서만자’의 실제 거리를 추정해 보면, 브뤼기에르 주교가 택한 여정은 약 820km였고, 앵베르 주교가 택한 여정은 약 995km였다. 이 거리 추산은 ‘변문~심양’까지의 직선 거리(168km)와 실제 거리(192km, 1.14배)의 비율로 계산한 것이다. 

 

38) 필자는 지난 2004년 7월 6~7일에 19세기의 〈만주 선교 지도〉(파리외방전교회 소장)를 바탕으로 Pie-lie-keou(別拉溝, 마가자 · 동산의 옛 이름) 교우촌을 찾아 브뤼기에르 주교의 원 무덤을 확인했고, 2006년 1월 18일에는 마가자 인근 마을(大丈房村)에서 1월 10일에 발견된 브뤼기에르 주교의 원 묘비를 사진으로 확인하였다.

 

39) 〈칼르리 신부가 파리 신학교 교장 뒤브와(J.A. Dubois) 신부에게 보낸 서한〉, Annales de la Propagation de la Foi, Vol.11, Lyon, 1838, p.360. 타타르(Tatar)족은 본래 동몽고 지역에 살던 몽고계 유목민으로, 청나라 이후에는 만주 지역까지 넓게 분포해 거주하였으며, 현재는 주로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40) 〈브뤼기에르 주교가 산서에서 부모님께 보낸 1834년 6월 6일자 서한〉, A-MEP, Vol.577, p.267; 정양모 · 윤종국 신부 옮김, 앞의 책, p.260 ; 〈모방 신부가 서만자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와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보낸 1835년 11월 9일자 서한〉, A-MEP, Vol.1260, pp.66~68 ; 〈앵베르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지도자들과 마카오 대표 신부에게 보낸 1837년 12월 8일자 서한〉, A-MEP, Vol.1254, p.101 ; 《상교우서》 13호, 2006. 12, pp.46~47.

 

41)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에 대한 연구 : 요동 차구와 진천 동골 · 배티를 중심으로〉, 《최양업 신부의 사목 지역과 선종지 연구》, pp.7~52 ; 〈최양업 신부의 사목 관할 구역과 관련 지명 연구〉,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 집》, 천주교 청주교구, 2009, pp.213~253.

 

42) 〈페롱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61년 8월 4일자 서한〉, A-MEP, Vol.579, pp.575~577 ; 〈푸르티에 신부가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1861년 10월 20일자 서한〉, A-MEP, Vol.15, p.30 ; 〈다블뤼 주교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61년 10월 서한〉, A-MEP, Vol.6, p.1 ; 〈푸르티에 신부가 아브라이여 신부에게 보낸 1861년 11월 2일자 서한〉, A-MEP, Vol.15, p.34. 이상의 자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류한영, 앞의 글, pp.131~202를 참조.

 

43) 원주읍 정 신부, 〈군난 때 미담 : 배론에 도마 최 신부 묘소〉, 《경향잡지》 제23권 660호, 1929년 4월 30일, p.188. 원재연은 위의 내용을 《경향잡지》 원문에서 인용하지 않고, 주재용(朱在用, 바오로) 신부의 전재된 기록(주재용, 〈최신부 묘비의 오기〉, 《배론성지》, 가톨릭출판사, 1975, pp.171~174)에서 인용함으로써 연도나 내용 해석에서 오류를 범하였다(원재연, 앞의 글, pp.100~101).

 

44) 〈최우정의 이력서〉, 배티 사적지 편, 《증언록과 교회사 자료》(최양업 신부의 전기자료집 제3집), 천주교 청주교구, 1996, p.85.

 

45) 〈최양업 신부의 이력서〉, 《증언록과 교회사 자료》, pp.37~38.

 

46) 유영근, 〈최 도마 신부 전기〉, 《경향잡지》 제48권 1057호, 1956년 4월 1일, pp.137~138.

 

47) 증언자 최경신의 나이는 정규량 신부의 또 다른 기록에 나타난다(원주읍 정 신부, 〈군난 시대를 감상케 하는 제천 배론〉, 《경향잡지》 제23권 659호, 1929년 4월 15일, p.164.

 

48) 증언자 최경신이 18세 때까지 배론에 살았다는 내용은, 유영근 신부가 정규량 신부에게 들은 것이라고 한다(유영근, 앞의 글, p.138).

 

49) 원재연, 앞의 글, p.96.

 

50) 원재연은 최상종의 기록들을 ‘신빙도가 높은 1차 전문 자료에 속한다’고 보았으며 (위의 글, 83쪽), 류한영도 최상종의 기록이 일제 강점기 때 기록된 것이므로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하였다(류한영, 앞의 글, p.184).

 

51) 〈페롱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61년 7월 26일자 서한〉, A-MEP, Vol.579, p.565. 위의 서한 발신지는 ‘조선’으로 되어 있지만, 8월 4일자로 마카오의 리브와(N. Libois) 신부에게 보낸 서한의 발신지는 ‘서천 산막골’(현 충남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로 나온다(〈페롱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61년 8월 4일자 서한〉, A-MEP, Vol.579, p.575). 따라서 7월 말에는 페롱 신부가 아직 교우촌을 순방하던 중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그는 7월 26일자 서한의 추신(8월 9일자)에서 최양업 신부의 복사가 자신의 집(즉 산막골)에 막 도착한 사실을 추가하였다.

 

52) 다음에 인용한 B-①과 B-②를 참조.

 

53) 류한영, 앞의 글, p.178. 한편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를 직접 방문한 푸르티에 신부가 ‘배론~선종지’ 사이를 17리외(혹은 17~18리외)라고 한 데 반해(다음의 B-①과 B-② 참조) 페롱 신부가 이 거리를 12리외라고 한 것은 두 선교사가 평소에 다니던 길이 다른 데서 생겨난 오차라고 이해한 경우도 있다(원재연, 앞의 글, p.89).

 

54) 1975년에 주재용 신부는 위의 내용 중에서 특히 최양업 신부가 문경에서 병을 얻어 멀리 배티까지 갔다는 내용을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최양업 신부는 선종지에서 즉시 배론으로 옮겨져 안장된 것으로 보았다(주재용, 앞의 책, pp.148~155). 따라서 주재용 신부는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 가매장’ 사실을 알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55) 감곡 본당 90년사 편찬위원회, 《감곡 본당 90년사》, 천주교 감곡 교회, 1986, p.162.

 

56) 《경향잡지》, 제43권 1009호~제44권 1023호, 1949. 4~1950. 6. 이에 앞서 유영근 신부는 동성신학교 교사로 재임하던 시절인 1944년 1월에 장춘의 소팔가자를 순례하고 〈小八家子를 방문하고〉라는 제목 아래 그 순례기를 《경향잡지》(제38권 967~970호, 1944. 2~5)에 게재한 적도 있었다.

 

57) 정양모, 〈최양업 신부의 사목과 사상〉, 《성농 최석우 신부 고희 기념 “한국 가톨릭 文化活動과 敎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pp.51~53 ; 배은하, 《역사의 땅, 배움의 땅 배론》, 성바오로출판사, 1992, pp.156~157 ; 차기진, 〈최양업 신부와 배티성지〉, 《교회와 역사》 206호, 1992. 7.

 

58) 류한영, 앞의 글, pp.199~200.

 

59) 〈최우정의 이력서〉, 《증언록과 교회사 자료》, p.92 ; 절두산순교기념관 소장,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필사본), 회차 102, 이 마리아의 증언(1887. 4. 2). 최희정은 진천 바라산에서 선종했고, 부인 이 마리아는 이곳에서 병인박해 때 체포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60) 원재연, 앞의 글, pp.112~114. 이 글에서 진천 바라산을 현재의 명암리 발래기에 비정한 것만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61) 원재연, 위의 글, p.111 ; 류한영, 앞의 글, pp.199~200.

 

62) 고옥자의 구전 내용은 그녀가 천주교에 입교(1957년, 18세)하기 이전인 8세 때 비신자 노인들에게 들었고, 이후 18세 때 성당에서 다시 들은 것이라고 한다. 전문 시기는 물론 당사자의 나이, 전승자가 비신자였다는 상황 등을 감안해 볼 때 의심스럽기 그지없다.

 

63) 여기에 해당하는 최근의 전승으로는, A-②의 작성자 최상종의 4남인 최수명의 당질 최인식(요셉)의 ‘배티 선종설’, 김우분(막달레나) 수녀의 전승, 배티 최종성(베네딕토) 회장의 ‘배티 선종설’, 조규명(마리아) 수녀의 ‘진천 선종설’과 ‘배티 가매장설’ 등이다(원재연, 앞의 글, pp.93~94, pp.115~116 ; 류한영, 앞의 글, pp.182~183).

 

64) 〈푸르티에 신부가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1861년 10월 20일자 서한〉, A-MEP, Vol.15, p.30.

 

65) 〈푸르티에 신부가 아브라이여 신부에게 보낸 1861년 11월 2일자 서한〉, A-MEP, Vol.15, p.34.

 

66) 류한영, 앞의 글, pp.177~178.

 

67) 주재용, 앞의 책, p.154 ; 정양모, 앞의 글, p.53. 

 

68) 류한영, 앞의 글, p.140, p.170, p.176, pp.191~194.

 

69) 〈푸르티에 신부가 아브라이여 신부에게 보낸 1856년 10월 6일자 서한〉, A-MEP, Vol.15, p.9.

 

70) 류한영은 〈대동여지도〉상의 ‘수지-평택-부여’ 사이의 거리를 290리로 계산하였다 (류한영, 앞의 글, p.191).

 

71) 기존의 연구자들은 조선 후기 당대의 거리 개념에 현재의 거리 개념을 통합하여 푸르티에 신부가 언급한 17리외를 확인하려고 노력하였으나(류한영, 앞의 글, pp.177~178; 원재연, 앞의 글, pp.124~127), 이보다는 당대의 거리 개념만으로 17리외를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또 거리 개념을 맞추기 위해 기록이나 전승에 나오지 않는 여우목 교우촌(현 경북 문경시 문경읍 중평리) 혹은 한실 교우촌(현 문경시 마성면 상내리)을 선종지에 비정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된다(정양모, 앞의 글, p.53 ; 류한영, 앞의 글, p.178).

 

72) 차기진, 〈조선 후기 충청좌도의 천주교 전파 과정 연구〉, 《한국 천주교회사의 빛과 그림자》, 디자인흐름, 2010, pp.247~254.

 

73) 차기진,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에 대한 연구〉, pp.44~46.

 

74) M. L'Abbe Renard, Vie de Michel Alexandre Petitnicolas, Paris, 1891, p.263.

 

75) 〈프티니콜라 신부가 가네(Ganaye) 신부에게 보낸 1861년 10월 서한〉, A-MEP, Vol.14, pp.417~420.

 

76) 배 바오로 회장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뒤, 함께 갇혀 있던 지장골(현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 출신의 오반지(吳盤池, 바오로)의 순교 행적을 페롱과 칼래 신부에게 증언한 사람으로 추정된다(〈칼래(N. A. Calais, 姜) 신부의 1866년 조선 박해에 대한 보고서〉, A-MEP, Vol.579, p.1225 ; 〈페롱 신부의 1866년 9월 25일자 서한〉, A-MEP, Vol.579, pp.939~940).

 

77) 〈최우정의 이력서〉, 《증언록과 교회사 자료》, pp.83~85.

 

78) 〈페롱 신부가 루세이유 신부에게 보낸 1863년 8월 28일자 서한〉, A-MEP, Vol.579, p.667.

 

79) 〈페롱 신부가 배티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62년 9월 23일자 서한〉, 〈페롱 신부가 배티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62년 10월 23일자 서한〉, A-MEP, Vol.579, pp.619~622, 641~644.

 

80) 〈페롱 신부가 루세이유 신부에게 보낸 1863년 8월 28일자 서한〉, A-MEP, Vol.579, p.668.

 

81) 차기진,〈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에 대한 연구〉, pp.34~35, p.45.

 

82) 최양업 신부의 복사로는 신창 남방재(현 충남 아산시 신창면 남성리)에 살던 조화서(베드로) 성인(《치명일기》, 정리 번호 761번;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74 · 213 · 215 · 221번)과 공주 반이울(현 공주시 탄천면 대학리의 반여울)에 살던 김성오(베드로)가 기록에 나타난다(《좌포도청등록》, 1866. 12. 8 《병인치명사적》 권24, p.3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63번). 조화서 성인은 10년 동안 최양업 신부의 복사를 했으며, 최 신부가 선종한 뒤에는 전주 유상리 성지동으로 이주해 살다가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하였다(김진소, 《천주교 전주교구사》, 천주교 전주교구, 1998, pp.300~303).

 

[학술지 교회사학 vol 7, 2010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133235&Page=16&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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