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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설명 배론 신학당의 꿈을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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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엉골 이야기: 여주 부엉골의 예수성심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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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2-01-26 조회수509 추천수0

[부엉골 이야기] 여주 부엉골의 예수성심신학교 (1)

 

 

1. 이야기의 배경

 

가톨릭이 보유한 보물은 여러 가지다. 그중 하나가 사제(司祭)1)인데, 사제는 통상 수도회나 신학교를 통하여 배출된다. 사제는 교회의 의식과 전례를 주관하므로 교회를 유지하는 중심일 뿐만 아니라 교회 존재의 상징이다. 따라서 사제를 양성하는 일은 교회의 동력 발전소를 세우는 일이며, 그 발전소는 보편(普遍) 교회2)에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심장 역할을 한다. 한국천주교회에서 신학교(Seminarium)3)는 교회의 동력 발전소와 심장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하여 힘든 여정을 걸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따라서 가톨릭의 보물인 사제를 양성해 내는 신학교는 가톨릭의 또 다른 보물로서, 한국천주교회 생명의 유지(維持, sustentation)와 재생(再生, regeneration)의 둥지라고 말할 수 있다.

 

1831년 9월 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 대목구를 설정하고 초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Barthelemy Bruguiere, 蘇, 바르톨로메오, 1792~1835) 주교를 임명한다. 그러나 조선 입국을 준비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1835년 10월 20일 중국 내 서만자(西灣子) 교우촌에서 43세의 나이로 갑자기 선종하였다. 대신 서만자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방(P. Maubant, 羅伯多祿, 베드로, 1803~1839) 신부가 1836년 1월 15일 서양인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한양에 도착하여 대목구장 직무대행 역할을 수행하였다.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는 교우촌 방문, 성사 집행 등 통상적인 사목뿐만 아니라 성직자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입국 첫해에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기초 교육을 시키고, 그해 연말에는 세 사람을 사제로 만들고자 마카오(Macao, 澳門)의 극동 대표부 내 임시 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1837년 조선 대목구 부주교로 임명되어 입국한 제2대 조선 대목구장 앵베르(L. Imbert, 范世亨, 라우렌시오, 1796~1839) 주교는 마카오 유학생을 먼 훗날의 희망으로 여기고, 한 명이라도 속히 현지인 사제가 탄생하기를 염원하며 신학생 양성에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1838년 무렵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이문우(李文祐, 요한), 이재의(李在誼, 토마스), 최형(崔炯, 베드로) 등 중년의 대상자를 발굴하여 3년 후 사제품을 줄 수 있기를 희망하며 속성으로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 때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J.H.

Chastan, 鄭牙各伯, 야고보, 1803~1839) 신부가 순교함으로써 국내 도제식 속성 교육은 종료되고 만다.

 

다행히 모방 신부의 첫 방인 사제 양성 시도는 1845년 김대건, 1849년 최양업 두 사제의 신품성사4)로 ‘외국 선교회에 의한 해외 유학 조선인 사제 탄생’이라는 형태로 결실을 거두었다. 김대건 신부는 서품 후 1년 남짓 사제 활동을 하다가 병오박해로 1846년 9월 16일 만 2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귀국 후 11년 반 동안 벽지와 오지를 밤낮으로 사목 방문하다가 과로로 1861년 6월 15일, 경북 문경의 작은 교우촌에서 선종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생존 시에 현지인 성직자 양성이 시급함을 인식하고, 자신이 선발하여 예비 신학생 교육을 해왔던 이만돌(바울리노), 김 사도 요한, 임 빈첸시오 등 소년 세 명을 유학보냈다. 1854년 3월에 출항한 이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홍콩(Hong Kong, 香港) 경리부에서 1년여 동안 체류하다가 1855년 6월 12일 말레이반도 중부지역 서쪽 해안에 있는 페낭(Penang, 彼南) 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사제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중 이만돌 바울리노는 현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1861년 귀국하였다. 김 사도 요한과 임 빈첸시오는 1863년에 귀국하여, 배론의 성요셉신학교에 편입하여 사제가 되기 위한 준비를 계속해 나갔다. 하지만 김 사도 요한은 1864년에 환속한 뒤 병인박해 때 도피 생활을 하다가 1868년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이만돌과 임 빈첸시오는 1865년 각각 삭발례와 소품을 받았으나, 1866년 조선 전역에 휘몰아친 병인박해의 광기 때문에 해산하여 아무도 신품성사의 영광을 받지 못하였고, 11년간 존속되었던 성 요셉 신학교는 폐교되고 말았다.

 

이로써 파리 외방전교회가 30년에 걸쳐 심혈을 기울인 두 차례의 현지인 사제 양성 계획에서 성공한 사례는 김대건 · 최양업 두 사람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사도로부터 이어온 성교회는 조선 천주교회에서 사멸되지 않고 끈끈한 생명력을 발휘하였다. 많게는 8,000여 명의 대학살과 모진 박해의 공포를 이겨내고 교회의 잔맥(殘脈)이 침묵 속에서 이어져 오다가, 조선 천주교회 두 번째 신학교인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 개교로 발현되었다.

 

이 글은 배론의 성요셉신학교에 이은 조선 천주교회 두 번째 신학교로서 1885년 10월 28일에 개교하여 1887년 3월까지 1년 5개월간 존속한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 설립 당시의 시대 상황, 신학교 개교 과정 및 운영을 개관하고 부엉골 본당과의 관계를 파악하여 부엉골 교회사적지 개발의 의의를 찾아보는 데 목적이 있다.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는 배론 성요셉신학교의 부활이며 계승이다. 또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의 포란(抱卵, incubation)이며, 믿음으로 무장된 이방인 선교사들의 끈질긴 복음 선포 결과물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복음 선포의 사명을 일깨워 주는 아름다운 신앙 각성제라 할 수 있다.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2.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와 관련된 글

 

한국천주교회의 신학교 역사는 교회가 설립한 첫 번째 공식 신학교로 배론의 성요셉신학교(또는 신학당)를 인정한다. 그리고 두 번째 공식 신학교인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는 용산 함벽정(涵碧亭)에 세워진 예수성심신학교의 전신으로 잠깐 언급된다. 그래서인지 배론 신학교와 용산 신학교와 관련된 글은 수가 넘쳐서 골라 쓰기가 쉽지 않을 정도이다. 하지만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1882~1896년 사이 신부들의 보고서나 교세 통계표가 교회 측 공식 문서 자료인데,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885년도 보고서에 소신학교 설립에 관한 계획이 나타난다.

 

가을에는, 즉 한두 달 후에 소신학교(petit seminaire)를 설립할 계획입니다. 우리가 당면해 있는 불인한 상태와 부족한 인원 때문에 현재까지 망설여 왔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페낭 신학교(College de Pinang)에 가 있던 우리 신학생들은 되돌려 보내면서 그동안 우리의 부족했던 믿음을 책망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좀 더 자유가 허락된다면 이 소신학교도 서울에 있는 한한(韓漢)학교(notre college chinois)처럼 쉽사리 확장될 것입니다(명동 천주교회, 『서울교구 연보』 1, 1984, 44쪽 : Compte Rendu 1883-1887, 1885, p.24).

 

블랑(J.G. Blanc. 白圭三) 주교의 계획대로 1885년 10월 28일에 신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이것이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이다. 1886년도 보고서에서 어려운 신학교 운영 현황이 짧게 언급되고 있다.

 

마라발(Maraval, 徐) 신부에게 위임한 소신학교(Notre Petit-Seminaire)는 조건이 좋지 못해서 별로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총 학생수는 아직 10명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소신학교를 다른 곳으로 이전할 계획으로 있습니다. 한문 선생과 학생 1명이 콜레라로 사망했습니다(명동 천주교회, 『서울교구 연보』 1, 1984, 51~52쪽).

 

1934년에 평양교구에서 창간한 월간지 『가톨릭연구』의 「조선의 신학교 유래」라는 글에서는 이 신학교를 당시의 소재지 지명을 붙여 ‘원주 부흥골 학당’으로 소개하고 있다.

 

조선 제2 신학교 : 원주 부흥골 학당(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조선 유학생이 빈낭(檳)5) 학당에서 돌아오게 된 것을 기회로 하여 1885년에 원주 부흥골에다 초가 몇 칸을 매수하여 임시 신학교를 설치하고 서 요셉(J. Maraval, 徐若瑟) 신부가 교수하게 되어 빈낭에서 돌아온 학생 4명과 조선에서 입학한 3명의 학생, 합 7명이었었다. 거기서 3년 동안 수학하다가 현 용산 신학교로 옮겼더라(『가톨릭연구』 1935년 9·10월 합병호, 110쪽).

 

1896년 민응식(閔應植)6)의 한옥을 매입하여 감곡 성당을 지은 부이용(C. Bouillon. 任加彌, 가밀로, 1869~1947) 신부는 1936년 그의 회고록(Quarante ans de Combats sur le meme Champ d’action)7)에서 성당, 숙소, 식당, 그리고 신학교로도 사용된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를 건축하던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바오로, 1853~1922) 신부의 모습을 문학적 필체로 적었다.

 

로베르 신부는 오직 호랑이와 부엉이들만이 살고 있는 이 험준한 산속의 마을 부엉골보다 더 나은 장소를 찾지 못하였다. 몇몇 교우들이 그를 도와주러 왔고, 그들은 함께 근처 숲에서 통나무를 베어 밀짚들로 엮어 초가를 짓고, 벽은 7~8cm 두께의 진흙 벽돌들로 쌓았다. 호랑이가 보호해 주는 포효성, 그리고 외교인들에게는 불길한 징조의 새인 부엉이들의 음산한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오두막집을 지었다. 신학생들의 미래 궁전이 완공되었다(한국교사연구소 감수, 『감곡 본당 90년사 - 옛 장호원 본당』, 천주교 감곡교회, 1986, 136쪽).

 

이원순(李元淳, 에우세비오)은 『한국천주교회사 - 주고받는 이야기로 된』(탐구당, 1970, 206~207쪽)에서 블랑 주교의 업적을 나열하며 부흥골에 성직자 양성기관을 설립하였다고 지적했다.

 

오기선(吳基先, 요셉)은 「순교 성지순례 5」(『경향잡지』 1972년 5월호, 64~67쪽)에서 블랑 주교가 부흥골에 신학교를 재건한 후 한불통상조약 이후 용산 ‘함벽정’으로 신학교를 옮겼음을 짧게 언급하였다.

 

최석우(崔奭祐, 안드레아)는 「장호원 본당을 창설한 임 가밀로 신부」(『경향잡지』 1978년 6월호, 75~77쪽)에서 1885년에 두메산골 부엉골에 소신학교가 자리를 잡았다고 소개하였다.

 

장동하(張東河, 베네딕토)는 3차에 걸친 현장 답사 결과물인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의 위치 문제」(『교회와 역사』 156회[1988년 5월호], 8~12쪽)에서 “현재 사제관 및 신학교 터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자료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결론을 내린다.

 

최석우는 「부엉골의 역사적 의의」(『교회와 역사』 176호[1990년 1월호], 8~9쪽)에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부엉골을 개발하고 잘 보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김신아는 「여주 부엉골 신학교 터」 1 · 2(『교회와 역사』 178호[1990년 3월호], 10~11쪽 ; 179호[1990년 4월호], 8~9쪽)에서 신학교 터 발굴과 함께 당시 현지에서 콜레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 안드레아와 한문 교사의 묘를 발견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유 토마스는 「부엉골 신학교 터를 돌아보고」(『교회와 역사』 193호[1991년 6월호], 14~15쪽)에서 파리 외방전교회의 방인 성직자 양성 노력을 회고한 뒤, 증언이나 기록 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과학적 고증을 한다면 확실한 신학교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최석우는 「한국 교회와 한국인 성직자 양성」(『한국 교회사의 탐구』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376쪽)에서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의 개설 당시의 신학생 명단을 언급하였다. 그들은 1884년에 페낭에서 귀국한 전 안드레아, 이내수(李?秀) 아우구스티노, 한기근(韓基根) 바오로와 1885년 페낭에서 귀국한 최태종 루카 등 4명, 그리고 국내 학생으로 1885년에 입학한 우 안토니오 등 3명을 포함한 총 7명이었다.

 

노용필(盧鏞弼)은 「예수성심신학교의 사제 양성 교육」(『인간연구』 5호, 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 2003, 155~181쪽)에서 부엉골 신학교를 대신학교로, 서울에 별도로 세워진 신학교를 소신학교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인현(仁峴)학원 - 종현(鐘峴)학원 - 계성(啓星) 국민학교로 이어지는 계성학교의 역사를 보면 종현(현 명동) 본당 부속으로 세워진 초등 교육기관인 인현학원(일명 한한학교[韓漢學校])을 소신학교로 잘못 판단한 것이다.

 

이원순은 『소신학교사(小神學校史)』(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39~43쪽)에서 원주의 깊은 산골에 자리 잡은 교우촌과 신학교를 언급하며 예수성심신학교 터라는 사실을 입증할 구체적인 증거가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이상의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 관련 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신학교 터의 정확한 위치가 파악되지 않았다.

② 신학생의 정확한 인적사항과 교수(敎授)-학습 내용이 파악되지 않았다.

③ 신학교-본당의 관계, 교수와 사목자의 복무 기록에 관한 기록이 충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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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새 우리말 큰사전』(삼성출판사, 1986)에 나오는 ‘사제’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 ① 주교와 신부를 통틀어 일컬음. ② 천주교의 성직(聖職). 로마 가톨릭교에서는 주교의 아래로, 교회의 의식과 전례를 맡아봄.

 

2) 예수 그리스도가 사도 베드로를 중심으로 하는 사도들을 기초로 하여 설립한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말한다.

 

3) 못자리, 묘포, 온상, 기원, 발상지, 양성소로도 표현된다.

 

4) 부제 · 사제 · 주교의 직무를 수여하는 성사를 통틀어서 ‘성품성사(聖品聖事)’라 하나, 부제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회의 성사를 집행할 수 있는 신권과 은총을 주교로부터 받아 신부가 되는 성사를 특별히 ‘신품성사(神品聖事)’로 구분해 쓸 수 있다.

 

5) 말레이반도의 페낭(Penang)을 말한다.

 

6) 개항기 이조판서 · 예조판서 · 강화부 유수 등을 역임한 인물로, 임오군란 때 이 집을 명성황후의 피신처로 제공하여 출세의 길로 들어섰다.

 

7) 역자 주) 『감곡 본당 90년사』에는 끝부분이 ‘Champ d’altion’으로 표기되었으나 내용을 감안하여 “Champ d’action”으로 고쳤다.

 

[교회와 역사, 2022년 1월호, 천강우 프란치스코(가톨릭신문 명예기자)]

 

 

[부엉골 이야기] 여주 부엉골의 예수성심신학교 (2)

 

 

3.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 설립 전후 시대 상황

 

조선 천주교회 최초의 신학교인 배론 성요셉신학교가 1866년 병인박해로 문을 닫음으로써, 사제 양성의 희망은 사라지고 10년간의 공백기를 맞았다. 공백기 동안 파리외방전교회 생존 사제들은 중국으로 도피하여 조선 재입국을 열망하며 시대의 상황과 변화를 지켜보았다. 실상 이 프랑스 선교사들은 1795년 ‘북경교구 조선 본당 사목구’ 설정과 1831년 ‘조선 대목구’ 설정을 전후로 신앙 선조들이 백방으로 움직인 사제 영입 노력의 열매였다. 1836년 모방 신부를 필두로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 입국 후 본연의 사목 및 전교 활동에 전념하였음은 물론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를 겪으면서 박해의 칼날 앞에 목숨을 내놓아야 할 순간에도 현지인 사제 양성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850년 개설한 배티 신학당과 1855년 개교한 배론 신학교가 그 노력의 증거로 남았다. 1860년 경신박해를 거치면서 입교자가 격감하고 교우촌은 황폐화되어 갔다. 1861년 최양업 신부의 선종으로 조선인 사제의 명맥도 끊겼다. 특히 1866년 대원군의 주도하에 자행된 병인박해는 조선에 이식된 ‘천주학’ 나무의 가지를 자르고 뿌리를 뽑았으며, 모든 천주교 사제를 추방해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병인박해 이후 조선 천주교회에 사제 공백기와 공교회 활동 암흑기가 지속되자, 살아남은 교우들은 벽지나 오지로 흩어지거나 산속으로 도피하여 궁핍한 소규모 집단생활을 하며 침묵 속에서 자유로운 신앙의 꿈을 키워 나갔다. 조선에서 쫓겨난 프랑스 선교사들은 전교 활동 재개를 꿈꾸며 재입국 준비와 현지인 사제 양성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선과 이웃한 차쿠(?溝)1)에 ‘조선 대목구 대표부’를 차리고 조선 입국 후의 활동을 위해 『한불자전(韓佛字典)』2), 『한어문전(韓語文典)』3) 등을 편찬하였다.

 

1873년 말, 대원군은 쇄국양이(鎖國攘夷)4)로 인한 실정으로 민씨 일파에 의해 실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 정부는 쇄국에서 개방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국제 정세의 흐름 속에서 전환되었다. 그 시작이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으로 널리 알려진 1876년 2월의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체결이다. 조선 정부에서는 흥선 대원군 일파와 유생들의 반대로 의견이 제각각이었으나 박규수(朴珪壽, 1807~1876) · 오경석(吳慶錫, 1831~1879) 등의 주장과 청나라 북양대신 리홍장(李鴻章, 1823~1901)의 권고, 고종의 적극적인 개항 의사에 따라 개국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접견대관 신헌(申櫶, 1810~1884), 부관 윤자승(尹滋承, 1815~?)과 일본 특명전권 변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1840~1900), 부전권 변리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는 총 12개로 된 조관(條款)에 서명하였다. 그중 제5관에는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道) 가운데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골라 지정한다. 개항 시기는 일본력(日本曆) 명치(明治) 9년 2월, 조선력 병자년(1876) 2월부터 계산하여 모두 20개월로 한다.”라며 구체적인 개항지와 시기를 적시하였다. 이어 서명된 조일수호조규 속약(續約, 1882. 8)에는 간행이정(間行里程)5) 50리 및 양화진(楊花津) 개장과 일본 외교관의 조선 여행 가능 내용도 들어 있다.

 

제1조. 부산 · 원산 · 인천 각 항의 간행이정을 확장해 각 50리로 하고(朝鮮里法), 2년 후를 기해 다시 각 100리로 한다. 1년 뒤에 양화진을 개시장(開市場)으로 한다.

 

제2조 일본국 공사 · 영사 및 그 수원과 가족의 조선 각지 유력(遊歷, 여행)을 허가한다. 여행

지방을 지정함은 예조에서 하되, 증서를 발급하고, 지방관은 증서를 검사하고 여행자를 호송한다.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미국은 종래의 무력시위를 통한 방식 대신에 일본의 우호적 알선에 의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 방향을 전환하였다. 미국이 조선과 수교하려는 움직임은 리홍장의 중재 의사 표명으로 활로를 찾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는 미국을 끌어들여 러시아의 남진과 일본의 조선 침략을 견제하는 ‘연미론(聯美論)’6)을 구상하고 있었다.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조선 전권대신 신헌, 김홍집(金弘集, 1842~1896)과 미국 전권대표 슈펠트(R.W. Schufeldt, 1822~1895) 사이에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됨으로써 조선과 미국 간의 수교 관계가 시작되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은 비록 체결 과정에서 당사자인 조선 정부가 일부 배제되는 문제점이 있었지만, 제3국으로부터 불공경모(不公輕侮)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 필수상조(必須相助)한다는 규정(제1조)7), 치외법권이 잠정적이라는 규정(제4조), 거류지는 조선의 불가분의 영토의 일부라는 규정(제6조), 양국 간 문화 학술 교류에 관한 규정(제11조) 등이 포함되어 어느 정도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 개방과 교류를 추진한 주권국 간의 쌍무적 협약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조선이 서구 국가와 맺은 두 번째 통상조약이 조영수호통상조약(朝英修好通商條約, 1883)이다. 1882년 조미조약이 체결되자 주청 영국 공사 웨이드(T.F. Wade, 1818~1895)는 청나라에 적극적인 알선을 요청하였다. 이에 청나라는 의미인소약일자불개(依美人所約一字不改)8)라는 조건을 붙여 조선에 영국과의 통상조약 체결을 주선하였다. 1883년 주청 영국 공사 파크스(Harry Parkes, 1828~1885) 경을 전권대신으로 조선에 파견해 조선 전권대신 민영목(閔泳穆, 1826~1884)과 수정을 위한 교섭을 펴게 하였다. 11월 26일 전문 13조의 「조영수호통상조약」과 부속 통상장정 및 세칙 장정, 선후속약(善後續約)의 조인을 보았고, 1884년 4월 28일에 비준을 교환하였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제를 모방했으나, 「조일통상장정」과 대조해 보면 영국의 권익을 보장하는 데 치우쳐 있다. 「조미통상조약」에 비해 영국 측에 유리하게 약정된 점은 다음과 같다.

 

① 외교 대표들과 영사들은 조선 국내를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고, 조선 정부는 그들을 보호

해야 하며,

② 치외법권의 철폐가 조선 국왕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영국 정부의 판단에 의해 승인할 때 가능하게 약정했으며,

③ 부산 · 인천 이외에 한성(漢城) 및 양화진을 개항하기로 하고,

④ 개항장에서 영국민은 신교(信敎)의 자유를 누리며,

⑤ 일정 보행 구역(步行區域)에서는 여권 없이 자유로이 내왕할 수 있으며,

⑥ 영국 군함은 개항장 이외에 조선 국내 어디서나 정박할 수 있고 선원이 상륙할 수 있게 한다.

 

조영수호통상조약에서는 개항과 여행의 자유가 보장됨은 물론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는 내용은 이후 프랑스와의 수교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는 조선과 수차례 국교를 맺으려 했으나 병인양요로 아직 감정이 좋지 않고, 종교 문제로 말미암은 오해와 마찰 때문에 국교가 지연되어 왔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병인양요 이후 청나라로 탈출하여 교회 재건을 위한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1873년 말, 흥선 대원군이 하야하고 조선 내 정세가 변동되자 3년 경과 후 다시 입국하였는데, 이들에 대한 정부의 태도가 종전보다 훨씬 온건하였다. 민씨 정권이 수립되자 1876년부터 블랑(J.G. Blanc, 白圭三, 1844~1890), 드게트(V.M. Deguette, 崔東鎭, 1848~1989) 신부를 시작으로 사제가 재입국하였고, 1877년에는 리델(F. Ridel, 李福明, 1830~1884), 두세(C. Doucet, 丁加彌, 1853~1917),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1853~1922) 신부도 입국하였다. 리델 신부 등 일부 선교사들이 다시 체포되기는 하였으나 국제적인 석방 운동의 전개로 풀려났고, 이를 계기로 선교 활동이 묵인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천주교에 관한 감시가 다소 완화되어 가면서 조선이 1876년에 일본, 1882년에 미국, 1883년에 영국과 독일, 1884년에 러시아와 이탈리아 등과 잇따라 조약을 체결하는 흐름 속에 개항, 통상 및 문화 교류, 여행 자유가 명문화되었다.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 大朝鮮國 · 大法民主國通商條約, 1886)으로 조선 천주교회는 재건의 발판을 마련한다. 프랑스는 1886년 3월 주중 프랑스 대사 코고르당(F.G. Cogordan, 戈可當, 1849~1904)을 전권위원으로 인천에 파견하였고, 조선 전권대신 김만식(金晩植, 1834~1901)과 회담하게 하여 5월에 13관(款)으로 된 한불수호조약과 통상장정 및 선후속약(善後續約) 등에 조인한 뒤 6월 4일 마침내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종교 활동과 선교 활동 등 천주교와 관련된 조항은 제3관, 4관, 9관에 명시되어 있다. 제3관은 치외법권 규정이며 총 10개 항으로 되어 있다. 프랑스인의 신변과 재산은 프랑스 사법권에 속한다는 것이 요지다. 따라서 프랑스인이 불법한 행위나 범죄를 저질러도 프랑스 관할 당국에 의해 재판을 받거나 프랑스 법에 따라 처벌받도록 하여 프랑스인 사법 처리 과정에서 조선 당국의 개입을 차단하였다. 제4관은 총 7개 항으로 개항지 설정과 운영, 내륙 여행 관련 규정이 들어 있다. 그 안의 2항에는 종교 활동 내용이 있는데, 개항지와 서울에서 프랑스인이 자유롭게 종교 활동을 할 수 있는 문구가 있다. 그리고 6항에서는 개항지와 도시 주변 100리 이내 프랑스인의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했으며, 합법적인 여행권(護照)을 소지한 프랑스인은 조선 전역의 여행도 가능하다고 했다. 조불수호통상조약 내용에서 천주교 포교와 관련된 직접적인 문구는 제9관 2항이다.

 

제9관 2항. 프랑스인이 조선에 와서 언어와 문자를 배우거나 가르치며 법률과 기술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보호하고 도와줌으로써 양국의 우의를 돈독하게 하며, 조선 사람이 프랑스에 갔을 때에도 똑같이 우대한다. (*밑줄은 필자가 표시함.)

 

“배우거나 가르치며(學習惑敎誨, y etudier ou y professer)”에서 ‘가르치다(professer)’는 뜻으로 표현한 한자어 ‘敎誨(교회)’는 ‘가르치고 깨우치게 함’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으므로, 선교사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가르치거나 선교할 수 있게’ 하는 명분을 제공하였다. 프랑스 정부와 조선 천주교회는 이를 포교의 자유를 얻은 것으로 해석한다. 조선 정부에서 천주교를 정식으로 승인하지 않았음에도 이 조약을 계기로 프랑스 선교사들은 상복 대신 검은 수단 옷을 입고 개항지 서울을 비롯해 원산 · 용산 · 인천 · 부산 등지에서 자유롭게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정치적인 변화는 사회와 삶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1885년 가을, 강원도 외진 산골 지역인 부엉골에서의 조심스러운 신학교 태동은 이러한 우호적인 국제 정세의 변화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듬해 1886년에 체결된 조불수호통상조약은 선교사들의 포교 활동을 점차 양성화시키는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상의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 설립 전후 시대 상황을 정리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시 기

사 건

결 과

 1866년

병인박해

사제 공백기 시작

1873년 말

대원군 실각

천주교 박해 완화

1876년 2월

강화도 조약

개항 및 사제 재입국 가능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

문화 학술 교류 가능

1883년

조영수호통상조약

여행과 종교의 자유 허용

1885년 10월 28일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 설립

현지인 사제 양성 교육 재개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포교의 자유 허용

 

……………………………………………………………… 

 

1) 차쿠는 요동 지역에서 조선 땅과 가장 가까운 지점에 있었으므로, 1867년 이후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이곳에 머물며 입국을 준비하는 중간 대기 장소로 삼았다. 차쿠 인근에는 김대건 신부가 4통의 서한을 썼던 ‘백가점(白家店)’이 있다(『가톨릭 신문』, 제2156호, 1999년 6월 20일 자, 15면). 1866년 병인박해 때 조선을 탈출한 리델(李福明, 펠릭스) 신부는 1869년 1월에 조선 선교사 칼레(姜, 알폰소), 블랑(白圭三, 요한), 리샤르(蔡, 베드로), 마르티노(南, 알렉산데르) 신부 등과 함께 차쿠를 조선 입국의 거점으로 삼고자 하였다. 조선 선교사들은 같은 해 10월 이곳에서 제2차 조선교구 성직자 회의를 개최하였다.

 

2) Dictionnaire Coreen-Francais. 최초의 한불(韓佛) 사전. 리델 주교는 1876년 조선 대목구에 배속된 파리외방전교회 코스트(E.J.G. Coste, 高宜善) 신부에게 원고를 넘겼고, 코스트 신부는 『일본의 소리』라는 잡지를 간행하고 있던 요코하마의 레비(Levy) 인쇄소에서 1880년 『한불자전』을 출간하였다. 가로 19.1 × 세로 28cm의 4 · 6배판 판형으로 총 694쪽에 약 11만 개의 단어가 수록되었고, 서설, 본문, 부록으로 구성하였다. 서설에는 범례와 한글의 불문자화에 관한 설명을 실었다. 615쪽에 달하는 본문에는 우리말을 알파벳 순으로 나열하고, 그 옆에 발음을 알파벳으로 표기한 뒤 한자를 제시했으며, 그다음에 단어의 뜻을 프랑스어로 설명하고 있따(『가톨릭신문』 제2073호, 1997년 10월 12일 자, 7면).

 

3) Grammaire Coreenne.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이 1881년 발행한 프랑스어로 된 최초의 한국어 문법서. 가로 19.6 × 세로 28cm의 4 · 6배판 판형으로 총 334쪽이다. 서설, 제1부 품사론, 제2부 구문론,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가톨릭신문』 제2073호, 1997년 10월 12일 자, 7면). 한국말이 처음으로 서양의 문법 체제하에서 연구되었고, 19세기 후반의 한국어 자료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어 연구의 중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4) 나라를 닫아서 지키고, 서양 오랑캐를 멀리함.

 

5) 부산 · 원산 · 인천 세 항구에서의 일본인 활동 범위에 관하여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약정.

 

6) 주일 청국 공사 허루장(何如璋, 1838~1891)이 수신사 김홍집 일행에게 권유한 외교정책. 즉,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라고 하는 급박한 정세 앞에서 오히려 조선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를 바라고 있으며, 조선이 러시아의 남하, 혹은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 서양, 특히 미국에 대한 문호개방 및 미국과의 연합이 불가피하다는 인식.

 

7) 조선과 미국은 제3국으로부터 ‘부당한 처사나 모욕 또는 위협을 당했을 때’ 서로 돕는다는 뜻.

 

8) 조미수호조약과 동일한 내용으로 함.

 

[교회와 역사, 2022년 2월호, 천강우 프란치스코(한국교회사연구동인회 회장)]

 


[부엉골 이야기] 여주 부엉골의 예수성심신학교 (3)

 

 

4.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 개교 과정 및 신학교 운영

 

주지의 사실로, 1784년 이승훈의 세례와 입국으로 창설된 조선 천주교회는 싹이 트기도 전에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과 1891년 진산사건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조선 천주교회 첫 사제로 1794년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1752~1801) 신부도 1801년 신유박해로 7년간의 활동을 순교로 마감한다. 이후 1815년 을해박해, 1827년 정해박해가 이어지며 조선 천주교회는 33년간 사제 공백기를 갖는다. 그래도 사제 영입 노력은 계속되었고, 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 대목구를 설정하여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지역의 선교 책임을 맡긴다. 1834년 또 다른 중국인 사제 유방제(劉方濟, 파치피코, 1795~1854)1) 신부가 들어와서 3년 동안의 활동을 접고 떠난 후, 1836년부터 30년 동안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이 조선 땅에서의 유일한 선교사로 눈부신 활약을 펼친다. 그러나 이들도 박해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그 시작이었으며 1846년 병오박해, 1860년 경신박해, 1866년 병인박해로 수많은 사제와 교우가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로 두 번째의 사제 공백기가 10년간 지속되었으며 조선 천주교회는 와해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아주 꺼져 가는 것처럼 보였던 선교의 불꽃은 19세기 후반의 국제 정세에 힘입어 다시 점화되며 살아났다. 이상의 교회 창설부터 조불조약까지의 조선 천주교회 약사를 사제 활동의 성격과 신학생/신학교 유무를 중심으로 구분하면 아래 <표>와 같이 6기로 나눌 수 있다.

 

구분

시기

기간

사제 활동 유무

신학생/신학교

 참고(수품/박해)

 1기

1784~1794 

10년

조선 천주교회 창설(이승훈) 및 유사 성직자단(주교 권일신 등)이 활동한 사제 부재기 

 

1785년 을사박해(을사추조적발 사건). 1791년 신해박해(진산사건) → 전통 유교 사상과 대립하여 최초의 순교자(김범우, 이벽, 그리고 윤지충, 권상연) 발생

 2기

1794~1801 

7년

사제 1인 활동기(주문모 신부) 

 

1794년 주문모 신부 입국. 1795년 을묘박해, 1797년 정사박해, 1800년 경신박해, 1801년 신유박해(주문모 신부 순교) → 1801년 '토사교문' 이후 사제 공백기 시작 

 3기

1801~1834 

33년

사제 공백 1기

 

1801년 신유박해(주문모 신부 순교) 이후 1834년 유방제 신부 입국 이전. 1815년 을해박해, 1827년 정해박해 → 1831년 조선 대목구 설정 전후 북경과 교황청에 꾸준히 사제 파견 요청

 4기

1834~1866 

32년

파리외방전교회 사제 중심 활동 1기

모방 신부가 1836년 김대건·최양업·최방제 마카오 유학.

앵베르 신부가 1837년 정하상·이문우·이재의·최형 개인지도.

1850년 다블뤼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배티 4~5명 개인지도.

1854년 최양업 신부가 이만돌(1861년 귀국)·김 사도 요한(1863년 귀국, 1864년 환속)·임 빈첸시오 페낭 유학(1863년 귀국).

1855년 배론 성요셉신학교 개교, 1866년 폐교.

1834년 유방제 신부 입국.

1836년 모방 신부 입국, 유방제 추방. 1839년 기해박해. 1844년 김대건·최양업 부제품. 1845년 김대건 사제 서품. 1846년 병오박해(김대건 신부 순교). 1860년 경신박해. 1861년 최양업 신부 선종. 1866년 병인박해 → 박해 속에서 신앙 착근 

 5기

1866~1876 

10년

사제 공백 2기

1873년 리델 신부가 만주 차쿠에서 신학생 개인지도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신자들은 도피, 지하로 숨어들고 교세는 꺾였으며 1876년 강화도조약 전까지 성교회 활동 불가 → 신자 전국으로 분산

 6기

1876~1896 

20년

파리외방전교회 사제 중심 활동 2기

1878년 로베로 신부가 강원도 이천 신학생 개인지도. 1879년 블랑 신부가 전라도 장수 신학생 개인지도. 1882년 블랑 신부가 7명 페낭 유학. 1883년 블랑 신부가 5명 페낭 유학. 1884년 블랑 신부가 10명 페낭 유학. 1885년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 개교. 1887년 3월 부엉골 에수성심신학교 용산 이전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사제 재입국 및 교회 재건과 교세 회복 → 1886년 조불조약 이후 자유로운 신앙 및 전교 활동 → 1896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최초 한국인 사제 탄생(강성삼, 강도영, 정규하)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에 진출하여 선교와 병행하여 역점 사업으로 실행한 것이 현지인 사제 양성 교육이었다. 위 <표>의 신학생/신학교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 대목구의 사제 양성 과정은 제4기부터 시행되며, 사교육과 공교육, 그리고 해외 유학 교육과 국내 교육이라는 투 트랙 방식이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진출 초기부터 간헐적으로 사제 개인에 의한 도제식 속성 신학 교육이 시행되기는 했으나 이는 비밀리에 이동하며 부정기적으로 진행되었고, 라틴어나 교리 지식 및 교양 교육 수준에 머문 ‘비형식적 예비 신학 교육’이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관심 사제의 선발 하에 개인지도로 학문적인 기초 소양을 지도한 후 유학과 국내 교육을 병행해 나갔다. 제2대 대목구장 앵베르(L. Imbert, 范世亨, 라우렌시오, 1796~1839) 주교, 1845년에 귀국한 김대건 부제, 제3대 대목구장 페레올(J. Ferreol, 高, 요한, 1808~1853) 주교와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안토니오, 1818~1866) 신부, 제6대 대목구장 리델(F. Ridel, 李福明, 펠릭스, 1830~1884) 주교 등이 가르친 학생들도 넓은 의미의 개인지도 예비 신학생이었으며, 이들 중 일부는 공교육 신학 교육 과정을 걸었다. 특히 제4기에 해당하는 1834~1866년 동안에 펼쳐진 파리외방전교회 사제 중심 활동 1기인 32년간의 선교 기간은 최초의 조선 천주교회 신학교인 배론 성요셉신학교 탄생을 경험한다. 해외 유학 비용과 현지 적응 및 양성 교육 효율성을 감안한 조선 천주교회는 조선의 성직자는 조선 대목구 내에서 양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선교사들의 의견에 따라 1855년 배론[舟論]2) 깊은 산골 교우촌에 신학교를 세운 것이다.

 

이후 제6기에 이르러 조선 대목구 책임을 맡은 파리외방전교회는 1876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조선의 개항과 함께 사제들이 재입국하여 적극적으로 선교 활동을 펼치게 되었고, 미래의 조선 천주교회를 이끌 신학생 양성 교육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여섯 개의 시기 구분 중에서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는 마지막 제6기에 존재하였으며, 파리외방전교회 사제들이 10년간의 공백을 깨고 20년간의 활동을 다시 시작한 선교 2기 기간이다.

 

이 기간 중에 시행된 신학생 교육의 첫째 트랙은 페낭 신학교 유학의 재개였다. 이는 최양업 신부가 조선인 청년 3명을 유학생으로 파견한 후 27년이 지난 때였다. 『소신학교사』(이원순, 2007, 36-37쪽의 표 참조)에 따르면 조선 대목구는 1882년 12월 7명,3) 1883년 12월 6명,4) 1884년 7월 4명,5) 1884년 12월 4명6) 등 네 차례에 걸쳐서 총 21명을 페낭으로 유학 보냈으며, 유학 떠날 때의 신학생 나이는 10~29세로 다양했다. 3년에 걸쳐 유학했던 신학생 가운데 11명은 국내 신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서품을 받고 사제가 되었다.

 

둘째 트랙은 부엉골 신학교 교육이었다. 강화도조약 이듬해인 1877년에 입국한 리델 주교가 먼저 계획했던 사업은 조선인 성직자 양성이 있다. 아직 공개적이고 자유로운 신앙 활동에는 제약이 있었지만, 배론 성요셉신학교 폐교 후 요긴한 국내 신학생 교육을 감안하여 리델 주교는 부엉골 교우촌에 거주하며 공소 사목을 하고 있던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바오로, 1853~1922) 신부에게 신학교 설립을 지시하고 교장을 맡도록 하였다. 로베르 신부는 부모에게 보낸 서한(1878년 3월 9일 자)에서 자신의 좌우명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고통받고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이라고 밝히면서 신학교를 설립하라는 주교의 명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1878년 6월 리델 주교가 추방되자 그를 이어 1884년 6월에 제7대 조선 대목구장이 된 블랑(J.G. Blanc, 白圭三, 요한, 1844~1890) 주교도 로베르 신부에게 신학교 건물 건립을 재촉하였고, 결국 1885년 10월 28일 자7)로 여주의 깊은 산골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가 문을 열게 된다. 로베르 신부의 사목지를 고려하여 블랑 주교는 마라발(J. Maraval, 徐若瑟, 요셉, 1860~1916) 신부를 초대 교장 겸 공소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신학교는 초가집 두 채와 2명의 교사로 출발했다. 신학교 건축에 대해서는 부엉골 본당을 담당한 부이용(C. Bouillon, 任加彌, 가밀로, 1869~1947) 신부의 구체적인 설명이 남아 있다. 『감곡 본당8) 90년사』(1986, 64-65쪽)와 여주 본당 50년사인 『남한강의 순례자』(2000, 57-59쪽)에 의존하여 신학교와 사제관 건립 과정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건축물 : 신학교(교실, 성당, 숙소, 식당 겸용)와 사제관 각 1채(합 2채)

- 구조 : 초가집 온돌

- 건축물 배치 : 앞쪽(산 아래쪽)에 신학교, 뒤쪽(산 위쪽)에 사제관

- 건축 재료 : 통나무 골격, 7~8cm 진흙 벽돌, 밀짚 지붕

- 방향 : 정남향

- 신학교 규모 : 불명

- 사제관 규모 : 길이 3m, 폭 2m 50cm, 높이 1m 71cm

- 사제관 문 크기 : 폭 50cm, 높이 1m 10cm

- 사제관 앞마당 크기 : 길이 8m, 폭 1m 50cm

- 부속시설 : 신학교 부엌 뒤편에 마구간, 하마석(下馬石), 우물

- 건축 참여자 : 로베르 신부와 부엉골 거주 교우들

 

신학생들이 학습한 교과목은, 교장 마라발 신부가 라틴어를 지도하였고, 평신도 교사 한 사람이 한문과 한글 교육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신학교 설립과 건축에 깊이 관여한 로베르 신부는 개교 이듬해 1886년 대구(현 계산) 본당으로 이임하였기 때문에 이임 전까지는 부정기적으로라도 신학생을 지도했을 것이다. 평신도 교사에 관한 자료는 찾을 수 없는데, 신학생 1명9)과 함께 콜레라 또는 결핵10)으로 사망하였다는 설이 있다.

 

부엉골 신학교 교육 과정에 관한 상세한 자료는 찾을 수 없지만 30년 전에 설립되어 11년간 운영한 배론 성요셉신학교와 페낭 신학교의 교육 방식을 차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서울교구 연보』 1의 1885년도와 1886년도 보고서에는 ‘소신학교’로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부엉골 신학교에서 소신학교 과정만 운영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신학생 수에 있어서, 신학교 건물이 기껏해야 4~5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라고 했지만, 연구자에 따라 7명, 8명 등 차이가 있으며 총 10명을 넘기지는 않았다는 것이 통설이다. 문제는 부엉골 신학교 재학생의 신원과 신학교 교육 이수 기간이다. 김성학(金聖學, 알렉시오)과 관련하여 오기선은 부엉골 신학생에 포함하였고(『남한강의 순례자』, 58~59쪽), 이원순은 제외하였다(『소신학교사』, 36~37쪽). 이원순은 김성학이 1882년에 출국하여 9년간 페낭에서 신학 교육을 받고 1892년에 귀국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부엉골 신학교는 1887년에 용산으로 옮겨갔으며 1892년에 페낭을 떠나서 귀국한 최종 6명의 페낭 유학생11)들은 귀국 연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모두 용산 신학교로 편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기선은 신학교 은사인 김성학에 대하여 누구보다 이력을 잘 파악했을 제자였으므로 그의 주장에 근기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풍토가 맞지 않거나 신병, 또는 수학 능력 부족으로 중도 귀국한 유학생 중에서 전 안드레아, 이내수(李?秀, 아우구스티노), 한기근(韓基根, 바오로, 1884년 12월 귀국), 최태종(루카, 1885년 4월 귀국), 김 토마스(1886년 귀국) 등 5명은 부엉골 신학교 운영 시기와 유관하므로 귀국 후 부엉골 신학교에 편입하여 신학 공부를 이어갔을 개연성이 높다. 이들 중 최태종은 부엉골 신학교에서 수학 중 탈락했다고 전해지며, 김 토마스는 1년 7개월 수학하다가 중도 탈락하여 1886년 8월 귀국길에 올랐으므로 부엉골 신학교 편입생 명단에는 올리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김 토마스의 ‘중도 탈락’이 페낭 신학교 학적에서의 탈락인지 부엉골 신학교 편입 후 탈락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수학 과목은, 중도 귀국한 신학생들의 유학 기간이 5개월에서 2년까지 다양하여 신학교 과정에서 습득해야 할 교과목 중 어떤 것을 이수하였는지 불분명하다. 그리고 개인에 따라 신학 과정 이수 기간이 다르고 국내 입학 신학생과의 수준도 격차가 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부엉골 신학교가 교리 · 한문 · 교양 · 라틴어 학습 위주의 소신학교 과정 운영을 목표로 출발하였으나 획일적인 교과 운영을 했다기보다는 개인별 학력을 고려하여 수준별 교과목도 일부 편성되었으리라고 여겨진다. 국내 입학 신학생에 관한 이론도 제기되고 있다. 용산 본당에서 펴낸 용산 성직자 묘지 안내 소책자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발행 연도 미상, 19쪽)에 따르면, 이종국(李鍾國, 바오로, 1874~1905) 신부(묘 번호 57번)는 1885년 ‘부흥골’ 신학교 입학으로 나와 있으나, 이원순은 페낭 6년 4개월 유학 후 1890년 11월 페낭 출국, 즉 귀국으로 처리하였다. 1890년은 용산 신학교 시절이다. 『남한강의 순례자』(58쪽)에 따르면 권 안드레아 · 유 안토니오 · 최점돌(요아킴) · 김성학(알렉시오) 등 4명이 국내파 신학생으로 언급되지만, 김성학을 국내 입학생으로 보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고, 권 안드레아는 콜레라로 사망한 신학생으로 부엉골 신학교 근처에 묻혔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따라서 페낭 유학생들의 개별 신상과 인적 사항, 유학 기간, 귀국 날짜 등의 고증이 전제되어야 부엉골 신학교 (편)입학 및 교육 과정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생산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공적 기록이 100% 정확할 수가 없고 기록자나 사제 개인의 기억에 의존하여 남겨진 부분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당시 수학했던 신학생의 일기장이나 메모지 같은 개인 기록과 유품, 가족의 기록, 문중의 유물, 부엉골 본당의 사료, 페낭 신학교 및 용산 신학교 학적부와 면담 자료, 파리외방전교회의 미공개 고문서 등의 발굴과 검증 작업을 통하여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근거를 확보한다면 판단 오류나 서술의 부정확성을 바로잡고 기존 자료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 개교 과정 및 신학교 운영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사제 재입국 및 교회 재건 노력의 일환으로 페낭 신학교 유학 교육이 재개되었다.

 

2. 페낭 유학 교육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조선 천주교회 약사 제6기인 파리외방전교회 사제 중심 활동 2기에 국내 신학교 설립도 병행하였다.

 

3. 부엉골 신학교는 집 매수가 아니라, 로베르 신부 주도하에 신학교와 사제관을 소규모로 신축하였다.

 

4. 부엉골 신학교의 첫 신학생은 페낭 귀국생 4명, 국내 입학생 3명 등 모두 7명이었다는 것이 통설이나 고증의 여지가 남아 있다.

 

5. 부엉골 신학교는 곁에 사제관을 두었고 2명의 교사가 소신학교 교과 과정을 중심으로 운영하였다는 것이 교회 기록이지만, 고증의 여지가 남아 있다.

 

6. 기존 연구의 모호함을 제거하고 자료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하여 부엉골 신학교 재학생과 교사진 및 관련 인물에 관한 심층적인 자료 수집과 검증 작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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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래 이름은 여항덕(余恒德). 중국 섬서(陝西) 출신으로, 이탈리아 나폴리의 예수 그리스도의 성가정 신학교에 들어간 해부터 조선 선교를 열망하였다.

 

2) 현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3) 황 베드로, 구 요한, 전 안드레아, 박 프란치스코, 강성삼(라우렌시오), 방 바오로, 이내수(아우구스티노).

 

4) 강도영(마르코), 김성학(알렉시오), 김원영(아우구스티노), 김 베드로, 전 요한, 최태종(루카).

 

5) 정규하(아우구스티노), 한기근(바오로), 최 바오로, 이종국(바오로).

 

6) 김 토마스, 김승연(아우구스티노), 김문옥(요셉), 홍병철(루카).

 

7) Guinand, ‘Liste des eleves du Seminaire de Ryong San(용산 신학교 학생 명부)’, 1902(?) ; 최석우, 『한국 교회사의 탐구』 2,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374-376쪽.

 

8) 1896년 9월 17일 설립 당시의 명칭은 잠호원(長湖院) 본당이었다가 훗날 감곡(甘谷)으로 바꾸었다. 현재의 장호원 본당은 수원교구 소속으로 1960년 3월 19일 설립되었다.

 

9) 전 안드레아나 권 안드레아라는 설이 있는데, 페낭 유학생 21명 명단에 권씨 성을 가진 신학생은 없다. 그리고 중도 귀국한 신학생 중에서 부엉골 신학교 운영 전후로 기간이 겹치는 사람은 1884년 12월에 귀국한 전 안드레아, 이내수(아우구스티노), 한기근(바오로), 1885년 4월에 귀국한 최태종(루카), 1886년에 귀국한 김 토마스 등 5명이다. 따라서 부엉골 신학교에서 사망한 신학생은 수학 도중 탈락한 학생으로 파악된 전 안드레아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남한강의 순례자』(2000, 58-59쪽)에서 한국천주교성지연구원 원장 오기선 신부는 부엉골 신학교 학생 8명에 권 안드레아를 포함시켰다. 그렇다면 권 안드레아는 페낭에서 귀국한 학생이 아니라 국내에서 입학한 신학생으로, 이 신학생이 사망한 것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10) 『서울교구 연보』 1(1878~1903)의 「1886년도 보고서」에서 콜레라 사망으로 적시되어 있다. 1887년 보고서에도 전국에 걸친 콜레라 피해를 언급하고 있고 프와넬(V. Poisnel, 朴道行) 신부가 담당한 중부지방도 흉년과 콜레라가 선교를 저해하고 있다고 보고한 것으로 보아 콜레라로 인한 사망임이 분명하다.

 

11) 강도영(마르코), 김성학(알렉시오), 김원영(아우구스티노), 최 바오로, 김승연(아우구스티노), 홍병철(루카).

 

[교회와 역사, 2022년 3월호, 천강우 프란치스코(한국교회사연구동인회 회장)]

 

 

[부엉골 이야기] 여주 부엉골의 예수성심신학교 (4)

 

 

5. 부엉골 본당과 예수성심신학교

 

부엉골 신학교의 정식 명칭은 ‘예수성심신학교’1)이다. 소재지가 속칭 부엉골이므로 일반인들은 ‘부엉골 신학교’로 부르고 있다. 현재까지 부엉골 신학교와 부엉골 본당의 관계가 명확하게 규명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부엉골 신학교와 부엉골 본당은 동일한 주체가 동일한 지역에서 운영한 두 모임을 지칭한 이름이며, 탄생 순서를 따지자면 부엉골 신학교 이전에 부엉골 본당이 먼저 존재하였다.2)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조선 천주교회도 디아스포라(diaspora)를 겪으면서 신자들은 조용히 전국으로 흩어졌다. 그중 한 지역이 당시 강원도 서쪽 끝 산간 부엉골이었다. 다른 교우촌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소문을 따라 모여든 교우들이 타향살이의 고됨과 가난으로 인한 굶주림 속에서 교우촌을 위안 삼아 상호 부조하며 신앙의 불씨를 간직해 나갔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는 공동체가 신앙의 존속과 유지에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입증한다. 공동체가 만들어져야 세속적인 결속력도 강화되고 영성적인 차원의 한마음 인식이 뿌리내리게 된다. 2천 년 넘게 유지된 교회 규범, 사도로부터 이어온 전례, 교계의 위계질서와 사목자에 대한 공경심 등의 전통은 내적 일체감과 형제애를 고양시키며 상호 사랑의 실천으로 이끈다.

 

1822년에 이르러 리델(F. Ridel 李福明, 1830~1884) 주교의 지시를 받은 로베르(P. Robert, 金保綠, 1853~1922) 신부는 강원도 경기 북부, 황해도, 충청북도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펼침으로써 부엉골 교우촌도 수혜 지역이 된다. 1881~1882년부터 작성된 교세통계표에 따르면 22명이 존재했던 부엉골 신자는 1883년 공소로 설정될 때 신자 수가 37명으로 늘어났다. 신자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부엉골은 로베르 신부의 사목 방문을 받으면서 안정된 신앙 공동체로 자리를 잡아 나갔으며, 신학교가 세워지는 토대도 마련되었다.3)

 

1885년 부엉골 신학교가 설립될 당시 승격된 부엉골 본당4)의 신자 수는 47명으로 파악되며 1886년까지 그 수를 유지하였다. 1887년 3월 부엉골 신학교의 용산 이전으로 부엉골 본당은 일시적인 신자수 감소로 원산 본당(당시 본당 주임 : 드게트[V. Deguette, 崔東鎭 신부) 관할의 공소가 되었다. 그러다가 사제 부임으로 신자 수가 100~130명대로 늘었고, 1889년에 부엉골 본당이 재설정되어 활력을 찾았다. 그러나 1890년 제2대 주임 르 비엘(E. Le Viel, 申三德, 에밀리오, 1863~1893) 신부가 건강 악화로 용산 신학교로 전임하게 되자 부엉골 본당은 공소로 다시 격하되면서 풍수원 본당(당시 본당 주임 : 드게트 신부) 관할이 된다. 2년 후인 1892년 마르탱(L. Martin, 沈良, 1886~1919) 신부가 부엉골로 이주하여 제3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본당으로 복구되었다. 1894년 4월 부이용(C. Bouillon, 任加彌, 1869~1947) 신부가 제4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할 때는 관할 공소 포함하여 총 신자 수가 1,100~1,200명에 달하는 등 최고 중흥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해 발발한 동학 농민 전쟁의 여파와 산골에 자리한 성당의 위치는 선교에 제약이 많았다. 이에 부이용 신부는 성당 이전 계획을 뮈텔(G. 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에게 건의하게 되었다.5)

 

1896년 부이용 신부는 선교의 생산성을 고려하여 장호원(현 감곡 매괴 성모 순례지 성당)으로 이임하게 되었고, 부엉골 본당은 공소로 다시 격하되었다가 1912년 공소마저 폐지된다. 이상의 부엉골 본당사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연도

부엉골 위상

신자수6)

내력

사제 

비고 

1881~1882

교우촌

22

리델 주교가 로베르 신부 파송

로베르

 

1883

공소

37

로베르 신부 활발한 사목 방문

로베르

 

1885~1886

본당

47

마라발 신부 부엉골 신학교 운영

초대

마라발 신부

 

 1887

공소

?

부엉골 신학교 용산 이전

드게트 신부

원산 본당 관할

1889~1890

본당

53~131

르 비엘 신부 1년간 활약

제2대

르 비엘 신부

 

 1890~1891

공소

19~61

르 비엘 신부 건강 악화로 용산 신학교 전임

드게트 신부

풍수원 본당 관할

1892~1893

본당

74

마르탱 신부 부엉골 부임

제3대

마르탱 신부

 

1893~1894

본당

35~92

부이용 신부 부엉골 부임

제4대

부이용 신부

 

1894~1895

본당

96

 

부이용 신부

 

1895~1896

공소

90~92

부이용 신부 장호원으로 이사

부이용 신부

장호원 본당 관할

1897~1898

공소

62

 

 

원동 본당 관할

1898~

공소

37~55

 

 

1912년 공소 폐지

 

존속 기간 30년 동안 부엉골 본당은 네 차례의 공소 시절과 세 차례의 본당 시절 등 모두 일곱 차례의 부침을 거듭하였음을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다. 특이한 사항은, 1885년 10월 28일 개교한 부엉골 신학교가 1년 5개월간 운영되다가 1887년 3월 용산으로 이전되었는 데도 꾸준한 신자 수를 유지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사목을 담당하는 사제가 현장에 재임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로 보인다. 제2대 르 비엘 신부, 제3대 마르탱 신부를 거쳐 제4대 주임인 부이용 신부가 마지막으로 떠난 뒤, 부엉골은 공소로 지탱하다가 신자 수 감소로 생을 마감하고 신학교사(神學校史)의 유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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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엉골 신학교에 관한 네이밍은 사료적 가치를 인정할 만한 출처를 찾지 못하였다. 본 신학교 이름은 1920년 드브레드(E. Devred, 兪世俊, 1877-1926) 신부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교장 기낭(P. Guinand, 陳普安, 1872~1944) 신부의 은경축을 축하하고, 신학생들의 라틴어 공부에 도움을 주려고 만든 김대건 신부 성극 「김신부전」 라틴어본에 적시된 교명 ‘Seminarii Sacratissimo Cordi[s] Jesu’이다.

 

2) 『남한강의 순례자 : 여주 성당 설립 50주년 기념집』, 천주교 수원교구 여주 성당, 2000, 57-62쪽.

 

3) 이석원, 「부엉골 본당(1885~1896)의 설정과 변화 과정 연구」, 「교회사학」 11호(2014. 12), 수원교회사연구소, 177-211쪽.

 

4) 초대 신학교 교장 겸 초대 본당 주임은 마라발(Joseph Maraval, 徐若瑟, 요셉, 1860~1916) 신부였다. 1885년 10월 28일 부엉골에 예수성심신학교가 설립되자 그곳에 파견되어 신학교 및 부엉골 본당 사목을 맡았으며, 1887년 3월 신학교가 서울 용산으로 이전한 뒤에도 교수로 활동하였다(『한국가톨릭대사전』, 4, 2337쪽 참조).

 

5) 부이용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1895년 4월 20일 자 서한 참조.

 

6) 신자 수는 주로 이석원(2014) 자료에 의존하였는데, 기술 내용에 따라 변동이 있다.

 

[교회와 역사, 2022년 4월호, 천강우 프란치스코(한국교회사연구동인회 회장)]

 

 

[부엉골 이야기] 여주 부엉골의 예수성심신학교 (5 · 끝)

 

 

6.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 복원과 부엉골 성지 개발

 

현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부평리(康川面 釜坪里) 581번지 일대에 폐허로 남은 부엉골 본당과 부엉골 신학교가 신앙의 소중한 유산으로 관심을 얻게 된 것은 1912년 공소가 폐지되고 60년이 흐른 1977년이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최석우(崔錫祐, 안드레아, 1922~2009) 신부가 신학교 터 규명을 위한 연구 활동으로 현장을 답사하였고, 이상은(야고보) 증언자로부터 신학교에 관한 구전을 청취함으로써 연구 작업에 시동을 걸었다. 본격적인 신학교 터 위치 추적은 최석우 · 장동하(張東河, 베네딕토) 두 신부의 관심과 1988년부터 집중된 현장 방문으로 진전이 있었다. 한국교회사연구소를 중심으로 실시된 신학교 터 개발 추진을 위한 답사는 1990년까지 6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신학교 및 사제관 자리 실측, 식수용 우물 발견, 하마석(下馬石) 및 숯 가마터 확인 등의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본고 2장에서 언급했듯이 발견이나 확인 등은 구전에 근거한 추정이며, 현재까지는 정립된 학설이 아니다. 다행히 한국교회사연구소가 1988년 9월 7일 현장 일대 부지를 매입하게 되어 연구 진전의 동력을 얻었다. 이러한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적극적인 활동을 측면 지원한 단체가 한국가톨릭문화선양회1)인데, 선양회는 1989년부터 1991년까지 4차례 현장 순례 행사를 가졌으며, 부엉골 신학교 터 개발을 위한 재정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이상의 부엉골 개발과 관련된 활동을 정리하면 아래 <표>2)와 같다.

 

 연월일

 내용

결과

비고

1977년

5월

연구소 현장답사 : 신학교 위치

부평리 589번지(섬강 근처) 답사

증언 : 이상은(야고보)의 구전에 의존

1983년

 

장동하 신부 주장 : 신학교 위치

부평리 581번지(강에서 1km 상부 계곡)로 추정

 

1988년

3월 24일

연구소 1차 현장 답사

(최석우 · 장동하 신부, 김삼근)

신학교 자리, 우물(식수), 바위(하마석?) 확인

농지 전용 허가 신청 목표, 전경 사진 촬영

4월 12일

연구소 2차 현장 답사

(최석우 · 장동하 신부, 박순형, 이은구, 김삼근)

이은구 씨는 부친 이용하의 구전에 의거하여 이상은 씨 증언을 반박.

부평리 581번지(강에서 1km 계곡 상류)가 유력하다고 주장

지주 박순형 공소 회장 안내

4월 26일

연구소 3차 현장 답사

(장동하 신부, 박순형, 이은구, 곽인석, 양현미)

두 곳 집터 실측, 숯 가마 터 발견

부이용 신부 기록은 초가집, 현장에는 많은 기와 조각

5월

한국가톨릭문화선양회

영성분과 순례(1차)

신학교 터 홍보

 

9월 7일

신학교 터 주변 부지 매입 완료

33,400km2 

농지보존법에 의거하여 개인 명의로 매입

1989년

9월 3일

한국가톨릭문화선양회 순례(2차)

 

김태희 선양회 부회장이 『항아리』 제6호에 순례기 게재(52~53쪽)

9월 4일

현재의 터 등기필

여주군 등기소

 

11월 1일

경계 복원을 위한 측량 실시

 

 

1990년

1월 11일

개발 추진을 위한 1차 답사

측량 점검

최석우 신부, 김태희 부회장, 김석우

1월 18일

개발 추진을 위한 2차 답사

마스터플랜 작성

김태희 부회장, 노병해 감사, 김삼준 소장

2월 8일

개발 추진을 위한 3차 답사

 

오 아녜스 수녀, 차기진 연구원, 김석우, 한창언, 김신아

2월 26일

정기총회 안건으로 상정

예수성심신학교 개발추진위원회 구성을 위한 인선 구상 결의

 

3월 8일

개발 추진을 위한 4차 답사

서류 점검(농지 전용 허가 신청 목표), 현장은 진입로 공사 중

유종만 신부, 김석우, 한창언, 김신아

3월 22일

개발 추진을 위한 5차 답사

신학교 터 및 교우촌 현장 확인차.

여주군청에 농지 전용 허가 신청서 제출

김태희 이사, 신 보나 수녀, 차기진 연구원, 김석우, 한창언

4월 18일

한국가톨릭문화선양회 순례(3차)

최석우 신부 사제 수품(4월 15일) 40주년 기념행사 및 기념 식수(잣나무 200그루)

 

5월 6일

개발 추진을 위한 6차 답사

수맥 찾기

최석우 신부, 임응승 신부, 김태희 이사

6월 13일

 여주군으로부터 토목 설계 미비로 일건 서류 취하?

 

 

1991년1월 18일산림 훼손, 농지 전용, 사도 설치, 하천 부지 점용, 공작물 설치 허가 등 인허가를 위한 대행사 선정 계약총 3,600만 원 계약, 계약 선금 500만 원 지불, 잔금 3,100만 원 중 1,000만 원은 제반 인·허가 사항 이행 후 지불하며, 나머지 2,100만 원은 개발추진위원회 조직 후 처리하기로 함.대행사 : 삼창측량기술공사(여주군 소재)
5월 12일한국가톨릭문화선양회 순례(4차)한국가톨릭문화선양회(회장 : 김태희) 가족의 날 행사(조광 특강)최석우 ·? 배세영 ·? 유 토마스 신부 등 60명 
1992년1월 21일여주군 공문 접수내용 : 문화재보호법 제44조 및 74조에 의거, 지표 조사 실시 후 결과 보고서 제출 요구 
2021년7월 24일연구소 현장 답사 재개지역 거주자와 의견 교환조한건 신부, 김창환, 천강우
8월 5일서울대교구 현장 답사부지 활용 계획과 제반 문제 해결 위주로 개발 검토교구 관리국장 신부, 조한건 신부
 8월 10일

서울대교구 관리국 검토 의견 접수

(접수일 : 8월 31일)

1. 부지 일부를 매각하여 개발 유도

2. 관리사 건립하여 부지 출입 통제 및 관리

3. 지적측량을 통해 현황도로 확보하여 활용도 높일 수 있도록 조치

 

 

위의 <표>에서 보듯이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추진력과 한국가톨릭문화선양회의 열정으로 커다란 성과가 기대되던 개발작업이 1991년 한국가톨릭문화선양회의 4차례 순례로 중단되고 이후 30년간 부엉골 신학교는 신자들의 무관심 속에서 방치되었다. 추정컨대, 그 이유의 하나는 1993년, 한국교회사연구소는 그동안 미루어왔던 새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대사전 간행위원회와 간행 후원회를 발족시키는 등 사전 편찬이라는 대사업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이 사업은 2006년 12권 완간까지 거의 13년간 연구소의 주력 사업으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부엉골 신학교 관련 연구 여력이 감소되었다고 본다. 거기에다 부엉골 신학교 터 매입과 개발에 대한 큰 꿈을 가졌던 연구소 설립자 최석우 몬시뇰이 2009년에 선종한다. 이러한 크고 작은 변화들이 부엉골 신학교를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만들었고, 연구 테마에 실리지 못한 연유로 작용했을 것이다.

 

부엉골 신학교는 배론 신학교의 계승이며 용산 신학교와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모태다. 신학교의 의미는 사제 매출의 양적인 측면뿐 아니라 신앙의 존속과 영성 고양 등 질적인 측면에서도 언급되어야 한다. 신학교사의 연속성과 당시 현지인 사제 양성이라는 절박함에 고군분투했던 파리외방전교회의 헌신도 도외시할 수 없는 것이다. 파리외방전교회 회칙 “선교 지역으로의 출발은 돌아온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194항)이라는 전통을 지키며, 당시 파송되었던 20명의 사제 중 12명이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그들은 다시 조선 천주교회를 재건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들이 피운 꽃과 과실의 혜택을 고스란히 우리가 누리고 있다.

 

평신도로 출발한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1784년 교회 시작부터 1896년 최초의 한국인 현지인 사제 탄생까지 113년 기간3) 중 사제 부재기는 유사 성직자단이 활동한 교회 초기 10년과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 순교 이후 33년 등 43년 동안이다. 1836년 모방(P. Maubant, 羅伯多綠) 신부 입국 이후부터 조선 천주교회는 박해와 순교 속에서도 사제를 중심으로 70년간 왕성한 성장을 이어나갔다. 비록 1866년 병인박해 이후 10년간의 사제 공백기를 겪었지만, 그 기간에도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은 중국에서 조선 대목구 소속으로 조선의 선교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이는 조선 천주교회 사제가 한 기간 동안 타처에 체류한 것으로 보아야 하고, 엄연히 조선 천주교회 조직에는 사제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사고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파리외방전교회와 조선 천주교회가 113년 중 70년간 목숨을 걸고 한국 천주교회의 맥을 이어온 결실 중 하나인 부엉골 신학교의 ‘위상 다시 찾기’는 새로이 시작되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빠른 시일 안에 교회 사적지 복원 기도 모임을 구성하고 순례를 재개하며 개발위원회 조직, 연구회 및 후원회 결성 등으로 현양 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한다. 다행히 2021년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조한건 신부는 부엉골 일대 연구소 보유 재산의 현황을 파악하던 중 소중한 신앙 유산인 부엉골 신학교의 현실적인 활용 방법을 고려하였고, 몇 차례 교구청과의 협의를 진행하였다. 교회가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신자들의 정성과 기도가 어우러진다면 신학교와 사제관의 복원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7. 결어

 

1등만 기억하고 최대 · 최고 · 최초에만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는 매력이 없는 주제이다. 부엉골 신학교는 조선 천주교회 설립 후 세워진 최초의 신학교도 아니고 최고의 업적을 생산한 교육기관도 아니며, 운영 기간은 1년 5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의(definition)’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고 다분히 개인적이어서 객관성과 설득력을 결여한 경우가 많다. 특히, ‘최초’는 서술의 편의성이나 이전 연구와의 차별성을 과도하게 드러내기 위한 방책으로 활용된다. 그리고 연구자가 규정이나 정의를 위한 조건을 자의적으로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어서, 속된 표현으로, ‘최초’에 관한 정의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다. 기원과 관련한 대표적인 논쟁거리가 조선 천주교회의 시작 시점이다.

 

신학교에 관한 정의도 ‘신학을 가르쳤다’와 ‘근대 학교 체제를 갖추어 신학을 교육했다’에 따라 시기와 교육 내용에 관한 서술이 달라진다. 무엇이 신학인가?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근대식 교육인가? 교육 내용은 어떠해야 인정할 수 있는가?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여야 하는가? 국내 수학과 해외 수학을 겸한 경우 어떤 신학 교육이 진정한 교육인가? 교회나 국가로부터 문서 상으로 설립을 공인받아야 하는가? 학력의 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인정해 주어야 하는가? 등 검토 거리도 많고 논란을 피해 갈 방법도 얼마든지 구상해 낼 수 있다. 따라서 설립 순서의 앞뒤와 양적 규모의 대소와 운용 기간의 장단은 사실 서술로만 머물러야 한다.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는 파리외방전교회 주도 아래 설립되어 물리적인 형태로 존재했으며, 2천 년간 이어온 보편교회의 전통 속에서 조선 천주교회 사제 양성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다했다. 1939년 기해년에 앵베르 주교와 모방 · 샤스탕 신부의 순교에서 시작된 박해의 시작은 1866년 베르뇌 · 다블뤼 주교의 생명을 앗아간 병인박해로 이어졌다. 그러나 혹독한 박해의 후유증과 두려움 속에서도 파리외방전교회는 사제 양성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마태 7,25).

 

지금까지 한국 천주교회를 관찰하는 다양한 시각 중 본고에서는 사제 영입 활동과 사제 양성 노력이라는 관점에서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의 중요성과 교회 사적지 개발 의의를 관찰하였다. 도유 · 불멸 · 선교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사제는 그 자신이 돌보는 양 떼가 지켜주어야 한다. 그래야 사제는 가난과 충실과 순명의 삶을 온전히 살아간다. 신학교는 이러한 삶에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한 미래의 목자를 준비시키는 교육기관이다.4) 하느님과 사람들의 중계자인 사제는 육화된 기쁜 소식 자체이며 성부 · 성자 · 성령의 증인이므로 신학교에서 사제를 길러내는 일은 신앙의 근간을 세우는 것이다.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가 이어온 사제 양성과 신앙의 연속성에 대한 가치는 더 이상 무관심 속에서 방치될 수 없다.

 

2022년은 배론 성 요셉 신학교 개교 167년,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 137년이 되는 해이다. 귀중한 자료나 관계자의 증언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사라지고 마침내 완전히 멸실된다. 지금부터라도 한국 천주교회는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와 사제관의 위치 파악과 형태 복원에 착수하고, 재학하였던 신학생 신상 관련 자료 찾기 및 신학교 교육 내용을 연구함은 물론, 당시 부엉골본당 사료에 관한 전반적인 정리와 병행하여 부엉골 일대의 교회 사적지 개발 작업을 시작하기를 다시 한번 권고한다. 교회는 겨자씨와 다름없다. 다수의 무관심 속에서도 누군가 의인이 있어 교회 사적지 개발이라는 겨자씨 한 톨을 뿌리고 점점 어린 자양분을 제공하고, 땀과 기도를 봉헌해 나간다면 언젠가 박해 속 믿음의 포란(抱卵)이었던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는 거룩한 순례지로 탄생할 것이다.

 

다섯 차례에 걸쳐서 연재한 여주 부엉골 예수성심신학교 이야기를 아래와 같이 정리하며 글을 마친다.

 

1. 부엉골 본당과 예수성심신학교는 조선 말기에서 대한제국 초기에 실체적으로 존재하였음에도 사료와 교회의 관심 부족으로 관련 연구가 심도 있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2. 부엉골 본당과 예수성심신학교 연구는 산재되어 있는 자료 수합과 미발굴된 민간 사료의 입수가 수반되어야 하므로, 하느님 백성으로서 평신도의 능동적인 참여가 병행되어야 한다.

 

3.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재단 자산으로 확보한 여주시 부엉골 일대의 경계를 정리하여 교회 사적지 추진 및 개발 작업을 시작하는 것은 한국 천주교회 신학교사와 순교자 현양 사업에 크게 기여하는 일이다.

 

………………………………………………………………

 

1) 1986년 10월 4일, 총재 최석우 신부, 지도 신부 오태순, 회장 이현국을 중심으로 발족하였다. 이 단체는 1995년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와 통합한 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회로 재발족하여 오늘에 이른다(「순교자현양위원회 설립 60주년 기념 심포지엄 자료집」, 6-41쪽 참조).

 

2) 이 표는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부엉골 관련 파일에서 인용하고 보완한 것이다.

 

3) 1896년부터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라는 정규 신학교에서 무리 없이 사제가 배출되었으므로 기간 산정은 이 기간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4) 줄리아노 비지니,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하는 신앙생활의 핵심』, 김정훈 역, 2014, 244-263쪽 참조.

 

[교회와 역사, 2022년 5월호, 천강우 프란치스코(한국교회사연구동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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