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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 명례 성지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간략설명 마산교구 첫 본당이자 순교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고향
지번주소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1122 
도로주소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명례안길 44-3
전화번호 (055)391-1205
홈페이지 http://cafe.daum.net/myungrye
전자메일 rijemin773@yahoo.co.kr
문화정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6호(성당)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마산교구 명례성지: 당신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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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2-05-11 조회수148 추천수0

[함께 걷기] 마산교구 명례성지


“당신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 명례성당.

 

 

밀양과 김해를 잇는 나루가 있었던 명례는 낙동강을 따라 박해를 피해 피난 와서 정착한 교우들이 많았던 곳으로, 1897년 영남지방의 네 번째 본당이자 경상남도의 첫 번째 본당이 설립된 곳이며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생가 터가 있는 마산교구의 영적 고향이며 신앙의 원천이다.

 

 

“저를 놓아준다 해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

 

복자 신석복(申錫福) 마르코는 1828년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1209 번지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농사를 지으며 누룩과 소금 행상을 하였다. 형제들은 그가 순교할 당시 신자가 아니었는데 이후에 모두 입교했다.

 

1866년 병인년에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나자 신석복과 동료 신자들을 잡으러 대구에서 포졸들이 내려와  행상에서 돌아오는 그를 체포하여 밀양을 거쳐 대구로 압송했다. 천주교에 입교하여 마르코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지 10여 년쯤 되는 때였다.

 

- 명례성당 제대.

 

 

형제들이 돈을 마련하여 대구로 압송되는 그를 뒤쫓아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며 빼내려 했지만, 오히려 그는 형제들에게 “일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말라”고 권고했다. 이로 인해 그는 밀양에서 하루를 머무는 동안 포졸들에게 무수한 형벌을 받고 대구까지 끌려가는 동안 더한 능욕을 당해야만 했다. 대구에서 처형되기 전에도 회유하는 관장에게 “저를 놓아준다 해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관장은 이 말에 화가 나서 더욱 혹독한 형벌을 가하고 며칠 감옥에 가두었다가 교수형을 집행했다. 때는 1866년 3월31일로 성 토요일이었고 그때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순교 후 그의 아들 신영순 이냐시오가 대구로 가서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부친의 유해를 찾아 모셔왔지만, 박해의 여파가 자신들에게 미칠까 두려워하는 지방 유지들의 반대로 고향 땅에 안장할 수 없어 낙동강 건너 한림정 뒷산 노루목에 안장했다.

 

그로부터 110여 년이 지난 1975년 진영성당 신자들이 순교자의 묘가 야산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본당 공원묘역(현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으로 이장했다. 순교자의 이름이 한동안 신 이냐시오로 알려졌었는데, 이는 1895년 ‘치명일기’를 편집하는 과정에서 아들 신영순 이냐시오와 혼동한 까닭이다. 1925년 발간된 ‘병인치명사적’에서 마르코로 정정되었고, 교회사가들의 연구 결과 이름 또한 신석복임을 확인했다. 신석복 마르코는 2014년 8월15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광화문에서 시복되었다.

 

순교자 신석복 마르코에게는 아내와 세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순교할 때 큰아들은 16살이었다. 순교자의 부인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명례에서 살았다. 신석복의 큰아들 이냐시오는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막내인 신순균 바오로는 후에 사제가 되었다(1935년 수품, 1948년 선종 대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의 무관심 속에 그의 생가 터는 낯선 이에게 팔려나가 축사로 변했고 대부분의 순교자 가족은 전국으로 흩어졌으며, 4대와 5대 후손 몇 명이 지금 명례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 새로 건립된 기념성당.

 

 

사제 강성삼과 명례성당

 

복자 신석복 마르코가 순교하던 1866년 강성삼 라우렌시오가 충청도 홍산에서 태어났다.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는 김대건, 최양업 신부에 이어 우리나라의 세 번째 사제이자 최초로 국내에서 거행된 서품식에서 사제품을 받은 신부이다. 어린 시절부터 천주교 박해를 경험하며 성장하였는데, 아버지는 병인박해 때 양화진에서, 외할아버지와 외숙은 해미에서 순교하였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강성삼은 깊은 신심을 가진 학생으로, 1881년 말레이반도 페낭에 신학생으로 유학을 갔지만 어린 나이에 외국 생활을 하면서 얻은 풍토병과 폐병으로 건강이 나빠져 1890년 귀국하여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에서 남은 학업을 마치고, 1986년 약현성당에서 강도영 마르코,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와 함께 사제서품을 받았다.

 

강성삼 라우렌시오 신부는 1897년 현 부지에 네 칸짜리 집을 매입하여 부임하고 사목을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1903년 37살의 나이로 이곳에서 지병으로 선종하였다. 1926년 부임한 권영조 신부는 이곳에 ‘기와로 된 성당’을 새로 짓고 1928년에 축복식을 했는데, 이 성당은 1936년 태풍으로 전파하였다. 1938년 신자들이 부서진 조각을 모아 현재의 모습으로 축소 복원하였다. 남녀 신자 석이 칸막이로 분리되어있는 성당 내부는 초기 신자들의 신앙 모습과 영성을 느끼게 해준다. 감실 위 십자가 위에 모셔진 원죄 없이 잉태된 마리아상은 1936년 태풍으로 성당이 무너졌을 때도 하나도 다치지 않고 여전한 모습으로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아마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명례성당 만의 귀한 성모상이다.

 

강성삼 신부가 돌아가시고 나서 명례성당은 차례로 마산, 삼랑진, 진영본당의 공소가 되었다가 1996년 밀양 수산성당이 설립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을 맞았지만 성당 바로 옆 축사가 복자 신석복의 생가 터임을 알게 되면서 마산교구에서는 2008년,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생가 터와 명례성당 주변을 성역화하기로 하고 명례성지조성추진위원회를 허가하여 이듬해 위원회(위원장 이제민 신부)를 구성하였다. 그에 앞서 2007년 4월 성지 입구의 한옥을 매입하고 보수하여 강성삼 신부의 세례명을 따라 라우렌시오의 집으로 명명하였다. 2009년 8월부터 매주 토요일 미사를 봉헌하다가 2011년 1월7일부터 명례성지 담당사제가 상주하게 되면서 매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새로운 공간으로 탄생 된 성지

 

 

- 새로 조성된 성모동산(좌) 성지 야외성당 전경(우).

 

2011년에는 낯선 이에게 팔려나가 축사로 변했던 복자의 생가 터를 매입하여 야외 돌 제대를 설치했다. 현재 성당의 규모로는 순례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6월 안명옥 주교 주례로 사제관과 생가 터를 축복하였으며, 명례성당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26호로 등록되어 있다.

 

2017년 명례성지는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기념성당을 건립하는 것을 비롯해 명례를 신앙 선조들의 삶과 신앙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고자 복음화 학교를 열었으며, 복자 신석복 마르코의 정신을 따라 ‘녹는 소금 운동’을 펼치고 있다.

 

“당신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당신과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녹는 소금이 되겠습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5월호, 김영수 그레고리오(마산 Re.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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