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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시메온(베르뇌 시메온)(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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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명 장 시메온(베르뇌 시메온) (張 Simeon(Berneux Simeon))
축일 9월 20일
성인구분 성인
신분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한국(Korea)
활동연도 1814-1866년
같은이름 시므온, 장경일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조선대목구 190주년 기념 베르뇌 주교와 조선 천주교회 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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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1-10-12 조회수75 추천수0

베르뇌 주교, 천주교 공인을 통한 조선 ‘그리스도교화’ 적극 모색


교회사연구소, 조선대목구 190주년 기념‘ 베르뇌 주교와 조선 천주교회’ 심포지엄

 

 

-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주최한 조선대목구 설정 19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자와 토론자가 종합 토론을 하고 있다.

 

 

제4대 조선대목구장 시메옹 프랑수아 베르뇌(1814~1866) 주교는 박해 시기 조선 교회를 제도적으로 정비하고, 사목과 신심 활동을 체계화한 인물이다. 그는 김대건과 최양업 신부의 스승이었고, 1854년 승계권을 가진 만주대목구 부주교로 임명됐다가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제4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됐다. 1856년 조선에 입국한 그는 조선대목구 첫 시노드인 성직자 회의를 개최해 조선 교회 실정에 맞는 사목 지침서 「장 주교 윤시 제우서」를 공포했다. 또 조선 교회를 8개 사목 구역으로 나누고 전담 사제를 둬 사목을 체계화했고, 신자들의 교육을 위해 목판 인쇄소를 설치, 교리서와 기도서를 출간했다. 아울러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운영하고, 성영회를 조직해 고아와 과부 등 가난한 이들을 돌봤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그는 위대한 교구장이며 거룩한 선교사로 공경받아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조한건 신부)는 올해 조선대목구 설정 190주년을 기념해 1일 서울대교구청 본관에서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와 조선 천주교회’를 주제로 학술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날 심포지엄은 베르뇌 주교의 서한과 선교 활동, 조선 인식 등 베르뇌 주교에 관한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토론하는 자리였다.

 

 

베르뇌 주교 서한 자료의 편찬사 - 조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현재까지 확인된 베르뇌 주교의 서한은 모두 287통이다. 이중 조선대목구장 임명 이전에 쓴 것이 149통이고, 조선대목구장이 되어 쓴 것이 138통이다. 이 가운데 남아있는 친필 원본은 186통이다. 이 서한들은 현재 파리외방전교회 문서고,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문서고, 프랑스 르망교구 대신학교 도서관 등에 보관돼 있다. 친필 서한 원본도 있고, 필사본과 타자기로 정서한 자료본도 있다.

 

하지만 베르뇌 주교가 통킹대목구나 시암대목구 혹은 사천대목구 등 파리외방전교회의 동료 선교사들이 활동하던 선교지로 보낸 서한이 새로 발굴될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다. 또 교황청 시성성 문서고와 사도 문서고, 바티칸 도서관에서 베르뇌 주교의 서한과 보고서, 기타 자료가 발견될 가능성이 여전히 존재하기에 폭넓은 조사가 필요하다. 덧붙여 베르뇌 주교가 가족과 출신 교구 동창 신부에게 그리고 지인들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에 관한 발굴과 연구도 진행돼야 한다.

 

 

베르뇌 주교의 조선 선교 활동 - 방상근 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조선대목구는 프랑스 전교회와 성영회의 선교지원금과 파리외방전교회에서 보낸 사제 생활비 등으로 교회를 운영했다. 베르뇌 주교는 전교회와 성영회, 파리외방전교회를 통해 1년에 평균 3만 6868프랑(오늘날 환율로 4억 원 정도)으로 조선 교회를 꾸려갔다. 베르뇌 주교는 이 돈을 선교사 생활비, 주교관 구입과 동거 신자 가족 생활비, 선교사 영입과 선교사 물품 운송비, 신학생 양성과 인쇄소 운영비, 성영회 사업비 등으로 지출했다.

 

베르뇌 주교는 프랑스인 선교 사제들에게 해마다 720프랑을, 자신과 다블뤼 주교에게 그 2배인 1440프랑을 지급했다. 선교사 생활비로 1년에 평균 6480프랑을 지출했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는 1850년 입국해 활동하던 최양업 신부에게는 생활비를 지급하지 않았다. ‘현지인 사제는 신자들의 봉헌금으로, 유럽인 사제는 유럽에서 보내온 돈으로 생활한다’는 파리외방전교회 규정에 따라 최양업 신부는 애초 파리에서 지원하는 생활비의 지급 대상이 아니었다. 박해시기에서 주교들은 자주 거처를 옮겨야 했다. 베르뇌 주교는 주택을 사들이는 데 수백 냥을 냈고, 함께 사는 신자 가족의 생활비로 해마다 2500~3000프랑을 지출했다.

 

또 선교사 입국 비용으로 평균 1013프랑을, 자금과 물품 운송비 1600프랑, 신학생 양성비 2500프랑, 물품 구입비 2583프랑, 인쇄소 운영비 500프랑, 성영회 사업비 3185프랑 정도를 해마다 지출했다. 이 모두를 합산하면 총 2만 861프랑으로 수입의 56.5%로 교회 살림을 꾸렸다. 그러나 실제 비용은 2만 861프랑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 지출됐을 것이다. 그럼에도 총지출이 총수입보다 훨씬 적은 것은 당시 선교 자금에 여유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베르뇌 주교의 조선 인식 - 이석원 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베르뇌 주교는 중국과 사대 관계만을 맺으면서 외부 세계와 단절돼 천주교를 거부하는 조선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조선인들이 거만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하고 화를 잘 내며 강철같이 뻣뻣해서 순종하지 않는 ‘반(半)미개인’이라고 인지했다. 그는 이러한 나쁜 기질을 꺾기 위해 엄격하고 권위적인 태도로 조선 신자들을 대했다.

 

하지만 그는 ‘반미개적’인 조선인들이 한 번 신앙을 받아들이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열성적인 신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조선인들이 천주교로 입교하는 데 열정적이고, 금지 법령이 폐지되고 천주교 공인이 이루어진다면 머지않아 조선 전체가 ‘그리스도교화’ 할 것으로 전망했다.

 

베르뇌 주교가 지향한 ‘그리스도교화’는 천주교회의 복음과 문화가 조선 사회의 전통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것이었다. 그는 ‘반미개’ 상태에 있는 조선인들이 ‘그리스도화’ 할 수 있는 갈림길에 지금 서 있으며, 천주교 공인을 통한 ‘그리스도교화’라는 목표가 현실화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천주교 공인을 대목구장이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로 인식했다.

 

베르뇌 주교는 점차 대내외적으로 조선대목구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고 판단했고, 외부의 구원을 바라는 비신자들과 신앙 자유를 고대하는 신자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조선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천주교 공인을 시도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10월 10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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