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자료실

구분 성인명     축일 신분 지역명 검색
엘리사벳 앤 시튼(1.4)

엘리사벳 앤 시튼(1.4)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진/그림] [자료실] 인쇄

성인명, 축일, 성인구분, 신분, 활동지역, 활동연도, 같은이름 목록
성인명 엘리사벳 앤 시튼 (Elizabeth Ann Seton)
축일 1월 4일
성인구분 성녀
신분 설립자
활동지역 미국(USA)
활동연도 1774-1821년
같은이름 낸시, 니나, 씨튼, 안나, 애나, 애니, 엘라, 엘리자베스, 엘리자벳, 엘리제, 이사벨, 이사벨라
성지와 사적지 게시판
제목 명화와 만나는 성인 이야기: 엘리사벳 씨튼
이전글 성서의 해: 하느님 구원의 드라마 - 이사야 예언서
다음글 교부들의 신앙: 요셉 성인의 삶 - 곱하기 1과 더하기 1의 차이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5-23 조회수712 추천수1

[명화와 만나는 성인 이야기] 엘리사벳 씨튼 (1)

 

 

- 한진섭, 「엘리사벳 씨튼 성녀와 소녀」, 2013, 화강석, 성북동 씨튼 수녀원.

 

 

인간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가족의 죽음일 것이다. 미국 최초의 성녀 엘리사벳 씨튼은 부모, 자식, 남편 등 가족을 잃는 고통을 겪었다. 인간적으로 보면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녀는 사랑하는 자식과 남편의 죽음까지도 주님께 온전히 맡기며 고통을 은총으로 승화시켰다.

 

엘리사벳 씨튼은 1774년 미국 뉴욕시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당시 그녀에겐 언니와 갓 태어난 동생이 있었다. 어머니가 사망한 지 1년 후 부친은 샬롯 에밀리아 바클리라는 여성과 재혼했다. 새엄마의 외가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가문이었으니 미국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씨튼의 부친은 외과의사로 뉴욕시의 첫 보건소장을 지낸 천재 의사였다. 엘리사벳이 네 살 되던 해 동생이 사망했는데 씨튼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현관 앞 층계에 혼자 앉아서 구름을 쳐다보며 두 살 난 꼬마 동생 키티를 관 속에 넣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한테 동생이 죽었는데 왜 울지 않느냐고 묻자 키티는 천국으로 올라갔으니까요. 나도 엄마가 있는 그곳으로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엘리사벳과 새엄마 사이는 원만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엘리사벳은 “가정 불화가 있었다. 나는 다른 가족들에게 친절하게 말하는데 그들은 왜 내게 대답하지 않는지 알 수가 없다.”라고 회상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변하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오직 한 분, 변함없는 하느님께로 나아갔다.”라고 썼다.

 

1794년 1월 25일 20세의 엘리사벳은 윌리엄 매기 씨튼과 결혼한다. 씨튼-매틀랜드라는 회사를 운영했던 당시 뉴욕에서 가장 번영을 누렸던 기업가 가문이었다. 결혼 한두 해 전 엘리사벳과 윌리엄은 뉴욕에서 상류층 사람들이 즐기던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등 낭만적인 데이트를 즐겼다. 엘리사벳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세속적 행복을 누린 짧은 기간이었다. 첫딸 안나가 태어났고, 1796년 둘째 윌리엄을 임신했을 때 남편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 후 가문의 기둥인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1802년에는 부친이 임종했다.

 

1803년 엘리사벳은 남편 윌리엄의 결핵이 악화되어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하게 되자 이탈리아에 있는 남편의 친구 필리치 가족을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남편이 이탈리아의 따뜻한 공기를 마시고 설령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더라도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어린 자녀를 두고 뉴욕을 떠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큰딸 안나만 데리고 갔고, 둘째, 셋째 넷째는 시누이이자 친구에게, 막내는 언니에게 맡겼다. 당시 항해는 매우 위험했으므로 죽음을 각오하는 여행이었다. 떠나면서 손수건을 흔드는 친구에게 “내 아이들을 네 가슴에 자주 안아 다오!”라고 부탁했다. 뉴욕을 떠나면서 엘리사벳은 친구에게 자신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떠남을 말해 주었다.

 

따뜻한 나라를 향해 목숨을 걸고 떠났건만 정작 그들을 기다린 것은 난방도 되지 않는 차디찬 맨바닥에 감금되는 일이었다. 황열병 전염자로 알려졌기 때문에 감옥과 다름없는 쇠창살이 있는 시설에 감금된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가장 적나라한 상황을 엘리사벳은 차가운 감금 시설 속에서 죽어가는 남편을 통해 경험하게 되었다. 너무나 가혹했지만 죽음이 곧 하느님과의 만남임을 이때 깨달았다. 견딜 수 없는 고통조차 하느님의 뜻이자 사랑의 표현임도 알게 되었다. 엘리사벳이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서의 극단적인 고통을 겪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2020년 5월 24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대전주보 4면, 고종희 마리아(한양여대 교수, 미술사가)]

 

 

[명화와 만나는 성인 이야기] 성녀 엘리사벳 씨튼 (2)

 

 

- 스톤하우스 내의 씨튼 성녀 기도방, 에미츠버그.

 

 

성녀 엘리사벳 씨튼은 이탈리아에서 남편을 잃었지만 가장 소중한 것을 얻었다. 가톨릭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이다. 미국으로 돌아온 엘리사벳은 1806년 6월 20일 개종했다. 그녀는 자신을 박해하는 프로테스탄트 친척들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고자 뉴욕을 떠나 볼티모어를 거쳐 에미츠버그에 도착했다. 남북전쟁의 전쟁터였던 게티츠버그 근처다. 1809년 3월 25일 에미츠버그의 수도원에서 청빈, 정결, 순명을 서원했으며 이때부터 마더 씨튼으로 불렸다. 씨튼 수녀회가 창설된 것이다. 그녀의 나이 35세였다. 각지에서 온 열한 명의 수녀가 스톤하우스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이 무렵 엘리사벳은 올케이자 절친이었던 레베카와 큰딸 안나를 잃었다. 안나는 이탈리아 여행 중 남편의 생애 마지막 순간을 같이 지냈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통했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분신이었다. 인간적인 고통은 그녀를 참을 수 없이 아프게 했지만 죽음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별의 아픔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씨튼 성녀는 성모신심과 성체사랑이 지극하여 눈물을 흘리며 성체를 영했다고 한다. 그녀는 성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의 현존을 알았기에 “감실 건너편에 앉아 있거나 서서 일을 할 때에도 내 마음은 그곳을 향하고 있다.”라고 술회했다.

 

1812년 막내딸이 사망했고, 그녀를 가톨릭으로 안내한 이탈리아에서 만난 필리포 펠리키씨도 그해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이들의 연이은 죽음에 대해 “저는 다른 모든 피난처들을 잃어버리고 주님에게만 의존하게 되는 데서 오히려 기쁨을 느낍니다.”라고 적었다. 1817년 성 요셉 까리타스 수녀회라는 법인체가 설립되었다. 수녀회가 교회법상으로나 국가법으로 설립된 것이다. 설립목적은 “신심활동과 자선활동, 특히 노인과 병들고 허약한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과 소녀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한다.”이다. 1821년 엘리사벳 씨튼은 47세 나이에 미국 에미츠버그라는 시골 마을에서 가톨릭수녀로 세상을 떠났다. 씨튼 수녀회의 모원은 에미츠버그의 성 요셉 수녀원이며 이후 뉴욕, 필라델피아에 분원이 생긴 것을 시작으로 오늘날에는 전 세계에 씨튼 수녀회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서울, 논산, 강진 등에 씨튼 수녀원이 있다.

 

- 한진섭, 「씨튼 성녀와 소녀」, 2012, 브론즈, 개인소장.

 

 

몇 해 전 씨튼 성녀가 살았으며 수도회를 설립한 미국 동부의 에미츠버그를 방문했다.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국도로 들어서자 엘리사벳 씨튼로(avenue elizabeth seton)라는 도로 표지판이 보였다. 40킬로미터가 넘는 긴 길로 기억한다. 표지판을 보니 눈물이 났다. 뉴욕에서 볼티모어로, 다시 이 낯선 곳까지, 여인의 몸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차도 없던 시절이니 마차를 타고 가셨겠지.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씨튼 성녀가 수녀원을 설립한 미국의 시골 마을 에미츠버그까지 찾아가 성녀의 삶을 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베푼 은총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나는 <명화로 읽는 성인전>의 원고를 거의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서울의 씨튼 수녀원에서 조각가인 남편에게 씨튼 성녀상을 의뢰하였고, 그래서 씨튼 성녀를 알게 되었다.

 

책이 출판된 이전과 이후에도 나는 내 책에서 언급한 작품들이나 작가의 생가 또는 활동지를 거의 다 가서 확인했다. 수백 곳이 넘을 것이다. 비오성인이 살았던 산조반니 로톤도라는 이탈리아의 산골 마을을 차도 없이 찾아간 것도 잊을 수 없는 방문 중 하나다. 성인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증거하는 분들이다. 대전교구 주보에 1년간 이들 성인들의 생애와 그림에 대한 발자취를 연재한 것은 영광이었다. 이를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신 대전교구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2020년 5월 31일 성령 강림 대축일(청소년 주일) 대전주보 4면, 고종희 마리아(한양여대 교수, 미술사가)]

 

* 그동안 「명화와 만나는 성인 이야기」를 집필해 주신 고종희 마리아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Total 0 ]
등록하기